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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을 깨고 참된 지식으로 무장하라

[독서 기록 에세이] 허먼 멜빌과 떠나는 모비딕 항해

by 하트온

이제 배는 낸터컷 해안을 벗어나 너른 바다로 나아가고 있고, 언제라도 고래를 만나기만 하면 고래잡이는 시작될 것이다. 멜빌 작가는 그 일을 시작하기 전에, 독자들이 포경업에 대해 제대로 알기를 바란다. 선입견에서 벗어나 제대로 고래잡이에 대한 진지한 존중과 존경심을 품어주길 바라고 있다. 포경업에 대한 그 시대 사람들의 선입견을 하나하나 들어가며 변호하기 시작한다.


포경업이 육지 사람들 사이에서는 웬일인지 낭만적이지 못하고 명예스럽지 못한 직업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우리 고래잡이들에 대해 육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부당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 고래잡이를 존경하기를 거부하는 주된 이유는 우리 직업이 기껏해야 일종의 도살업이고 그 일터는 온갖 더러움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도살자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기꺼이 존경하는 군대 사령관들도 도살자들이고, 게다가 잔인하기로 이름 높은 도살자들이다... 우리의 일이 불결하다는 문제에 관해서 말하자면... 향유고래를 잡는 포경선이야말로 이 깔끔한 지구에서도 가장 깨끗한 것들 중의 하나... 그런 비난을 사실로 인정하더라도, 어수선하고 미끄러운 포경선의 갑판을 시체가 썩어가는 전쟁터의 그 말할 수 없는 참상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그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여성들의 열렬한 찬사를 받으며 축배를 든다. 군인이라는 직업이 위험하다는 이유로 군인에 대한 대중의 평가가 그렇게 높이 올라가는 것이라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즉, 포대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한 역전의 용사들도 향유고래의 거대한 꼬리가 불쑥 나타나 머리 위의 공기를 휘저어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면 그 즉시 놀라서 움츠러들고 말 것이라고. 서로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신의 경이와 공포에 비하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공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고래잡이들이 도살업자들로 비하되는 부분에 대해, 존경받는 군대 사령관들 또한 잔인한 도살자라는 논리로 맞서고 있다. 그리고 포경선이 위험하고 불결한 환경이라고 말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쟁터의 참상에 비하면 훨씬 나은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군인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성 때문에 더 존경받는 것이라면, 고래와 맞서 싸우며 느끼게 되는 공포는 용기 있게 적을 향해 달려드는 용사들도 움츠러들게 할 만한 상상 이상의 공포라고 장담한다.


멜빌은 또한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래잡이들의 과거의 업적과 현재의 위상을 하나하나 열거한다.


우리 고래잡이들이 무엇이며 지금까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 데 위트 시대의 네덜란드 사람들은 왜 포경선단에 제독을 두었을까? 프랑스의 루이 16세는 왜 자기 돈으로 댕케르크에서 출항하는 포경선에 필요한 장비를 갖추어주고, 우리 낸터컷 섬에서 20-30세대의 가족을 정중하게 초청했을까? 영국은 왜 1750년부터 1788년까지 영국 고래잡이들에게 100만 파운드가 넘는 보조금을 지급했을까? 마지막으로 우리 미국의 고래잡이들은 왜 오늘날 전 세계의 고래잡이들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수가 많아졌을까? 미국의 포경선은 700척이 넘고, 포경선을 타는 사람은 1만 8천 명에 이르고, 해마다 400만 달러를 소비하고, 출항할 때 2천만 달러의 가치를 갖는 배가 해마다 700만 달러의 수익을 가지고 돌아오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포경업에 강력한 무언가가 없다면,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단언하거니와, 지난 60년 동안 이 넓은 세계에 평화적으로 작용한 영향력 가운데 이 고상하고 강력한 포경업만큼 큼 잠재력을 가진 것은 없다... 포경업은 주목할 만한 사건들을 낳았고 그 사건들의 결과도 계속 중요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포경업은 자기 스스로 아기를 잉태하여 낳았다는 이집트의 어머니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오랫동안 포경선은 지구에서 가장 덜 알려진 외진 곳을 찾아내는 개척자였다. 포경선은 쿡이나 밴쿠버도 항해한 적이 없고 해도에도 실려 있지 않은 바다와 군도를 탐험했다. 미국과 유럽의 군함이 한때 미개했던 항구에 평화롭게 들어가면, 그들에게 처음으로 길을 알려주고 그들과 야만인들 사이에서 통역 역할을 한 포경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예포를 쏘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들은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맨손으로, 상어가 들끓는 이교도의 바다에서, 그리고 투창이 날아다니는 미지의 섬 해안에서, 해병대와 총포를 거느린 쿡 - 탐험 원정 영웅 - 도 감히 맞설 수 없었던 경이와 공포를 상대로 싸웠기 때문이다... 오스트레일리아가 문명 세계에 알려진 것도 고래잡이의 공적이다... 포경선이야말로 오늘날 저렇게 강대해진 식민지의 진정한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선교사와 상인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초기 선교사를 첫 번째 목적지까지 태워다 준 포경선에 경의를 표한다. 몇 겹으로 빗장을 걸어 잠근 일본이 손님을 환대하게 된다면, 그 공로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포경선뿐이다...'고래잡이에는 위엄이 없다'고? 우리 직업의 위엄은 하늘 자체가 증명하고 있다. 고래자리는 남쪽 하늘의 별자리다!... 나는 평생 동안 고래 350마리를 잡은 남자를 알고 있는데, 그 남자야 말로 350개의 성채를 함락시켰다고 자랑한 고대의 장군보다 더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내 빚쟁이들이 내 책상 속에서 귀중한 원고를 발견한다면, 나는 모든 명예와 영광을 포경업에 돌린다고 여기서 미리 밝혀두겠다. 포경선은 나의 예일 대학이며 하버드 대학이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이여, 여러분의 왕과 여왕들의 대관식에 쓰는 기름을 공급하는 것은 우리들 고래잡이라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작가는 긴 역사 속에서 포경업이 차지하는 위엄과 중요성에 관해 열변을 토한다. 포경선들이 바다 곳곳을 누비고 새로운 환경, 낯선 문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기꺼이 탐험했기에, 수많은 것들을 발견하고 찾아내고,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는데 초석을 까는 일을 담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최초의 선교사들과 상인들을 이교도의 땅으로 실어 나르고 일본과 같은 나라의 배타적인 문을 열게 한 것도 포경선 고래잡이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공포와 싸워 이긴 자들, 왕실에 가장 중요한 기름을 공급해온 존재도 고래잡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작가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포경업에 다 돌려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존경심을 가지고 있음을 작가는 열정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피쿼드'호가 바다 한가운데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이스마엘은 배안에서 만난 뱃사람에 대해 조금 더 파악하게 된다. 26장은 '피쿼드'호의 일등항해사 '스타벅'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


스타벅... 낸터컷 토박이에 대대로 퀘이커교도 집안... 큰 키에 성실한 사람... 근육이 두 번이나 구운 비스킷처럼 단단해서 열대지방에서도 견딜 수 있는 체격... 깡마른 몸... 깨끗하고 팽팽한 피부는 놀랄 만큼 건강한 상태...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 그가 평생 동안 침착하게 맞선 수많은 위험의 잔상이 아직도 거기에 어른거리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그 진지하고 강인한 불굴의 정신에도 불구하고... 뱃사람치고는 이상하게 양심적이고 자연계에 대한 깊은 경외감을 가지고 있어서, 거친 바다에서의 쓸쓸한 생활은 그의 마음을 미신으로 기울게 했다. 하지만 그가 믿는 미신은 어떤 사회에서는 무지가 아니라 오히려 지성에서 나오는 것처럼 여겨지는 미신이었다... 코드 곶에 두고 온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에 얽힌 아련한 가정적 추억... 때문에 그는 앞뒤를 헤아리지 않는 무모하고 대담한 행동을 억제하는 잠재적 영향력을 훨씬 받기 쉬워지는 경향이 있다.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포경업 같은 위험한 직업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이 자주 보여주는 그런 저돌적인 행동을 자제한다.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보트에 절대로 태우지 않겠다"고 스타벅은 말했다. 이 말은 가장 믿을 수 있고 쓸모 있는 용기는 위험에 맞닥뜨렸을 때 그 위험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데에서 나온다는 뜻일 뿐 아니라,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겁쟁이보다 훨씬 위험한 동료라는 뜻이기도 했다..."저기 있는 스타벅만큼 조심스러운 사람은 이 포경업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거야." 이등항해사인 스터브가 말했다... 스타벅에게 용기는 감정이 아니라 다만 자기에게 유용한 것이었고, 실제로 꼭 필요한 경우에 언제든지 쓸 수 있도록 늘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포경업에서 용기란 쇠고기나 빵처럼 반드시 배에 갖추어야 하고 어리석게 낭비하면 안 되는 주요 품목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이 위험한 바다에 나온 것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고래를 잡으러 온 것이지, 고래의 생계를 위해 고래한테 죽으러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두 번이나 구운 비스킷' 같은 근육의 소유자라는 묘사가 인상 깊다. 강인한 정신과 동시에 양심적이고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묘사에서, 핸리 데이빗 소로의 글이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 동시대 같은 지역에서 초월주의의 영향을 깊이 받은 소로와 멜빌이 어쩌면 '스타벅' 같은 인물을 통해 그 시대 미국 지성인의 모습으로 만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타벅은 두려움을 알고 그 속에서 제대로 된 용기를 쓸 줄 아는 조심스럽고 이성적인 사람인 것 같다.


이어 27장에서는 이등항해사 '스터브'와 삼등항해사 '플래스크'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다.


스터브는 코드 곶 출신이었고... 낙천적이었고, 겁쟁이도 아니지만 용감하지도 않았다. 위험이 닥쳐오면 무심한 태도로 받아들이고, 고래를 추적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1년 계약한 품팔이 소목장이처럼 조용히 그리고 침착하게 일했다. 명랑하고 느긋하고 태평스러운 그가 보트를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치명적인 위험도 만찬회에 불과하고, 자신의 보트에 탄 선원들은 모두 초대된 손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보트의 자기 자리를 쾌적하게 정비하는 데 까다로웠다. 고래에 접근하여 사투를 벌일 때에는 땜장이가 휘파람을 불면서 망치를 휘두르듯 무자비한 작살을 냉정하고 거침없이 다루었다. 분노에 날뛰는 괴물과 옆구리를 맞대고 있을 때에도 그는 좋아하는 옛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오랫동안 익숙해졌기 때문에, 스터브에게는 죽음의 아가리마저도 편안한 의자로 바뀌어 있었다... 스터브를 그렇게 태평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 은 그의 담배 파이프였던 게 분명하다... 그의 코와 마찬가지로 그의 얼굴의 일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맨 먼저 하는 일은 바짓가랑이에 다리를 꿰는 것이 아니라 입에 파이프를 무는 것이었다... 스터브의 줄담배는 모든 정신적 시련을 없애주는 일종의 소독약으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스터브는 성격이 느긋하고 낙천적인, 위험이나 죽음에 대해 걱정하기보다 순간순간을 즐기는데 집중하려는 사람인 것 같다.


삼등항해사는 비니어드 섬의 티스베리 출신인 플래스크였다. 그는 땅딸막하고 다부진 체격에 혈색이 좋은 젊은이인데, 고래에 대해 매우 호전적이었다... 고래야말로 자신의 원수, 조상 대대의 원수라고 생각하여, 고래를 만날 때마다 죽이는 것은 그에게 명예가 걸려있는 일종의 체면 문제였다. 그래서 고래의 거대한 덩치와 신비로운 행동이 자아내는 여러 가지 경이에 대해 그는 어떤 의미의 존경심도 느끼지 않았고, 고래와 마주쳤을 때의 위험에 대해 불안 같은 감정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따라서 그 놀라운 고래는 크게 확대된 생쥐이거나 기껏해야 물쥐일뿐이고, 선수를 쳐서 포위한 뒤 약간의 시간과 노력만 들이면 얼마든지 죽여서 삶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플래스크의 생각이었다... 무지하고 무의식적인 대담성... 그래서 혼 곶을 돌아 3년 동안 항해하는 것도 그 기간만큼 지속되는 즐거운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플래스크는 고래를 반드시 죽이고 말아야 할, 농장 가축들을 괴롭히는 한 마리의 늑대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단순하고 담대한 성격에 포경업을 상당히 즐기는 사람인 것 같다.


스타벅, 스터브, 플래스크, 이 세 사람의 항해사는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라고 멜빌은 그들의 역할에 대한 설명을 자세히 덧붙이고 있다.


보편적 규정에 따라 '피쿼드'호의 보트 세 척을 지휘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 세 항해사는 각 중대의 장... 길고 날카로운 고래잡이 창으로 무장하고 있으니까, 정예로 선발된 삼창사라고 할 수 있었고... 작살잡이들은 투창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이름 높은 포경업에서 항해사나 보트장은 옛 중세의 기사가 종자를 데리고 있는 것처럼 보트 키잡이나 작살잡이를 거느리고 있는데, 그들은 위급한 상황에서 고래를 공격하던 항해사의 창이 심하게 뒤틀리거나 구부러지면 항해사에게 새 창을 건네준다. 게다가 둘 사이에는 대개 긴밀한 우정이 존재한다. 따라서 '피쿼드'호의 작살잡이들이 누구이고 그들이 각자 어떤 보트장에게 속해 있었는지를 이 자리에서 적어두는 것이 적당할 듯하다. 첫째로 퀴퀘그. 일등항해사 스타벅이 그를 종자로 선택... 다음은 타슈테고. 순순한 인디언으로, 비니어드 섬 서쪽 끝에 있는 게이헤드 출신인데, 이곳에는 오랫동안 이웃한 낸터컷 섬에 용맹 무쌍한 작살잡이를 대부분 공급해온 인디언 마을의 마지막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타슈테고의 길고 메마른 검은색 머리카락, 튀어나온 광대뼈, 동글동글한 검은 눈 -인디언치고는 크기 때문에 동양적이지만, 반짝거리는 눈빛은 남극적이다 - 이 모든 것은 그가 뉴잉글랜드의 거대한 사슴을 찾아 손에 활을 들고 본토의 원시림을 누비고 다닌 그 자랑스러운 전사 사냥꾼들의 순수한 피를 물려받았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백발백중의 화살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는 자손의 작살로 바뀌었다. 뱀처럼 유연한 그의 팔다리에 솟아오른 갈색 근육을 본 사람이라면 초기 청교도들의 미신을 거의 믿었을 것이고, 이 야생의 인디언이야 말로 '하늘의 모든 힘을 가진 왕자'의 아들이라고 반쯤을 믿었을 것이다. 타슈테고는 이등항해사인 스터브의 종자였다. 작살잡이들 가운데 세 번째는 다구. 거대한 몸집에 피부가 석탄처럼 새까맣고 걸음걸이가 사자 같은 흑인... 귀에는 황금 귀고리 두 개... 젊은 시절에 다구는 고향 해안의 한적한 후미에 정박해 있는 포경선에 자진해서 탔다... 다구는 야만인의 미덕을 모두 간직한 채, 기린처럼 꼿꼿한 자세로 195센티미터의 거구를 양말 속에 모두 쑤셔 넣고 갑판을 돌아다녔다. 그를 쳐다보면 신체적으로 위축되는 느낌이 들었다... 땅딸보 플래스크의 종자... 나머지 선원들에 대해 말하자면, 오늘날에는 미국 포경업계에 고용된 수 천 명의 평선원 가운데 미국 태생은 절반밖에 안 되지만 간부 선원은 거의 다 미국 태생이다... 그 모든 경우에 미국인은 기꺼이 두뇌를 제공하고, 세계의 나무지 지역에서는 인심 좋게 근육을 공급하기 때문이다. 이 고래잡이 선원들 가운데 적잖은 수가 아조레스 제도 출신인데, 낸터컷에서 출항하는 포경선은 아조레스의 바위 투성이 해안에서 농사를 짓는 강인한 농부들을 선원으로 고용하기 위해 자주 그곳에 들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섬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은 최초의 고래잡이가 되는 모양이다. '피쿼드'호의 경우도 최고의 고래잡이들은 거의 다 섬 출신이고, 게다가 섬처럼 고립된 외톨이들이다. 그들은 인류 공통의 대륙 따위는 인정하지 않고, 각자 자신만의 대륙에 따로 떨어져 사는 외톨이였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일등항해사 스타벅을 보조하는 작살잡이는 식인 풍습을 가진 폴리네시아인 퀴퀘그
이등항해사 스터브를 보조하는 작살잡이는 멸종 위기에 놓인 미국 원주민 타슈테고
삼등항해사 플래스크를 보조하는 작살잡이는 거구의 흑은 다구


작가 멜빌은 미국의 모든 직업군에서 그렇듯, 포경업계에서도 간부 선원 또한 거의 다 미국 태생 백인이며, 부하 선원은 타인종이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미국인이 두뇌를 제공하고, 세계 나머지 지역에서 근육을 공급한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리고 대체로 고립되고 척박한 환경의 섬 출신의 사람들이 고래잡이가 되는 경향이 크다는 것도 언급하고 있다. 앨라배마 검둥이 소년 '핍'에 대한 언급도 짧게 했는데 아직 그 이상의 설명은 없으므로, 소년이 등장할 때까지 기다리면 될 듯하다.


배가 항구를 떠난 시기는 크리스마스였다. 줄곧 살을 에는 겨울 추위를 견뎌야 했는데, 위도가 점점 낮아질수록 날씨가 풀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전혀 모습을 볼 수 없던 에이해브 선장이 마침내 갑판에 모습을 드러냈다. 에이해브 선장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는 화형대에서 불길에 휩싸여 온몸이 괴멸되었지만 불길이 사지를 다 태워버리기 전에 줄행랑친 남자처럼 보였다. 불길은 옹골찬 노인의 강건함을 눈곱만큼도 손상시키지 않았다. 키가 크고 딱 바라진 몸은 온통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고, 첼리니가 주조한 페르세우스처럼 한 점의 변형도 허용하지 않는 형상을 이루고 있는 듯했다. 잿빛 머리털 사이에서 빠져나와 황갈색으로 그을린 얼굴과 목덜미의 한쪽을 따라 내려오다가 옷 속으로 사라지는 가느다란 막대기 같은 흉터가 보였다. 그 납빛 흉터는 큰 나무의 곧게 치솟은 줄기가 벼락을 맞았을 때 이따금 생기는 수직의 자국과 비슷했는데, 나무줄기 위쪽에 떨어진 벼락이 나뭇가지 하나 떨어뜨리지 않고 우듬지에서 밑동까지 나무껍질을 벗겨 줄기에 가느다란 홈을 새기면서 맹렬한 속도로 내려가다가 땅 속으로 사라지면, 나무는 여전히 싱싱하게 푸르지만 벼락 맞은 자국은 낙인처럼 남아 있다. 그 흉터가 선천적인 것인지, 아니면 어떤 치명적인 부상이 남긴 흔적인지는 아무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타슈테고의 선임자인 게이헤드 출신의 늙은 인디언 선원이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의 미신 같은 주장에 따르면, 마흔 살 때까지는 에이해브 선장에게 그런 낙인이 없었고, 그 후 사람과 싸우다가 다친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폭풍우와 싸우다가 그런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에이해브의 섬뜩한 풍모와 줄무늬를 이룬 납빛 흉터를 보고 받은 충격이 하도 커서, 나는 이 압도적으로 닥쳐오는 섬뜩한 기분이 그가 몸의 일부를 의지하고 서 있는 거칠고 하얀 다리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상앗빛 한쪽 다리는 항해 중에 향유고래의 턱뼈를 갈아서 만들었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서 있는 기묘한 자세도 나를 놀라게 했다. '피쿼드'호의 뒷갑판 양쪽, 뒷 돛 밧줄 가까이에 있는 널빤지에 지름이 1.5 센티미터쯤 되는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그는 고래뼈로 만든 다리를 그 구멍에 끼우고, 한 손을 들어서 밧줄을 움켜잡고 꼿꼿이 서서는, 끊임없이 곤두박질하고 있는 뱃머리 너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앞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그 두려움 모르는 눈길에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 불굴의 정신, 단호하고 양보할 수 없는 무한한 고집이 담겨 있었다... 에이해브 선장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의 표정을 얼굴에 띠고 그들 앞에 서 있었는데, 그에게서는 어떤 강력한 슬픔이 지닌 위엄,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당당하고 압도적인 위엄이 풍기고 있었다... 그날 아침 이후 그는 날마다 선원들에게 모습을 보였다. 때로는 회전축 구멍에 다리를 끼운 채 서 있기도 하고, 때로는 애용하는 고래뼈 의자에 앉아 있기도 하고, 때로는 갑판 위를 느릿느릿 걸어 다니기도 했다... 따뜻하고 새가 지저귀는 듯한 날씨는 그를 유인하여 언짢은 기분에서 조금씩 끌어내는 듯했다... 에이해브도 결국 그 소녀 같은 바깥공기의 상쾌한 유혹에 조금은 반응을 보였다. 그의 얼굴에 작은 꽃봉오리 같은 희미한 미소가 나타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 꽃봉오리는 곧 환한 웃음으로 활짝 피어났을 것이다.


에이해브 선장의 몸이 드러내는 파란만장한 경험의 흉터 자국들은 섬뜩한 느낌을 준다. 타인에게만 그런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도 그런 음울한 느낌으로 가득한 상태인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활짝 피어오르게 하는 밝은 햇살 속에서도 희미한 미소의 그림자밖에 드러내지 못하는 내면이라니, 에이해브 선장에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끈질기게 이어지는 삶과 항해는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진다. 대부분의 현대 일반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격동적 인생을 겪어온 19세기 미국 포경선 선장은 신비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어디선가 에이해브 선장은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했던 초월주의의 폐해를 풍자하고 꼬집기 위해 멜빌이 내세운 인물이라고 읽은 기억이 있다.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니, 에이해브 선장 한 사람만이 초월주의를 대변하는 것 같지 않다. 각 인물과 배경, 등장하는 모든 것들이 초월주의 정신의 다양한 면을 드러내고 있고, 그 시대 배경 자체가 초월주의가 깊이 스며든 시간이며, 고래와 바다라는 모티브부터 시작해 글 전체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엇을 추구하려는 초월주의가 흐르는 것만 같다. 그것이 그 시대 미국의 정신이고 군상들의 뼛속까지 스며든 총체적 문화였던 것이 아닐까. 미국의 초월주의, 혹은 다양한 개개인의 관념을 타고 흐르는 시대정신의 물줄기, 혹은 멜빌 작가가 탐구하고 찾는 무엇이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 이들의 항해를 따라가며 더 알 수 있게 되리라 기대해 본다.


배는 얼음과 빙산을 뒤로하고 1년 내내 여름이 계속되는 열대 해역으로 들어섰다. 계속되는 화창한 날씨 속에 항해하는 느낌을 작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따뜻하면서 시원하고, 맑고, 온갖 소리가 울려 퍼지고, 향기롭고, 넘칠 듯이 풍족한 낮 시간은 마치 장미 향수를 뿌린 눈으로 만든 페르시아 빙과를 수북이 담은 수정 그릇 같았다. 별이 빛나는 장엄한 밤은 보석으로 장식한 벨벳 옷을 걸치고, 집에 홀로 남아, 자긍심 속에서, 정복하러 떠난 백작들, 황금빛 투구를 쓴 태양들의 기억을 끌어안고 있는 도도한 귀부인들 같았다. 낮은 그렇게 매력적이고 밤은 그렇게 유혹적이어서, 잠을 언제 자는 게 좋을지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시들지 않는 날씨의 모든 매력은 바깥세상에 새로운 매력과 효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는 영혼에도 작용했고, 특히 고요하고 온화한 저녁 무렵이며, 맑은 얼음이 대부분 조용한 황혼 녘에 형성되듯 기억은 수정처럼 맑은 결정체를 쏟아냈다.


배를 타고 항해를 시작하여 계속되는 화창한 맑은 날씨 속으로 진입하여 달리는 시간, 고래잡이 뱃사람들에게 이 시간이 가장 설레고 행복하고 희망이 넘치는 시간이 아닐까 짐작된다. 장미향 빙과를 수북이 담은 수정 그릇 같은 눈부시게 매력적인 낮이라니, 벨벳 옷을 입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귀부인들의 것 같은 유혹적인 밤이라니, 머릿속에 그림만 그려보아도 짜릿한 기대감이 밀려와, 그 갑판 위에서 느낄 수 있다는 낮의 햇살과 밤의 별빛을 갈망하여 손을 뻗어보고 싶어 진다. 그 햇살과 별빛이 좋아서 잠자리에 들기 싫은 사람 중에 에이해브 선장도 포함된다.


밤에 침대를 떠나 어둠의 장막에 감싸인 갑판을 가장 자주 찾는 것은 수염이 반백인 노인들일 것이었다. 에이해브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와서는 줄곧 바깥에서만 살고 있기 때문에, 선실에서 갑판으로 찾아간다기보다 갑판에서 선실로 찾아간다고 말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나처럼 늙은 선장으로서는 이 좁은 승강구를 내려가서 묘혈 같은 내 침대로 가는 것이 마치 무덤 속으로 내려가는 듯한 기분이 들어"라고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했다...


에이해브 선장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다. 그는 자주 피던 담배 파이프도 더 이상 위로가 되지 않는다며 끊겠다고 결심하고 바다에 던져 버린다. 에이해브는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으며 자신과의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일까. 기독교와 이교도 세계 사이 경계에 서 있는 영원한 이방인 이스마엘이 멜빌이 내세운 관찰자, 화자였고, 퀴퀘그가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으로 자유롭고 선한 인물이었다면, 에이해브 또한 작가 자신이 품고 고민하는 관념을 드러내는 인물일 것이 분명하다. 에이해브 선장은, 삶이 할퀴고 가는 지독한 상처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인지도 모른다. 에이해브의 예측 불가능한 심경의 변화가 많이 기대된다.


<모비딕> 32장은 고래학이라는 제목으로 고래를 야무지게 정의하고, 분류하고 있다. 소설 속에 이 같은 고래와 포경업에 관한 학술적 지식에 버금가는 내용을 담았던 덕분에, 이 책은 오랫동안 문학 코너가 아닌 서점의 수산업 코너에 비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고래학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멜빌이 기록한 내용은 고래에 관한 한 편의 논문처럼 전문적이고, 방대하고, 정확하다. 수많은 전문 서적들을 참고하고, 동물학자, 의학자 같은 전문가들의 의견과 성서 저자들부터, 고래잡이 선장 스코스비까지 고래에 관해 글을 쓴 사람들의 글을 꼼꼼히 살펴본 후에 나름의 기준을 만들고 분류 정리하는 방대한 작업을 하였다. 작가는 독자들이 '피쿼드'호를 따라가며 고래와 만나기 전에 그 특별한 바다짐승에 관해 철저히 올바르게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멜빌이 정리한 내용을 더 간략히 정리해 보려 한다.


그전에 잠시, 멜빌이 자신이 이런 정리를 한 목적과 자신이 결론 내린 고래의 정의에 대해 언급한 부분부터 읽어보자.


이제 고래의 다양한 종을 분류하는 대중적이고 포괄적인 분류법이 필요하다. 지금은 우선 간단한 윤곽만 만들어놓고 나중에 후세 연구자들이 모든 항목을 채워 넣으면 된다. 이 일을 자진해서 맡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변변치는 못하지만 내가 한번 시도해보려고 한다... 내 목적은 단지 고래학의 체계에 관한 밑그림을 제시하는 것뿐이다... 나는 도서관들을 헤엄쳐 다니고 넓은 바다를 항해한 사람이다. 나는 눈에 보이는 이 손으로 고래들과 관계를 가졌다. 나는 진지하다. 그리고 나는 노력할 것이다. 우선 처리해야 할 준비 단계가 있다. 첫째, 이 고래학이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조건에 있다는 것은 이 학문의 문지방에서 마주치는 사실, 즉 어떤 면에서는 고래가 물고기냐 아니냐가 아직도 논의의 초점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아도 분명하다... 나는 모든 논쟁을 보류하고, 고래가 물고기라는 구식 의견을 받아들여 성스러운 요나에게 나를 지지해달라고 부탁하겠다... 둘째, 앞으로 영원히 고래를 따라다닐 꼬리표가 되도록 명백한 외형적 특징으로 고래를 정의하려면... 고래는 '수평 꼬리를 가졌고 물을 내뿜는 물고기'다. 그것이 고래다. 너무 간단해 보이지만 이 정의야말로 깊고 넓은 사색의 결과다.


멜빌이 정의한 고래의 정의 ' 수평 꼬리를 가졌고 물을 내뿜는 물고기', 이것이 멜빌의 고래 분류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먼저 읽고 넘어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몸집이 크든 작든 이런 특징을 가진 물고기를 모두 고래의 범주에 넣은 멜빌의 분류를 아래에 간단히 정리했다.



1. 2 절판 고래 (대형 고래)


- 2 절판 고래에 속하는 고래들 : 향유고래, 참고래, 긴수염고래, 혹등고래, 멸치고래, 대왕고래

- 각각의 특징: 향유고래는 가장 사납고 상업적으로도 의약품 원료인 경뇌유를 얻을 수 있는 등 가장 가치가 있다. 참고래는 인간이 사냥한 최초의 고래. 긴수염고래는 뉴욕 항로에서 대서양을 횡단하는 선객들에게 멀리서 물줄기를 뿜는 장면을 자주 보여주는 고래로 참고래보다 작고 빛깔이 밝아서 올리브색이며 등지느러미로 식별이 가능하며, 무리 지어 살지 않고 혼자 다닌다. 혹등고래는 북아메리카 해안에 자주 나타나며, 행상인이 커다란 등짐을 짊어지고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장난을 좋아하는 쾌활한 고래. 멸치고래는 이름밖에 알려진 것이 없어, 등을 빼고는 몸의 어느 부위도 사람들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 대왕고래 역시 숨어 지내기를 좋아해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2. 8 절판 고래 (중간 크기 고래. 대형 고래의 축소판)


-8 절판 고래에 속하는 고래들: 솔잎돌고래, 흑고래, 외뿔고래, 범고래, 상어고래

-각각의 특징: 솔잎돌고래는 요란한 울림소리 때문에 많이 알려진 4.5 - 7.5 미터 크기 고래로, 무리 지어 헤엄쳐 다닌다. 흑고래는 검은색의 게걸스럽고, 입술 안쪽이 위쪽으로 뒤집혀 웃고 있는 얼굴을 한 4-6 미터 크기의 고래로 거의 모든 위도에서 발견되며, 갈고리 모양의 등지느러미를 보이는 것이 특징 (가정용 싸구려 기름 공급원). 외뿔고래는 몸길이 5미터 정도 뿔 길이 1.5 - 4 미터에 달하는 고래로, 뿔은 송곳니가 자라난 것으로 턱에서 수평보다 조금 아래로 기울어진 선을 따라 길쭉하게 뻗어있고, 몸은 우윳빛 바탕에 검은 반점이 찍혀 있어 표범처럼 보이며 주로 극지 부근의 바다에서 발견된다. 범고래는 솔잎돌고래와 비슷한 크기로 성질이 사나운 식인종 같은 고래로 아직 잡힌 적이 없어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고래다. 상어고래는 적을 공격할 때 꼬리를 매처럼 사용한다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3. 12 절판 고래 (1 - 1.5 미터 정도의 돌고래)


-12 절판 고래에 속하는 고래들: 만세돌고래, 해적돌고래, 흰주둥이돌고래

- 각각의 특징: 만세돌고래는 거의 지구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돌고래로 언제나 기운차게 떼 지어 헤엄쳐 다니며, 하늘 높이 뛰어오르는 특징을 가진 유쾌한 물고기로 기름도 많고 고기 맛도 좋다. 해적돌고래는 태평양에서만 발견되는 매우 포악한 돌고래로 만세돌고래보다 조금 크고 생김새는 비슷하다. 흰주둥이돌고래는 돌고래 가운데 가장 큰 종류로 태평양에서만 발견되는데, 늘씬한 몸매에 등에 지느러미가 없다는 특징과 함께 입 주변이 하얀 밀가루를 발라놓은 듯하다.



작가 멜빌은 다음으로 우리에게 언뜻 봐선 알 수 없고, 명시된 위계질서로도 파악할 수도 없는 포경선 안에서 절로 발생하는 따라서 인정되어야 할 진짜 질서에 대해 말해준다.


포경선의 간부선원과 관련하여, 포경선의 독특한 사정을 간단히 적어두기... 포경선이 아닌 다른 배에는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작살잡이가 간부선원 계급을 이루기 때문에... 작살잡이라는 직책에 부여된 중요성은 200년 전의 네덜란드 포경업계에서는 원래 포경선의 지휘권을 오늘날 선장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독점하지 않고 선장과 '스펙신더(Specksynder)'라고 불리는 간부선원이 나누어 가졌다는 사실로 분명히 입증... '비계를 자르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작살잡이장'과 동의어가 되었다. 당시에는 선장의 권한이 항해와 포경선의 전반적 관리에 국한되어 있었다. 한편 고래 사냥과 거기에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는 스펙신더, 즉 작살잡이장이 최고 지휘권을 잡았다... 과거의 권위는 많이 줄어들어... 현재는 선임 작살잡이 정도의 지위... 선장의 부하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그래도 고래잡이 항해의 성공 여부는 주로 작살잡이들이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에 달려 있고, 미국 포경업계에서는 작살잡이가 보트 작업에서 중요한 선원일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는 갑판원들도 모두 그의 지휘를 받게 되기 때문에... 직업상 평선원들보다 상급자로 구별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선원들로부터 동료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작살잡이에게 성공 여부가 달린 고래잡이 항해인만큼, 작살잡이의 역할과 지위는 중요하지만, 당시 미국 포경산업계에서 작살잡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선원들의 동료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멜빌의 소설을 통해 실제로 배 안에서 작살잡이들이 받는 대접과 발휘하는 역할은 간부선원에 가까웠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실제 현장에서 작살잡이의 입지는 몹시 중요했던 것 같다.


중대한 차이는 간부선원이 고물 쪽에 사는 반면, 평선원은 이물 쪽에 산다는 점이다. 그래서 포경선만이 아니라 상선에서도 항해사들은 선장과 같은 고물 쪽 숙소를 쓰고, 미국의 포경선에서도 작살잡이는 배의 뒷부분에 숙소를 갖는다. 즉 그들은 선실에서 식사를 하고, 선실과 벽을 통해 연락할 수 있는 곳에서 잠을 잔다.


작가는 선장과 간부선원들이 식사를 하는 방식과 순서에 대해서도 꼼꼼히 설명해주고 있다. 식사를 준비하고 서빙하는 '찐만두'라는 캐릭터가 드디어 처음으로 등장한다.


정오가 되면, 급사인 '찐만두'가 빵덩어리 같은 창백한 얼굴을 선실 창문으로 불쑥 내밀고 선장에게 점심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린다... 그는 뒷돛대 밧줄을 움켜잡고 갑판으로 내려가더니, 여전히 무뚝뚝한 목소리로 "점심 먹세, 스타벅! 하고 말하면서 선실 안으로 사라진다... 일등 토후인 스타벅은 술탄이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고 믿는 것이 당연해질 때쯤 조용한 안식에서 깨어나 갑판을 두세 번 돌고 나침반을 가만히 들여다본 뒤, 약간 유쾌한 어조로 "점심 먹세, 스터브!"하고 말하면서 승강구를 내려간다. 이등 토후는 잠시 삭구 장치를 둘러보며 빈둥거리다가 아딧줄을 가볍게 흔들어 그 중요한 밧줄이 제대로 고정되어 있는지 살펴본 다음, 역시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고 재빨리 "점심 먹세, 플래스크!"하고 말하면서 선임자들을 뒤따라간다... 삼등 토후는 이제 뒷갑판에 자기 홀로 남아 있다는 것을 알자 어떤 기묘한 속박에서 해방된 기분이 들었는지... 격렬하게, 하지만 소리 없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멋진 솜씨로 모자를 뒷돛대 꼭대기에 던져 올리고, 적어도 갑판에서 보이는 동안은 신나게 춤을 추면서 아래로 내려간다... 플래스크는 식사를 하러 내려오는 마지막 사람이었고, 가장 먼저 식사를 끝내고 위로 올라가는 사람이었다. 생각해보라! 이 때문에 플래스크의 식사 시간은 아주 빡빡했다... 언전가 플래스크가 슬그머니 고백한 바에 따르면, 항해사라는 권위 있는 지위로 승진한 그 순간부터 다소라도 배가 고프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먹은 것은 시장기를 달래주기는커녕 오히려 허기를 그의 몸속에 영원이 붙잡아둘 뿐이었다. 평화와 만족은 영원히 배 속에서 떠나버렸다고 플래스크는 생각했다... 평선원일 때 그랬던 것처럼 앞갑판에서 오래된 고기일망정 손으로 집어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승진한 보람이란 말인가. 영광은 덧없고 인생은 어리석기 짝이 없구나!


공식 간부선원인 선장과 일등항해사, 이등항해사, 삼등항해사가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평소에 일을 하면서는 대등하게 의견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식사 예절만큼은, 선장의 권위, 더 높은 지위의 권위가 엄청나게 커 보인다. 눈치를 보며 더 높은 사람이 더 빨리 더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 바쁘다. 덕분에 간부선원 중 제일 말단인 삼등항해사 플래스크는 귀한 버터 같은 건 손도 대지 않으, 편하게도 충분히도 먹지 못하고 상관들의 식사 속도에 맞추느라 전전긍긍한다. 간부 선원으로 승진하고, 오히려 더 불편하고 불행해진 건 아닌가 회의감마저 든다. 이 모습이 과거보다 더 좋아졌다고 믿는 현대 사회, 특히 각종 기관 조직 체계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해서, 플래스크를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우리 모두가 사실은 플래스크처럼 뭔가 더 개선하고 발전하고, 더 이루고 올라가면서, 한 단계 위의 삶이 나 나은 것이기를 기대했으나, 항상 실제 결과는 득보다 실이 많은 건 아닌지. 몸도 마음도 더 고단하고 힘들어진 것이 아닌지. 내가 나 자신을 위해 옳은 선택, 옳은 기회를 잡은 것이 맞는지 생각하게 된다.


간부선원들의 식사시간이 예의범절을 지키느라 거북스러웠던 반면, 이들 다음으로 작살잡이들이 모여 밥을 먹는 장면은 그 모든 규율을 단번에 박살 내는 반전이다.


세 명의 작살잡이가 연회에 초대되었는데, 나머지 유산의 상속자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엄숙한 선실을 순식간에 일종의 머슴방으로 만들어버렸다. 선장과 항해사들의 식탁을 지배한 것은 참을 수 없는 억압과 눈에 보이지도 않고 형언할 수도 없는 오만함이었지만, 그보다 지위가 낮은 작살잡이들의 식탁을 지배한 것은 태평스러운 방심과 여유, 그리고 거의 광란이라 할 만한 자유분방함이었다... 그들의 상관인 항해사들은 자기네 턱이 움직이는 소리도 두려워하는 것 같았지만, 작살잡이들은 음식을 쩝쩝 소리가 나게 씹으면서 음미하고 있었다... 빵 같은 얼굴을 가진 급사는 파산한 제빵사와 간호사의 아들이었고, 천성적으로 소심한 겁쟁이였다. 그런데 무서운 에이해브 선장이 늘 눈앞에 버티고 있고, 이들 세 야만인이 주기적으로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온종일 입술을 바들바들 떨면서 살아야 했다... 아아, 가엾은 '찐만두'여! 백인 급사가 식인종들의 시중을 들다니, 얼마나 가혹한 운명인가.


이 두 대조적인 식사 장면은 기독교 세계와 이교도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 교리, 예의 법도, 도리 규율이 얼마나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고 숨 막히게 하는지를,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의 분방한 식사 시간과 대조를 통해 보여준다. 멜빌은, 삼등항해사 플래스크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그려서, 청교도 세계의 규율을 받아들이고 그 속으로 들어가 그 사회의 일부로 살아가기 위해 종교 지도자와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마음의 평화와 자유를 잃은 평범한 미국인의 모습 - 야만인과 다른 기독교도의 모습 - 이 이렇게 불편하고 힘들다는 걸 보여주려 한 것인지 모른다.


한국인의 식사 시간을 한 번 그려보게 된다. 아니, 보편적인 한국인 밥상까지 갈 것도 없이, 내 집 밥상 문화는 편안한가. 식사 예절을 다 지키는 것이 숨이 막힐 정도인가? 아니면 너무 자유롭다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욕먹지 않고 함께 어울리기 힘들 정도인가? 양반과 상놈, 교양 있는 시민과 야만인,... 그런 잣대의 몽둥이에 맞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오랜 세월 각 시대 문화가 제시하는 식사 예절을 지키는 일에 꽤나 노력을 해왔다. 내겐 이 식사예절이 너무 복잡해졌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과 밥을 먹을 때는 한국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 예절의 선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보다 어린 젊은이들과 밥을 먹을 때는 그들이 마음 편하게 느끼는 적정한 선을 찾느라 고심하고, 미국 사람과 밥을 먹을 때는 미국 사람들에게 중요한 덕목들을 지켜가며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내 모습... 내 처지가 이쪽저쪽 눈치를 다 봐야 하느라 기분 좋게 식사시간을 즐길 수 없는 삼등항해사 플래스크 처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플래스크가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혼자 편하게 먹고 싶은 음식을 원래 하던 버릇대로 손으로 마구 마음껏 집어 먹을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참고 자료: 허먼 멜빌의 <모비딕> (작가정신, 김석희 역) 24-34장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by fur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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