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에세이] 허먼 멜빌과 떠나는 모비딕 항해
다음으로 멜빌 작가는 배의 돛대 꼭대기에 올라 사방으로 펼쳐진 바다를 내려다보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내가 경험했던 가장 비슷한 일은 바닷가 앞 고층 호텔방 베란다에서 바다를 내려다본 일 정도일 것이다. 앞으로 그리고 옆으로 드넓게 펼쳐진 바다의 모습은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다르구나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자칫 한 눈을 팔면 떨어질 위험이 있는 곳에서 보는 스릴 같은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멜빌은 작가 개인의 사색을 담기 전에, 돛대 꼭대기에 올라간다는 의미를 여러 역사적 세계사적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돛대 꼭대기 위에서 망보는 일은 매우 유서 깊고 흥미진진한 일... 내가 알기로, 최초로 돛대 꼭대기에 올라선 사람은 고대 이집트 사람... 최초의 피라미드가 천체를 관측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고고학자들의 믿음에 근거... 건축물의 사면이 모두 독특한 계단식 구조... 옛날 천문학자들은 다리를 놀랄 만큼 길게 들어 올려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가서 새로운 별을 발견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곤 했다. 오늘날 배에서 망보는 사람들이 다른 배의 돛이나 고래가 방금 시야에 들어왔다고 고함을 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옛날 유명한 기독교 은자였던 성 스틸리테스 - 시리아의 기독교 성인. 35년 동안이나 기둥 꼭대기에서 기도하며 지냈다 - 는 사막에 높은 돌기둥을 세우고 인생의 후반부를 그 기둥 꼭대기에서 보냈다...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모든 것과 맞섰고, 문자 그대로 기둥 위에서 죽었다... 나폴레옹은 방돔 광장의 원기둥 꼭대기에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조지 워싱턴도 볼티모어의 높은 돛대 위에 높이 올라서 있다... 넬슨 제독도 트라팔가 광장에 세워진 그의 돛대 꼭대기에 올라...포경업의 초창기에는 배들이 정기적으로 사냥감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낸터컷 유일한 역사가인 오비드 메이시의 말에서). 그곳 섬사람들은 해안에 높은 기둥을 세우고... 뉴질랜드 만에서 고래를 잡는 사람들이 이 전략을 채택했는데, 고래를 발견하면 해안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는 보트에 알려주었다.
돛대 꼭대기는 모두를 대표해 망을 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장소이며, 동시에 용기를 가지고 맞서 견뎌야 하는 성스러운 장소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많은 역사적 인물 동상들이 세계 곳곳의 돛대 꼭대기 같은 탑에 올라 있는 것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다. 그리고 포경업 역사에서, 초창기에는 배를 띄우기 전에 해안에 높은 기둥을 세우고 고래를 발견하면 대기하고 있는 보트에 알려 고래잡이를 나가는 방식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는 것도 기록하고 있다. 돛대를 만들고, 그 위에 올라간다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깊이 사색하고 연구했던 멜빌의 행보를 보면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단순하고 가벼운 일들도 역사가 있고 그 최초의 의미가 있고, 변형되기 전에 어떤 초기 형태가 있을 것이라는 자각에 이른다. 숟가락질 하는 일이나, 배고파 급히 컵라면에 물을 붓는 일까지 인간이 추구했던 의미가 있고, 역사가 있는 것이다! 돛대라는 배경 사물 하나를 이렇게 책 한 장을 할애하여 사색하는 주인공으로 끌어 올려놓은 멜빌의 의지와 시도를 보면서 내 안에서는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소설 작법, 구성요소 같은 것들이 뒤집히고 난립한다.
멜빌이 돛대 꼭대기를 이렇게까지 주인공으로 끌어올려놓은 이유가 있다. 돛대 꼭대기 위가 작가이자 철학자인 자신에게 독특하고 신선한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특별한 의미 넘치는 성지였기 때문이었다.
선원들은 교대로 돛대 꼭대기에 올라간다. 교대는 두 시간마다 이루어진다. 열대지방의 잔잔한 바다에서는 돛대 꼭대기에 올라가는 것이 더없이 유쾌하다. 아니, 공상에 잠겨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일이다... 여기서 솔직하게 자백하자면, 나는 사실 변변치 못한 망꾼이었다. 마음속에서 우주의 문제가 맴돌고 있는데, 더구나 온갖 상념을 일으키는 그런 높이에 나 혼자 남겨진 상태에서, 어떻게 내가 '눈을 부릅뜨고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라, 그리고 즉시 알리라'는 포경선의 작업 규정을 준수할 수 있겠는가... 경계가 무엇보다 중요한 포경업에 이마가 좁고 눈이 움푹 들어간 젊은이를 채용하는 것은 조심하기 바란다. 그런 젊은이는 시도 때도 없이 명상에 잠기기 일쑤고, 바우디치의 <항해술> 대신 플라톤의 <파이돈>을 머릿속에 넣고 배를 탄다... 눈이 움푹 틀어간 젊은 플라톤주의자는 세계를 열 바퀴나 돌아도 고래기름을 한 통도 보태주지 못할 것이다... 젊은 플라톤주의자들은 시력이 약해서 먼 곳을 볼 수 없으니... 파도의 리듬과 생각이 한데 융합되어 이 얼빠진 젊은이를 아편에 도취된 듯한 공허하고 무의식적인 몽상의 나른함에 빠져들게 한다.
멜빌은 화자 이스마엘의 고백을 통해, 자신이 플라톤 철학을 마음에 새긴 플라톤주의자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모비딕> 바다의 기저에는 현실과 이데아를 나누는 이원론의 플라톤 철학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는 말로 들린다. 일상적 현실의 사물들에 대한 이상적 본질, 초월적 원형이 따로 있다고 보는 플라톤주의는 멜빌 작가의 <모비딕>의 근간 철학일 뿐 아니라, 초월주의자들이 영향을 발휘했던 19세기 초 미국의 시대정신의 근간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바다의 본질 이데아를 꿈꾸는 이 특별한 사색 장소에서 멜빌은 자신을 초월하며 인생과 인간에 관한 통찰 한 자락을 이루어내고야 만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발밑의 신비로운 바다를 인간과 자연 속에 충만해 있는 그 끝없이 깊고 짙푸른 영혼의 가시적 형상으로 오해한다. 그에게서 벗어나 미끄러지듯 달아나는 그 야릇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 형태를 분간할 수는 없지만 위로 솟아오른 희미한 지느러미는 모두 영혼 속을 스쳐 지나감으로써 영혼을 가득 채우는 그 종잡을 수 없는 생각들의 화신처럼 여겨진다. 이렇게 매혹된 기분으로 그대의 영혼은 썰물처럼 왔던 곳으로 돌아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널리 퍼진다... 지금 그대가 누리고 있는 생명이란 부드럽게 흔들리는 배가 나누어준 그 흔들리는 생명뿐이다. 배는 그 생명을 바다에서 빌려 왔고, 바다는 그 생명을 신이 만들어내는 불가사의한 조류에서 빌려왔다.
바다가 영혼이라니! 바다를 영혼의 가시적 형상, 즉 바다의 본질은 영혼이라고 느끼는 작가의 초월적 통찰에 나는 충격을 받고 멍해진다. 바닷속에 사는 생물들이 영혼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이라니! 영혼의 파도가 썰물처럼 왔던 곳으로 돌아간 후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널리 퍼지는 것이라니! 우리네 삶은 잠시 바다 영혼에서 생명을 얻어 떠 있는 배라니! 신과 인간의 영혼과 삶과 죽음을 조류와 바다, 배, 파도로 가시화하고 <모비딕> 스토리를 창조해낸 작가 멜빌의 문학적 역량에 나는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멜빌의 문학적 메타포들이 화려하게 등장한 끝에, 알아들을 수 있을 듯 말 듯한 경고가 이어진다.
하지만 이 잠이 계속되는 동안, 이 꿈이 그대에게 머물러 있는 동안, 그대의 발이나 손을 조금만 움직여보라. 모든 것을 움켜잡았던 손을 슬쩍 놓아보라. 그러면 그대의 정체성이 무서운 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대는 데카르트적 소용돌이 위를 맴돌고 있다. 그리고 이 대낮에, 청명하기 이를 데 없는 날씨 속에서, 그대는 목이 반쯤 졸린 듯한 비명과 함께 그 투명한 공기를 가르며 여름 바다로 떨어져, 다시는 영영 수면 위로 올라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부디 조심하라, 범신론자들이여!
신과 본질적 세계를 인정하지만, 인간의 이성을 우위에 두고, 인간의 이성이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던 철학자 데카르트. 데카르트적인 세계는 모든 것이 자연법칙 역학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 같은 세계다. 그러니 데카르트적 소용돌이 위를 맴돌고 있을 것이라는 경고는, 플라톤주의자가 이데아를 꿈꾸다 눈을 뜨면 데카르트적 역학 법칙의 영향을 받는 현실 속에서 육신의 파괴, 생명의 끝을 경험할 뿐일 거라는 의미가 아닐까. 한 마디로 꿈에 취해 돛대에서 떨어지면, 바닷물에 빠져 죽는다는 경고가 아닐까. 그러니 초월주의자들은 - 19세기 초 미국 사회정신 개혁 운동에 앞장섰던, 멜빌이 범신론자들이라고 부른 사람들 - 조심하라는 것이다. 이상적 관념에 취해서 매몰찬 현실의 우주 법칙을 잃지 않도록 말이다.
내가 생각을 조심하고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으로 충분히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까. 잘 나가다가도 우리는 이도 저도 할 도리가 없는 삶의 한가운데서 딜레마의 뒤통수를 맞곤 한다. 야무지게 배를 관리하고 앞을 살피며 잘 나아가던 고래잡이 선원들도, 바다 한가운데 이르러서야 에이해브 선장의 미친 본심을 알게 되면서, 항해의 목적을 흔드는 딜레마에 뒤통수를 두드려 맞기 시작한다.
밭고랑 같은 깊은 주름살과 움푹 팬 자국이 있는 에이해브의 이마를 보았다면, 거기에서도 훨씬 야릇한, 잠들지 않고 늘 돌아다니는 그의 상념이 남긴 발자국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에이해브는 그렇게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주 돛대와 나침반 가대에서 규칙적으로 방향을 돌릴 때마다 마음속에서는 생각도 같이 돌고 그가 걸으면 생각도 같이 걷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 생각은 그를 완전히 사로잡고 있어서, 겉으로 나타난 모든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내면의 거푸집처럼 보였다... 스터브가 속삭였다. "머릿속에 있는 병아리가 껍데기를 쪼고 있어. 이제 곧 뛰쳐나올 거야."... 모든 선원을 고물 쪽에 집합시키라고 스타벅에게 지시했다... 모든 선원이 모여서 호기심과 불안감이 뒤섞인 얼굴로 선장을 바라보았다..."지금까지 돛대 꼭대기에 올라간 녀석들은 모두 내가 흰 고래에 대해 명령한 것을 들어서 알고 있다. 보라! 여기 스페인 금화가 있다!" 에이해브는 반짝반짝 빛나는 커다란 금화 한 닢을 태양 쪽으로 들어 올렸다..."이마에 주름이 잡혀 있고 아가리가 우그러진 고래를 발견하는 자, 대가리가 희고 오른쪽 꼬리에 구멍이 세 개 뚫린 고래를 발견하는 자, 그 흰 고래를 발견하는 자에게 이 금화를 주겠다!"... 돛대에 금화를 못 박는 선장... "흰 고래, 눈을 크게 뜨고 흰 고래를 찾아라. 하얀 물을 유심히 살펴라. 거품만 보아도 소리쳐라.
길고 깊은 고민 끝에 에이해브 선장은, 큰 값어치가 있는 금화 한 잎을 걸고 특정 흰 고래를 찾을 것을 선원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모비딕> 소설을 읽기 전, 오래전에 저 선장이 돛대에 박은 금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것의 참 의미를 지금에야 깨닫는다. 미친 목적에 동조하도록 선동하기 위한 사탕발림이라는 걸 말이다. 선장이 선원들과 나누는 대화는 흰 고래 '모비딕'의 모습을 점점 드러낸다.
타슈테고가 말했다. "그 흰 고래는 모비 딕이라는 놈과 같은 놈이 분명합니다... 물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꼬리를 좀 묘하게 놀리지 않습니까?"... "물을 내뿜는 것도 유별나죠." 다구가 말했다. "향유고래 치고는 무성한 덤불처럼 넓게 퍼지고, 게다가 굉장히 빠르지 않나요?"... 에이해브가 외쳤다. "그래, 퀴퀘그. 그 녀석 몸뚱이에 박힌 작살들은 모두 마개뽑이처럼 비틀려 있다.. 그 녀석의 물보라는 곡식가리처럼 크고, 해마다 양털을 깎은 뒤 수북이 쌓아놓은 낸터컷 양털처럼 하얗다. 그래, 타슈테고, 녀석은 돌풍에 찢어진 삼각돛처럼 꼬리를 흔들지. 제기랄! 자네들이 본 녀석이 바로 모비 딕이다. 모비 딕. 모비 딕이야." 스타벅은 지금까지 스터브와 플래스크와 함께 놀란 눈으로 선장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선장님, 저도 모비 딕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 선장님 다리를 빼앗아 간 게 혹시 그 녀석 아닌가요?"..."누가 그따위 얘기를 하던가?... 그래 스타벅... 내 돛대를 앗아간 녀석은 바로 모비 딕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의지하고 서 있는 이 죽은 다리를 가져다준 놈도 모비 딕이었다... 나를 파괴하여 영원히 의족에 의지하는 가엾은 신세로 만든 건 바로 그 가증스러운 흰 고래였다!" 그러고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려 헤아릴 수 없는 저주가 담긴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그래! 나는 희망봉을 돌고 혼 곶을 돌고 노르웨이 앞바다의 소용돌이를 돌고 지옥의 불길을 돌아서라도 놈을 추적하겠다. 그놈을 잡기 전에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대륙의 양쪽에서, 지구 곳곳에서 그놈의 흰 고래를 추적하는 것, 그놈이 검은 피를 내뿜고, 지느러미를 맥없이 늘어뜨릴 때까지 추적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항해하는 목적이다. 어떠냐? 나를 도와주겠는가?..." "옳소, 옳소!" 작살잡이들과 선원들은 흥분한 노인에게 달려가면서 외쳤다. "날카로운 눈으로 흰 고래를 찾자. 날카로운 작살로 모비 딕을 찌르자!" "고맙다, 고마워." 선장의 목소리에는 흐느낌과 고함소리가 반씩 섞여 있는 것 같았다. "급사! 가서 술을 잔뜩 가져와라. 그런데 스타벅, 자네는 어째서 그렇게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나? 자네는 흰 고래를 쫓지 않을 텐가? 모비 딕과 싸우지 않을 거야?" "... 저는 고래를 잡으로 왔지, 선장님의 원수를 갚으러 온 것은 아닙니다... 선장님의 복수는 우리 낸터컷 시장에서는 그다지 큰 돈벌이가 되지 못할 겁니다... 말 못 하는 짐승한테 복수라니!... 그 고래는 단지 맹목적인 본능으로 공격했을 뿐인데! 이건 미친 짓이에요! 말 못 하는 짐승에게 원한을 품다니, 천벌을 받게 될 겁니다." "... 그 녀석은 나를 제멋대로 휘두르며 괴롭히고 있어. 나는 녀석한테서 잔인무도한 힘을 보고, 그 힘을 더욱 북돋우는 헤아릴 수 없는 악의를 본다네. 내가 증오하는 건 바로 그 헤아릴 수 없는 존재야. 흰 고래가 앞잡이든 주역이든, 나는 증오를 녀석에게 터뜨릴 거야. 천벌이니 뭐니 하는 말은 하지 말게. 나를 모욕한다면 나는 태양이라도 공격하겠어... 반란이라도 일으키지 않고는 나한테 반대할 수 없을 거야" "하느님이 나를 지켜주시기를! 우리 모두를 지켜주시기를!" 스타벅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에이해브는 일등항해사의 마음을 사로잡아 묵인을 얻어낸 것이 기뻐서 그의 불길한 기도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아, 충고와 경고여! 너희는 왜 오자마자 떠나버리는가? 왜 좀 더 머물지 않는가? 하지만 그림자들이여! 너희는 경고라기보다 예언이다. 외부에서 오는 예언이라기보다 내부에서 미래를 향하는 확신인 것이다. 외부에는 우리를 제약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우리 존재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내적 요구가 여전히 우리를 몰아대기 때문이다... 선장은 선원들을 한 사람씩 찌르는 듯한 눈초리로 살펴보면서 잠시 서 있었다. 선원들도 열띤 눈으로 선장의 눈과 마주쳤다. 초원의 늑대들이 이제 곧 무리의 선두에 서서 들소를 추적할 우두머리의 눈을 핏발 선 눈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아! 늑대 무리는 인디언이 쳐놓은 덫에 빠져들 뿐인 것을... "마셔라! 마시고 맹세하라. 죽음의 보트 뱃머리에 서게 될 자들이여. 모비 딕의 죽음을 위해서 마셔라! 우리가 모비 딕을 죽을 때까지 사냥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우리를 사냥할 것이다!" 작살잡이들은 기다란 작살 술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흰 고래에 대한 저주를 외치면서 단숨에 들이마셨다. 스타벅은 얼굴이 창백해져서 고개를 돌리고 몸을 떨었다.
모비 딕의 특징들과 함께, 에이해브 선장이 모비 딕에게 품고 있는 지독한 원한도 가감 없이 드러나고 있다.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죽여버릴 기세다. 그러한 맹목적인 증오의 열정에 대부분의 선원들은 동조하고 응원한다. 하지만 단 한 사람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스타벅은 선장의 항해 목표가 옳지 않다는 것을 꿰뚫어 본다. 유명한 커피 체인점 <스타벅스>의 의미를 이제야 본다. 몸 쓰기를 아끼지 않고 성실하고 용기 있는 삶을 살아가되, 감정에 휘둘리기보다 냉철한 이성으로 합리적인 판단의 자세를 잃지 않는 사람. 낸터컷 출신의 용맹한 백인 항해사. 미국인의 이상적 정체성이었던 것이다. 그런 스타벅이 고래를 향한 증오로 단결되는 고래잡이들을 보며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선장 에이해브가 그런 스타벅의 심경을 모르지 않는다. 아니, 그런 스타벅이 몹시 신경이 쓰이는 것 같다.
남들을 불타오르게 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남에게 불을 붙이려면 성냥 자체도 파괴되어야 한다! 나는 과감하게 내가 원하는 일을 했다. 앞으로도 나는 내가 원하는 일을 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특히 스타벅이 그렇다. 하지만 나는 악마가 붙은 미치광이다. 나는 미쳐버린 광기다. 그 사나운 광기는 자신을 이해할 때에만 잠잠해진다. 나는 팔다리가 잘릴 거라는 예언을 들었다. 그리고 아아! 나는 다리를 잃었다. 이제 나는 내 다리를 자른 놈의 몸을 잘라버릴 거라고 예언한다. 그렇게 되면 나는 예언자이자 그 실행자가 된다. 그것은 위대한 신들 이상이다. 위대한 신들도 지금까지 그런 적은 없었다. 위대한 신들이여, 나는 당신들을 비웃고 야유한다.
스타벅이 신경 쓰여도 어쩔 수가 없다. 자신의 몸에는 자신도 통제할 수 없는 증오의 광기가 돌고 있고, 그것은 스스로 그 마음을 이해하고 도울 때에만 잠잠해질 수 있는 정신 병증이다. 편집증적 혐오를 실천으로 옮겨야 자신이 숨을 쉴 수 있다. 팔다리가 잘릴 거라는 예언을 들은 후, 다리를 잃은 사람으로서 이젠 더 이상 그 신탁 아래 휘둘리며 살아가고 싶지 않다. 그 신탁을 엎어 버리고, 나 자신이 신을 이기고 신탁을 하는 신에 버금가는 존재가 되고 싶다. 예언을 당하는 존재가 아닌 예언을 하는 존재, 내 팔다리를 자른 놈의 몸통을 잘라버리는 존재가 되고 싶다. 나는 에이해브가 겪은 일을 겪은 적이 있는 사람인가 내 삶의 역사를 되짚어 본다. 내 동료들, 내 배, 내 다리를 잃지는 않았지만, 다른 의미로 나는 내 사람들, 내 배, 내 다리와 같은 것들을 잃어 본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도 원한이 있고, 그 깊숙한 원한이 내 가치관이 되어 내 삶을 끌고 다니는 것을 본다. 내 안에 에이해브와 스타벅의 충돌을 본다.
자신이 믿고 탄 배, 그 배의 선장과 선원들이, 자신이 계획했던 것과 다른 목표를 가지고 있는 상황, 그들 앞에서 그들의 기에 눌려 자신도 암묵적으로 동의를 해버린 상황에서 스타벅의 고민은 깊어진다.
내 영혼은 굴복하여 노예가 되고 말았다. 미치광이한테! 그런 전쟁터에서 제정신을 가진 자가 무기를 버린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다. 하지만 그는 내 마음속 깊이 뚫고 들어와 나의 이성을 몰아내버렸다! 그의 불손한 목적은 뻔히 눈에 보이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그 목적을 이루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 같다. 좋은 싫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나를 그에게 묶어버렸다. 그는 나를 밧줄에 묶어서 끌고 가지만, 나에게는 밧줄을 자를 칼이 없다. 무서운 노인데! 내 위에 누가 있느냐고 그는 외친다. 그렇다. 그는 자기보다 위에 있는 자들에게는 민주주의자지만, 자기보다 밑에 있는 자들에게는 얼마나 위세를 부리며 떵떵거리는가. 오오! 나는 내 초라한 처지를 분명히 본다. 나는 반항하면서 복종하고, 동정하면서 증오한다. 그의 눈 속에서 지독한 비애를 읽기 때문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세월은 한없이 흐르는 것이다. 작은 금붕어가 어항 속을 제 세상인 양 헤엄쳐 다니듯이, 미움받는 고래는 이 세계의 온 바다를 헤엄쳐 다닌다. 하늘을 모독하는 그의 목적을 하느님이 옆으로 밀쳐내 주실 지도 모른다. 내 심장이 납처럼 무겁지만 않다면 들어 올리고 싶다. 하지만 내 시계 전체가 태엽이 풀려서 멎어버렸고, 내 심장은 모든 것을 억누르는 무게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다시 심장을 들어 올릴 열쇠가 없다... 오오, 인생이여! 내가 네 안에 잠재해 있는 공포를 느끼는 것은 지금이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 공포는 내 바깥에 있다. 잔인하고 요사스러운 미래여, 나는 내 안에 아직 존재하는 인간다운 감정으로 너와 싸울 것이다. 오오, 축복받은 힘이여, 내 옆에 서서, 나를 붙잡고, 나를 지켜주소서!
자신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 동조하고 굴복해 버린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으로 스타벅은 절망하고 낙심하고 있다. 하지만, 퀘이커교도인 스타벅은 앞으로의 모든 일이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잘 해결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의 끊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증오가 폭주하는 이교도적인 광기가 판치는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인간다운 - 아마도 신의 섭리를 우선으로 하는 기독교인 다운 - 마음을 잃지 않고 미래를 헤쳐나갈 것이라는 결심도 잊지 않고 있다.
흰 고래를 끝까지 추격해 잡아야만 한다고 에이해브 선장이 주는 부담 앞에서 이등항해사 스터브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 하! 하! 하!... 그 후 줄곧 그 문제를 생각해 보았는데, 그 마지막 귀결이 하, 하! 뿐이구나. 왜냐고? 웃음은 요상한 모든 것에 대해 가장 현명하고 손쉬운 해답이기 대문이지... 한 가지 위안은 항상 남거든. 그 확실한 위안이란 모든 것이 신의 뜻으로 예정되어 있다는 운명론이지... 내가 보기에 그때 스타벅은 요전 날 밤에 내가 느낀 것과 비슷한 기분을 느낀 것 같았어. 스타벅도 그 영감한테 당한 게 분명해... 앞으로 닥쳐올 일을 내가 전부 다 알지는 못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웃어넘기고 말 거야. 너의 무서움 속에 숨어 있는 익살스러운 추파! 야, 신난다. 랄랄라!
스터브는 이 문제를 아예 고민하지 않으려 한다. 그에게 모든 일은 신의 섭리이고, 그러니 내가 다 알 필요도 없고, 그저 웃어버리면 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왜 이렇게 익숙할까. 실은 우리 대부분이 이렇게 현실을 수긍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태어난 것도 내 의지가 아니고, 죽는 것도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닌 삶,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어차피 불확실한 게 확실한 삶을 굳이 파악해 보겠다고 읽고 연구하고 고민하는 것은 의미 없는 헛일 아닌가? 아예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저 마지막 순간까지 즐겁고 행복한 마음만 지키면 되는 거 아닌가? 이것이 인간으로 태어나 조금이라도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기 위해 취한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태도가 아닐까? 근데 이 당연하고 평범한 삶의 자세를 제삼자의 눈으로 보면서 왜 이렇게 서글퍼지는 걸까.
멜빌은 배 앞갑판에서 생활하고 일하는 여러 각국에서 온 다양한 인종 선원들의 다양한 가치관과 문화와 믿음이 담긴 생각과 말과 행동들을 보여주며, 서로를 향한 편견으로 인해 쉽게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해상생활의 위험과 고래라는 주적 앞에서 하나로 뭉칠 수밖에 없는 뱃사람들의 처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한 그들은 함께 노래와 술과 춤과 여자 이야기로 쉽게 하나가 되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드러내고 마지막으로, 화자 이스마엘이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다.
나 이스마엘도 이 배에 타고 있는 선원들 중의 하나였다. 나의 외침도 그들의 외침과 함께 솟아올랐고, 나의 맹세도 그들의 맹세와 함께 뒤섞였다... 나에게는 격렬하고 불가사의한 공감이 있었다. 에이해브의 억누를 수 없는 원한이 내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선원들과 더불어 저 흉악한 괴물을 죽여서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하면서, 그 괴물의 내력을 알고 싶어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에이해브에게 깊이 공감하는 이스마엘. 19세기 미국의 초월주의와 성경 속 하갈의 아들이 본격적으로 연결하고 공감하는 장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어 모비 딕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이어진다.
무리를 떠나 혼자 다니는 흰 고래는 주로 향유고래잡이들이 드나드는 절해의 곳곳에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흰고래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고,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만이 눈으로 보고 확인했을 뿐이며. 실제로 그것이 그 흰고래라는 것을 알고 맞서 싸웠던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유난히 거대하고 흉악한 향유고래가 나타나 공격을 가해 온 인간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는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보고를 가져온 배들도 적지 않았고, 이것을 들은 사람들이 그 고래야말로 모비 딕이 틀림없다고 확신한 것도 무리한 추측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향유고래잡이 어업에서는 포악하고 잔인하고 교활하고 악의에 찬 괴물을 공격한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따라서 상대가 모비 딕인 줄 모르고 우연히 싸움을 건 사냥꾼들은 대부분 모비 딕이 불러일으킨 독특한 공포를 개별적인 원인 탓으로 돌리기보다 향유고래잡이 어업이 본래 안고 있는 위험 탓으로 돌렸다... 흰 고래 이야기를 사전에 듣고 난 뒤 우연히 그 고래를 본 사람들도 처음에는 거의 예외 없이 다른 향유고래를 만났을 때처럼 대담하게 보트를 내려 고래를 추격했다. 하지만 이런 공격은 결국 불행한 재난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피해는... 마침내 목숨을 잃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모비 딕에 대한 그들의 공포는 계속 축적되고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렇게 증폭된 공포심은 결국 흰 고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용감한 고래잡이들의 용기를 약화시키는 데 매우 효과가 있었다... 포경선원들은 모든 선원에게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그 무지와 미신을 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선원 중에서도 특히 고래잡이들은 바다에서 오싹할 만큼 놀라운 것과 가장 직접적으로 접촉할 가능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공상은 더욱 부풀어 올라 터무니없는 소문을 낳게 되는 것이다... 흰 고래에 대한 터무니없는 소문도 넓은 바다를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동안 차츰 늘어나 마지막에는 온갖 병적인 망상과 결합하여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태아를 잉태하게 되고, 그래서 결국은 모비 딕을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공포감으로 둘러싸게 되고 말았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흰 고래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 고래잡이들은 그 위험한 아가리를 향해 도전할 용기를 거의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향유고래가 원래부터 차지해온 지위- 다른 종류의 고래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무섭다는 생각은 고래잡이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향유고래의 유별나게 거대한 모습은, 보트 뱃머리에서 그 고래와 맞서 본 자만이 가장 실감 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향유고래가 사람의 피에 굶주려 있다는 포벨센의 주장을 포함하여 향유고래의 무서움에 관한 미신적인 믿음은... 고래잡이들의 마음에 되살아나곤 했다... 겁을 먹은 고래잡이들은... 설득해서 배에 태우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고... 향유고래 같은 귀신을 쫓아 창을 겨누는 것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라고 항의했다.
고래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은 사람들조차도 흰고래라는 개별적 특성을 가진 존재를 알아채기보다, 향유고래라는 종 전체에 대해 엄청난 공포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향유고래를 사냥할 예정이라고 하면, 꺼리는 사람들이 많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미신과 망상이 부풀린 공포를 이겨내고, 모비 딕의 존재를 더 명확히 보고, 그것을 추격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모비딕을 추격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조금은 있었고, 우연히 그 고래에 대한 이야기를 멀리서 막연히 들었을 뿐 사람들이 당한 재난에 대해서는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을 전혀 모르고 고래를 따라다니는 미신도 전혀 몰랐기 때문에 고래가 싸움을 걸어온다면 달아나지 않을 만큼 용감한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무엇을 알고 덤비는 것과 모르고 덤비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 우리가 무엇을 미리 조사하고 안다고 해서, 그것이 제대로 아는 것이 맞을까. 첫애를 낳기 전에 아기의 발달과정에 대해, 모유수유에 대해 많은 책을 읽고 공부를 했지만, 하나도 들어맞지 않아 크게 낙심했던 기억이 있다. 차라리 내 아이를 잘 관찰하고, 파악하고 잘해 낼 수 있는 힘이 내게 있다는 믿음 한 조각만 잘 준비했어도 어설프게 아는 것보단 훨씬 나았을 것 같다. 어쩌면 고래 사냥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도전에 대해,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전해 듣고 두려움만 잔뜩 껴안고 사는 것보다, 아예 모르고 용기를 내는 것이 나은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비 딕에 대한 소문과 미신적 억측은 너무나 강렬하고 파다하게 퍼져 있어 피해 가기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런 강한 미신들은 입과 입을 통해 재빠르게 날아다니다 아이들의 마음에까지 속속들이 스며드는 법이니까.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마침내 흰 고래와 결부된 터무니없는 억측 가운데 하나는, 모비 딕은 공간을 초월하여 도처에 존재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이었는데, 정반대 되는 위도에서 같은 시각에 모비딕과 실제로 마주쳤다는 것이다.... 모비딕은 공간을 초월하여 도처에 동시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불멸의 존재이고, 옆구리에 창이 숲처럼 박혀도 무사히 헤엄쳐 갈 것이고, 모비 딕이 정말로 진한 피를 내뿜는다 해도 그런 광경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아서,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맑은 파도 속에서 모비 딕이 조금도 피로 더럽혀지지 않은 맑은 물을 내뿜는 광경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미신 속에 살아있는 모비딕은, 신적인 존재에 가깝다. 아마도 모비딕 상을 만들어 놓고 절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모비딕은 동시에 도처에서 나타날 수 있고, 사람을 속일 수도 있는 영악하고 강한 존재로 정신까지 압도하는 힘이 엄청난 존재로 자리 잡았던 것 같다.
모비딕의 실제 모습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모비딕을 다른 향유고래와 구별해주는 것은 보기 드물게 거대한 덩치라기보다,... 눈처럼 새하얗고 주름이 잡혀 있는 이마와 피라미드처럼 높이 솟은 하얀 혹이다... 몸의 다른 부분도 같은 색의 줄무늬와 얼룩점과 대리석 무늬로 덮여 있어서 하얀 수의에 감싸인 것처럼 보였고, 마침내 '흰고래'라는 독특한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 대낮에 황금색으로 반짝이는 젖빛 거품을 은하수처럼 뒤에 남기며 짙푸른 바다를 미끄러져 가는 그 생생한 광경을 볼 때면 누구나 그 이름이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고래가 자연스러운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은 그 보기 드물게 거대한 체구나 현저한 몸빛깔이나 보기 흉하게 변형된 아래턱 때문이라기보다는, 비할 데 없이 교활한 지성과 악의 때문이었는데,... 그의 기만적인 도주 작전은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기뻐 날뛰는 추적자들 앞에서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힌 징후를 드러내며 헤엄치다가 갑자기 방향을 돌려 추적자들을 덮쳐서 보트를 산산조각으로 박살 내거나 깜짝 놀란 선원들이 본선으로 허둥지둥 도망치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고래를 쫓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재난은 흰 고래의 잔인성에서 나온 악마적이고 계획적인 짓으로 보였기 때문에, 흰 고래에게 팔다리나 목숨을 잃은 것이 전적으로 지성이 없는 생물의 짓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한 성깔 하는 영악한 고래에게 처참하게 파괴당하고, 동료를 잃게 된 사람들의 감정은 어떨까. 그 감정은 미칠듯한 분노라고 작가는 설명한다. 폭풍 뒤 하늘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이 다시 평온해지고 햇살이 따스하게 미소 지을 때, 피해자의 참담한 심정은 더욱 분통 터지는 법이라고 한다. 다음은 그 무시무시한 흰 고래에 맞서 싸웠던 에이해브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보트 세 척이 주위에서 박살이 났고, 노와 부하들은 소용돌이에 휘말려 빙빙 돌고 있었다. 선장은 단검을 빼들고 부서진 뱃머리에서 아칸소의 결투자가 상대에게 덤벼들듯 고래에게 덤벼들어, 한 뼘 길이의 칼날로 한 길 깊이에 있는 고래의 생명에 닿으려고 애썼다. 그 선장이 바로 에이해브였다. 낫처럼 생긴 고래의 아래턱이 갑자기 바로 밑을 휙 스치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예초기가 들에서 풀을 베듯 에이해브의 다리를 싹둑 잘라버리고 말았다... 그 결투 이후 에이해브가 그 고래에 대해 격렬한 복수심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복수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에이해브가 광적일 정도로 과민해져서 결국에는 자신의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지적, 정신적인 분노까지도 모두 흰 고래와 결부시켰다는 점이다. 흰 고래는 모든 사악한 존재의 편집광적 화신으로서 에이해브의 눈앞을 끊임없이 헤엄치게 되었다. 깊은 통찰력과 감수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 사악한 존재에게 자기 내부를 갉아 먹혀 급기야는 절반밖에 남지 않은 심장과 허파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느낀다. 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악이야말로 태초부터 존재해왔고, 근대에 들어와서는 기독교도들조차 세상의 절반을 지배하는 존재로 인정했으며, 고대 동방의 배사교 신자들은 악마 상을 만들어 숭배했다. 하지만 에이해브는 그들처럼 무릎을 꿇고 그것을 숭배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밉살스러운 흰 고래에게 모든 악의 근원을 돌려, 미친 듯이 날뛰며 불구의 몸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에 덤벼들었다. 사람을 가장 미치게 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 가라앉은 앙금을 휘젓는 모든 것, 악의를 내포하고 있는 모든 진실, 체력을 떨어뜨리고 뇌를 굳게 하는 모든 것, 생명과 사상에 작용하는 모든 악마성 - 이 모든 악이 미쳐버린 에이해브에게는 모비 딕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고, 그리하여 실제로 공격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다. 에이해브는 아담 이후 지금까지 모든 인류가 느낀 분노와 증오의 총량을 그 고래의 하얀 혹 위에 쌓아 올려, 마치 자기의 가슴이 대포라도 되는 것처럼 마음속에서 뜨거워진 포탄을 그곳에다 겨누고 폭발시켰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에이해브 선장의 분노와 혐오가 생소하지 않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모든 악한 것의 총집합소로 여겨져, 내 내면을 망가뜨려 가면서까지 원한을 불사르는 어떤 대상이 있다. 에이해브는 실제 많은 피해를 입었고, 자신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흰 고래는, 이제 그의 정신 속에서 끊임없이 헤엄치고 다니며 그의 정신을 갉아먹는 가해를 저지른다. 마침내 에이해브는 분노로 가슴이 터지고 미쳐버렸다.
그의 찢긴 몸에서 나온 피는 영혼으로 흘러 들어갔고, 깊은 상처를 입은 영혼에서 나온 피는 그의 육신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렇게 섞인 피가 에이해브를 미치게 했다... 고래와 대결한 뒤 귀항하던 도중... 에이해브가 간헐적으로 광란 상태에 빠져 미치광이처럼 사납게 날뛴 사실... 평온한 열대 바다를 가로질렀다. 노인의 광기는 어디로 보나 혼 곶의 파도와 함께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창백하긴 했지만 단호하고 태연한 표정으로 다시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고, 그래서 항해사들은 마침내 무서운 광기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여 신에게 감사까지 드렸다... 인간의 광기란 참으로 교활하고 음흉할 때가 많다. 겉보기에는 광기가 사라진 것 같지만 사실은 훨씬 포착하기 어려운 형태로 변형되어 버린 것에 불과할 때도 있는 것이다. 에이해브의 광기는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심해지고 깊어졌다... 좁게 흐르는 편집증의 물줄기 속에 그의 넓은 광기가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듯이, 그 넓은 광기 속에는 그의 타고난 지성이 하나도 죽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까지 제정신으로 합리적인 목표에 쏟아부었던 것보다 수천 배나 더 많은 잠재력을 그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게 되었다... 에이해브는 마음속으로 이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내 수단은 모두 건전하지만, 내 동기와 목적은 미쳤다는 것. 하지만 이 사실을 없애거나 바꾸거나 회피할 힘은 없다... 분노의 비밀에 빗장을 걸고 열쇠로 잠근 채, 흰 고래 사냥을 유일무이한 목적으로 삼아 이 항해에 나선 것은 확실하다. 육지에서 그를 알던 사람이 당시 그의 마음속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를 조금이라도 눈치챘다면, 고결한 영혼을 가진 그들은 대경실색하여 그런 악마 같은 사람의 손에서 당장 배를 빼앗았을 것이다!
배의 진로를 결정하는 가장 권위 있는 자가 맹목적인 한 가지 목표에 집요하게 미쳐있는 상황이다. 마치, 미국 경제의 상징인 쌍둥이 빌딩에 비행기를 뺏어 무작정 달려들던 광신도를 볼 때의 미친 위기감이 몰려오고, 저 미친 선장이 모두가 타고 있는 배의 키를 쥐고 있다는 사실에 오금이 저려오기 시작한다.
신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백발노인, 증오심에 가득 차서 욥의 고래를 찾아 세상을 돌아다니는 노인이 있었고, 그의 부하 선원들은 주로 더러운 배반자와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 그리고 식인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스타벅은 미덕과 상식을 가졌으나 동조자가 없어서 별 영향력이 없었고, 스터브는 태평한 성품이어서 매사에 무관심했으며, 플래스크는 모든 면에서 평범한 위인이어서, 이들 중에는 정신적인 지주가 될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런 항해사들의 지휘를 받는 선원들은 처음부터 에이해브의 편집광적 복수를 돕게 하려는 목적에서 어떤 악마적 운명에 의해 특별히 차출된 일당인 것 같았다.
배에 제대로 판단하는 사람이 없다. 맑은 정신으로 기준이 되고 의지가 될 만한 리더가 없다. 이런 집단 위에 미치광이가 군림할 때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함께 물에 빠져들어갈 수밖에 없다. 멜빌은 에이해브가 아닌 다른 선원들에게 흰 고래는 어떤 의미였을까 기술하기 시작한다.
흰고래는 도대체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그들의 무의식적인 인식 속에서 흰 고래는 인생의 바다를 헤엄치는 거대한 악마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흰 고래를 막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거기에 대해 전혀 의문을 품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의식 속에 뿌연 안개처럼 자리 잡은 흰 고래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문제였다. 어떤 대상을 막연하게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있다면, 그 대상을 집요하게 미워하는 편집광이 리더로 나타나 날뛸 때, 그 집단 전체가 어이없는 목표를 세우고 미쳐 돌진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나는 항상 세계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이 어떻게 그렇게 나치 집단이 되었을까가 궁금했고, 어떻게 KKK 같은 인종차별 집단이 형성될 수 있을까 궁금했었는데, 그 궁금증이 여기서 풀리는 듯하다. 서서히 사람들에게 혐오의 기운을 조장하고, 그 혐오 위에 군림하려는 힘을 갈구하는 자들은 지금 이 현대 사회의 현실에도 넘친다.
그런 집단적 광기에 내 영혼이 끌려가지 않으려면, 내 안에 스며드는 막연한 두려움, 공포의 안개를 걷어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막연한 감정 입자들이 혐오와 선입견과 편견의 결정체를 형성할 수 없도록, 내 마음을 자주 청소해내고 맑은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기술이 필요하다.
*참고 자료: 허먼 멜빌의 <모비딕> (작가정신, 김석희 역) 35 - 4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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