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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악마와 싸우기 위한 준비

[독서 기록 에세이] 허먼 멜빌과 떠나는 모비딕 항해

by 하트온

<모비딕> 42 장의 주제는 흰색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흰색에 투영된 관념들 전통적 의미들, 그 안에서 작가가 포착한 근원적 감정에 대한 이야기다. 이스마엘은 모비 딕이 다른 고래들보다 더 공포스럽고 미스터리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흰색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모비 딕에게는 이따금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두드러진 특징이 몇 가지 있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막연한 공포가 존재했는데, 이 공포는 이따금 그 강렬함으로 나머지 특징을 완전히 압도해버리곤 했다... 무엇보다도 나를 몸서리치게 한 것은 고래의 색깔이 희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흰색이 대놓고 공포감만 조성하는 것은 아니다. 흰색이 오랫동안 다양한 민족에게 고귀한 이미지로 인식되었으며, 왕, 왕실, 황제를 나타내는 상징적 색으로 널리 사용되어왔다는 것과, 흰 피부를 가진 백인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인종으로 자리매김해왔다는 사실도 추가로 설명하고 있다.


자연계의 수많은 물체에서 흰색은 대리석이나 동백나무나 진주의 경우처럼 자신의 특별한 장점을 남에게 나누어주어 그 아름다움을 더욱 세련되고 우아하게 높여준다. 그리고 다양한 민족이 이 색깔에서 어떤 고귀한 자질을 인정했다. 저 옛날 오랑캐 나라 페구의 위대한 왕들도 그들의 지배를 형용하는 온갖 수식어 가운데 '흰 코끼리의 주인'이라는 칭호를... 근대 시암의 왕들은 왕실 깃발에 눈처럼 하얀 코끼리를... 하노버 왕가의 깃발에는 눈처럼 하얀 군마가 그려져 있고, 로마 제국을 계승한 오스트리아 제국도 이 고귀한 색을 황제의 색으로... 흰색의 존귀함은 인류 자체에도 적용되어 백색 인종은 이상적인 인간으로서 다른 모든 유색 인종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멜빌의 '백색 인종이 이상적 인간으로서 모든 유색 인종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는 흔들림 없이 단호한 결론에서, 19세기 초중반의 백인들이 느꼈던 인종적 우월의식 - 작가의 개인적 주장이 아닌 보편적 사회 문화 현상으로서의 - 이 짙게 묻어난다. 또한 흰색이 긍정적인 여러 숭고한 감정과 미덕을 상징한다는 것도 이어서 언급하고 있다.


흰색은 기쁨도 의미... 로마인들은 축제일을 하얀 돌로 나타냈기 때문... 흰색은 인간의 동정심이나 그 밖의 감동적이고 고결한 것 - 신부의 순결, 노인의 인자함 - 을 상징하는 데에도 쓰이게 되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 사이에서는 하얀 조가비를 엮어 만든 허리띠를 주는 것이 최대의 명예를 부여하는 것을 의미했고, 많은 나라에서 판사가 걸치는 담비 모피의 흰색은 정의의 위엄을 상징하고, 왕과 왕비가 백마가 끄는 마차를 타는 것은 일상의 위엄... 종교의식에서도 흰색은 신의 무구함과 권위의 상징... 불을 숭배하는 페르시아의 배화교도들은 두 갈래로 갈라진 하얀 불꽃을 제단 위에서 가장 신성한 것으로... 그리스 신화에서 최고신 제우스는 눈처럼 하얀 황소로 변신... 이로쿼이족 인디언에게는 한겨울에 흰 개를 바치는 것이 가장 성스러운 제사... 기독교 성직자들은 검은 사제복 안에 '앨브'나 '튜니클'을 입는데, 이 명칭은 흰색을 뜻하는 라틴어...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흰색은 주님의 수난을 찬양할 때 특별히 사용... 성 요한의 환상 속에서 흰 옷은 구원받은 자들에게 주어지고, 흰 옷을 입은 24명의 장로는 흰색의 거대한 옥좌 앞에 서고, 그 옥좌에 앉아 있는 신은 양털처럼 하얗다.


이렇게 흰색이 아름답고 고귀하고 성스럽고 명예로운 상징이라 해도, 멜빌은 여전히 흰색이 공포스럽다고 말한다.


... 이 흰색의 가장 깊숙한 개념 속에는 좀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숨어 있어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붉은 핏빛보다 더 많은 공포를 우리 영혼에 불러일으킨다... 기분 좋은 연상에서 분리되어 본질적으로 무서운 것과 결합했을 때, 흰색을 생각만 해도 그 공포가 극한까지 높아지는 것은 바로 이 포착하기 어려운 성질 때문이다. 북극의 흰곰과 열대지방의 백상아리... 신천옹... 하얀 유령... 초자연적인 경이와 창백한 공포를 자아내는... 미국 서부 개척사와 인디언 전설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대초원의 백마' 이야기... 이 백마는 용감한 인디언에게 항상 전율할 만한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백마에게 그런 신성함을 부여한 것이 주로 그 초자연적인 하얀 색깔이었던 것... 이 신성함은 숭배를 받지만, 그와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공포도 자아냈다.


흰색으로 내세우는 신성함 혹은 고결함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흰색이 주는 무시무시한 공포감이 아닌가 작가는 꼬집고 싶어 하는 듯하다. 실은 우아하고 고귀해 보이는 색 뒷면에 끔찍한 공포감이 조성되어 있는 건 아닌지 작가가 들추어 따지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그는 이 공포감에서 다 나아가 우리 안에 잠재된 흰색이 불러일으키는 혐오감을 정성껏 끄집어 올린다.


백색증에 걸린 사람이 유난히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보는 사람의 눈에 충격을 주어 때로는 일가친척들까지도 그를 싫어하게 만드는 까닭... 긴 장갑을 낀 남양의 요괴는 눈처럼 하얗다... 인간의 악의를 표출... 젠트 (벨기에의 도시)의 '백두건당'이 시장에서 집행관을 살해할 때 그 당파의 상징인 하얀 두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람의 시체에서... 보는 사람을 가장 오싹하게 만드는 것은 송장에 떠 있는 대리석처럼 창백한 색... 미신에서도 우리는 유령에게 눈처럼 새하얀 망토를 입히며, 모든 유령은 젖빛 안갯속에서 나타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 의해 묘사된 공포의 왕도 하얀 말을 타고 있다... 흰색으로 고결하거나 우아한 것을 상징하지만, 흰색이 가장 심오한 관념적 의미를 짊어질 때는 인간의 영혼에 특별한 요괴를 불러낸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작가는 흰색을 꿰뚫어 보려는 시도를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욱 거침없이 이어간다. 흰색이 좋은 의미로 포장되었을 뿐, 흰색의 본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고발하고 싶은 작가의 분노가 서려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흰색으로 위엄과 권위를 잡고 있는 모든 것 - 기독교의 신성함, 백인 우월주의, 왕족의 고결함,.. - 에 칼날을 겨누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은 죽음의 색이 불러오는 공포감의 기운으로 순진한 사람들을 노예로 삼으려는 집단 최면일 뿐이라고.


우리 눈에 보이는 이 세계의 다양한 측면은 사랑 속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은 두려움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이 '흰색'의 마법을 풀지 못했고, 왜 흰색이 인간의 영혼에 그처럼 강력한 호소력을 갖는 것인지도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흰색이란 영적인 것의 가장 의미심장한 상징, 아니 기독교 신이 쓰고 있는 베일 그 자체인 동시에, 인류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에 내재하면서 그것의 속성을 더욱 강화하는 요소라는 점이다. 하얀 은하수의 심연을 쳐다보고 있을 때, 우주의 무정한 공허함과 광막함을 넌지시 보여주어 무서운 절멸감으로 우리의 등을 찌르는 것은 그 색깔의 막연한 불확정성이 아닐까? 흰색은 본질적으로 색깔이라기보다 눈에 보이는 색깔이 없는 상태인 동시에 모든 색깔이 응집된 상태가 아닐까? 넓은 설경이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지만 그렇게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까? 무색이면서도 모든 색깔이 함축된 무신론 같아서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는 것일까? 자연철학자, 즉 물리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이 지상의 모든 색채, 감미롭고 장엄한 모든 광채, 이를테면 해질녘의 하늘과 숲의 감미로운 색깔이나 금박 올린 벨벳 같은 나비의 날개, 소녀들의 나비 같은 뺨, 이 모든 것은 교묘한 속임수일 뿐이어서 그 물질에 실제로 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래서 신격화된 '자연'은 매춘부처럼 진한 화장으로 우리를 매혹하지만, 그 매력은 속에 있는 납골당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눈과 얼음에 덮인 라플란드를 여행하면서 색안경을 쓰기를 거부하는 고집쟁이 여행자처럼, 저주받을 이단자는 주위의 모든 경치를 뒤덮고 있는 그 엄청나게 큰 하얀 수의 앞에서 장님처럼 멍해질 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상징이 바로 흰 고래인 것이다.


소설 <모비딕>의 세계 안에서, 바다의 본질은 영혼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흰색 공포 모비딕은 인간의 영혼 속에 잠재하고 있는 모든 색의 악의 근원, 모든 나쁜 것의 집합체 같다. 모든 빛이 모여 흰 빛이 되는 것처럼, 모든 악이 모여 흰 악으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 흰색은 공포를 부르는 악의 색이고, 때때로 흰색이 숭고하고 고결하게 보이는 것은 사람을 패망으로 이끄는 악을 숨기는 착시, 교묘한 속임수 같은 것. 그러니, 이스마엘은 흰색의 가면을 쓰는 모든 것을 좋게 보지 않는다. 그 모든 나쁜 것의 상징이 흰 고래 모비 딕이라고, 이스마엘은 흰색에 대한 혐오를 당당히 밝히고 있다. 이스마엘은 그러니까 모비 딕을 잡겠다는 뜨거운 열정에 불타고 있는 에이해브를 목숨 바쳐 도울 예정인 것이다. 기독교 사회 변방에 살며, 모든 것을 보고 세상에 대한 통찰을 얻은 이 이방인은, 개인을 고통스럽게 하고 압제하는 뉴잉글랜드 청교도 세상을 개혁하고 싶은 초월주의자를 돕겠다는 것이다.


이스마엘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인 걸까. 그는 퀴퀘그와 함께 보트 밧줄로 쓸 '밧줄 거적'을 짜며 인생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드러낸다.


내가 손을 북으로 이용하여 기다란 날실 사이로 씨실을 넣었다 뺐다 하면, 퀴퀘그는 옆에 서서 연신 묵직한 떡갈나무 막대기를 실 사이로 집어넣으며... 이것은 '시간을 짜는 베틀'이고, 나 자신은 운명의 실을 기계적으로 짜고 있는 북처럼 여겨졌다. 여기에는 고정된 날실이 있어 단조롭게 왔다 갔다 하는 변함없는 움직임만 반복할 뿐이었고, 그나마도 씨실과 얽히는 것을 허용할 정도로만 움직이고 있었다. 이 날실은 필연으로 여겨졌다. 나는 여기에서 내 북을 손으로 부지런히 놀려서 이 불변의 실 속에 나 자신의 운명을 짜 넣는다고 생각했다. 한편 퀴퀘그가 충동적으로 무심하게 움직이는 막대기는 씨실을 때로는 비스듬히, 때로는 비뚤어지게,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때리고 있다... 이 야만인의 막대기는 그렇게 날실과 씨실의 마지막 형태를 만들어간다. 이 느긋하고 무심한 막대기는 우연인 것이다 - 아아, 우연과 자유의지 그리고 필연 - 그것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 그것들은 모두 뒤섞여 함께 일한다. 궁극적인 진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필연의 곧은 날실 - 왔다 갔다 하는 모든 진동은 사실 거기에 이바지하고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도 역시 주어진 실 사이에서 자신의 북을 자유롭게 놀리고 있다. 우연은 한편으로는 필연이라는 직선 안에서 움직여야 한다는 제한을 받고 측면에서는 자유의지가 그 움직임을 한정하지만, 그래서 필연과 자유의지의 지시를 받지만, 우연도 그 두 가지를 번갈아 지배하면서 사건의 최종 형태를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스마엘이 말하는 삶을 이루는 세 가지 요소는 필연과 자유의지, 그리고 우연이다. 규칙적인 필연의 틀이 있고, 자유의지는 필연의 주어진 실 사이에서 자유롭게 움직인다. 우연은 필연과 자유의지로부터 제한을 받고, 또 역으로 제한을 하며 삶의 모양에 영향을 크게 미친다. 그 모든 것이 함께 서로의 눈치를 잘 보며 협력할 때, 인생이라는 거적을 쓸모 있게 짜 낼 수 있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


그렇게 거적을 짜고 있을 때, 돛대 위에서 망을 보던 타슈테고가 고래가 물을 뿜는 게 보인다고 소리친다. 선원들은 모두 보트를 내려 고래를 추적할 준비를 하는데, 에이해브 선장이 처음 보는 다섯 명의 낯선 선원들을 데리고 나타나 보트를 내리고 고래 사냥을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이 낯선 이교도 선원들의 모습을 실감 나게 그리며 그 시대에 만연했던 타인종에 대한 편견을 있었던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교도 선원이 터번을 두르고 있다는 말에서 중동지방의 이슬람교도이거나, 인도의 힌두교도 혹은 시크교도라고 짐작된다. 마닐라 원주민 같은 누런 피부색이라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인도계였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청교도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의 르네상스 사회정신 개혁 운동에 앞장섰던, 뉴잉글랜드의 초월주의자들이, 페르시안 경전과 힌두 불교 경전, 중국 철학을 공부하며 문화 관념의 각성과 성장을 도모했던 것을, 에이해브가 몰래 고용하여 갑자기 선보인 이 다섯 명의 이교도 선원들이 상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유령처럼 보이는 그들은 저쪽 갑판을 활기차게 돌아다니며 소리도 없이 재빠르게 거기에 매달려 있는 보트의 도르래와 밧줄을 풀고 있었다. 이 보트는 우현 후미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선장용 보트라고 불리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예비 보트로 생각했다. 지금 그 예비 보트의 뱃머리에는 키가 크고 거무튀튀한 사나이가 서 있었다. 그는 강철 같은 입술 사이로 하얀 뻐드렁니 하나가 불쾌하게 삐죽 튀어나와 있고, 검은색 무명으로 지은 구겨진 중국식 상의와 같은 색깔의 헐렁한 바지를 상복처럼 입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커먼 모습 위에 기묘하게 얹혀 있는 것은 하얗게 반짝이는 주름진 터번, 아니 쫑쫑 땋아서 머리 위에 똘똘 감아 놓은 살아 있는 머리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사내보다는 덜 거무스름하고, 마닐라 원주민 특유의 호랑이 같은 누런 피부색이었다. 그들은 교활하고 극악무도한 짓으로 악명 높은 인종이었고, 정직한 백인 선원들 중에는 그들이 악마에게 고용되어 악마의 바다에서 스파이와 비밀정보원으로 일하고 그들의 주인인 악마는 어딘가 다른 곳에 본부를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고래를 추격할 준비를 서두르라는 에이해브의 명령으로, 선원들 누구도 이 불청객들에 대해 더 이상 관심을 줄 여유가 없다. 모두 보트를 바다에 내리고. 온 힘 다해 노를 저어 고래가 나타났다는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다. 드디어 고래 떼가 있는 현장에 도달했다.


주위의 공기가 마치 빨갛게 달아오른 철판 위의 공기처럼 갑자기 진동하고 들먹거렸다. 이 대기의 파동과 소용돌이 아래,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수면 바로 아래에서 고래 떼가 헤엄쳐 가고 있었다. 그들이 뿜어대는 수증기는 다른 여러 가지 현상보다 먼저 드러나는 징후로서 선발대나 별동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제 네 척의 보트는 물과 공기가 거칠게 요동치고 있는 그 한 점을 맹렬히 추격했다. 하지만 그 한 점은 보트 네 척을 쉽게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내의 품을 떠나 첫 전투의 열기 속에 뛰어든 신병도, 저세상에서 처음으로 미지의 유령을 만난 사자의 영혼도, 쫓기는 향유고래가 만들어낸 그 거품 이는 파도 속으로 난생처음 노를 저어 들어가고 있는 사나이만큼 강렬하고 야릇한 감정을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이상하고 비현실적인 생생한 경험이란 말인가! 상상조차 되지 않으면서, 너무 실감 나게 상상할 수 있게 해 주는 소설 덕분에 공포감과 어우러진 짜릿한 흥분감에 몸서리가 쳐진다.


이스마엘이 탄 보트가 고래에 부딪쳐 돛은 쓰러져 산산조각이 나고 그 배에 타고 있던 선원들은 모두 바다에 내던져졌다. 이 모든 용기와 열정이 머쓱하고 허탈하게도 고래는 모두 도망쳐 버렸다. 선원들은 모두 무사하게 다시 보트에 올라 안정을 되찾았지만, 이번엔 질풍이 불러일으킨 거센 파도를 맞아, 보트는 물에 점점 잠기기 시작한다. 본선도, 다른 동료들의 보트도 찾을 수 없는 채로 미궁의 밤이 깊어져 버렸다. 다행히 그 주변을 본선이 계속 맴돌고 있었고, 마침내 이스마엘을 포함한 한 배에 탔던 모두가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다. 그 순간 들었던 격해진 감정과 자신이 이 항해를 시작했던 초심을 어떻게 조화시켜 감정을 다스렸는지에 대해 이스마엘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인생이라고 부르는 이 기묘하고 복잡한 사태에는 우주 전체가 어마어마한 규모의 장난이나 농담으로 여겨지는 야릇한 순간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인간은 그 농담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 농담이 다름 아닌 자신을 웃음거리로 삼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다. 그래도 그는 전혀 의기소침하지 않고, 논쟁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는 모든 사건, 모든 신조와 믿음과 신념, 눈으로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는 온갖 어려운 일들이 아무리 울퉁불퉁한 혹투성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꿀꺽 삼켜버리는 것과 같다... 사소한 고생과 걱정, 돌발적인 재난의 예상, 목숨이나 팔다리를 잃을 위험만이 아니라 죽음 자체도 그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익살꾼에게 장난스럽게 얻어맞았거나 옆구리를 기분 좋게 쥐어박힌 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말하고 있는 그 기묘한 변덕은 사람이 극도의 시련을 겪고 있는 순간에만 찾아 온다. 그 사람이 가장 진지한 순간에만 찾아오기 때문에, 조금 전만 하더라도 가장 중대한 일처럼 여겨지던 것이 지금은 통상적인 농담의 일부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이 자유롭고 편안한 악당 철학을 낳기에 가장 알맞은 것은 바로 고래잡이의 위험이다. 따라서 나도 그 철학을 가지고 '피쿼드'호의 항해 전체와 그 목표인 거대한 흰고래를 지켜보았다.

그는 중대한 일, 죽을 뻔했던 심각한 일도, 꿀꺽 삼켜버리고 장난으로 쥐어박힌 일 정도로 넘기는 '악당 철학'을 고수하려 한다. 처음으로 고래를 쫒다 당해본 죽음의 입구를 맛 본 경험 후, 이스마엘은 퀴퀘그와 항해사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듣고 결론을 내린다.


... 동료들이 마지막으로 나를 갑판에 끌어올렸을 때... 퀴퀘그에게 물었다. "퀴퀘그,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나?" 물론 퀴퀘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물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별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주 일어난다고 대답했다..."스터브 씨, 언젠가 당신이 우리 일등항해사인 스타벅씨만큼 세심하고 신중한 고래잡이는 만나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짙은 안개와 질풍 속에서 돛을 펴고 돌진하다가 달아나는 고래와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이 고래잡이로서 더없이 신중한 짓인가요?" "물론이지..."(스터브의 대답) "플래스크씨, 당신은 이 방면에 경험이 풍부하지만 나는 풋내기니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포경업에서는 죽음이 입을 벌린 곳을 향해, 죽음에 등을 돌린 채 등뼈가 부러지도록 노를 저어가는 게 철칙인가요?" "그래, 그게 철칙이야. 하지만 나는 부하들이 고래를 향해 정면으로 나아가는 걸 보고 싶어. 하하! 그러면 고래가 실눈을 뜨고 선원들과 마주 보게 되겠지. 생각해봐!"(플래스크의 대답)


고래잡이들 중 가장 합리적이고 신중하다고 소문난 스타벅이 고래를 추격하는 모습을 보고, 이스마엘은 혼란에 빠진 듯하다. 이게 정상이냐고, 그렇게 무모하게 목숨 걸고 돌진하는 것이 철칙이냐고, 이런 일이 흔하냐고 퀴퀘그와 이등 항해사, 삼등 항해사에게 차례로 물어보고 그는 그렇다는 대답을 듣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만의 유언 의식을 치르기로, 죽음을 각오해 버리기로 마음먹는다.


이리하여 나는 세 명의 공정한 증인으로부터 사건 전모에 대해 자세한 진술을 들었다. 따라서 바다에서 질풍을 만나 배가 뒤집히고 그 결과 깊은 바다에서 노숙하는 일은 이런 생활에서는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 고래에게 다가가는 중대한 순간에는 보트를 조종하는 사람의 손에 목숨을 맡겨야 한다는 것, 보트를 조종하는 사람은 바로 그 순간 너무 흥분한 나머지 보트에 구멍이 뚫릴 만큼 미친듯이 발을 구르는 충동적인 사람인 경우가 많다는 것, 우리 보트에 그런 재난이 일어난 것은 주로 스타벅이 질풍을 무릎쓰고 고래에게 돌진한 탓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은 포경업계에서 신중한 인물로 유명하다는 것, 나는 이 신중하기로 이름난 스타벅의 보트에 속해 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흰 고래를 추격하는 일에 말려들고 말았다는 것 -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생각해본 나는 당장 아래로 내려가서 유언장 초안이라도 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알고 보니 스타벅은 그 누구보다 용맹한 고래잡이였고, 고래를 만났을 때 조금의 주저도 없이 질풍에 맞서 돌진하는 사람이다. 대형 커피 체인점 <스타벅스>의 의미가 내 머릿속에서 또 조금 변형되고 있다. 그런 정신으로 커피의 맛을 지켜 고객을 만족시키겠다는 건가? 스타벅스 커피는 향유고래의 기름이 현실화된 것인가? 내 터무니없는 의식의 흐름이 더 나래를 펴기 전에 다시 <모비딕>의 세계 속으로, 이스마엘의 내면으로 되돌아 가자. 그는 유언장을 쓰고서 기분이 무척 시원해지는 듯하다.


내가 선원 생활을 시작한 이래 이것과 똑같은 일을 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였다. 이번에도 그 의식이 끝나자 나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고, 가슴에 얹혀 있던 돌멩이가 굴러 나간 듯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앞으로 내가 살 나날은 나사로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기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인물)가 부활한 뒤 살았던 나날만큼이나 즐거울 것이다. 앞으로 몇 달이나 몇 주를 항해하게 될지 모르지만, 그 나날들은 완전히 덤으로 얻은 나날이 될 것이다. 나는 이제 살아남은 셈이다. 나의 죽음과 매장은 내 가슴속에 깊이 간직되었다... 자, 이제 - 하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작업복 소매를 걷어 올리며 생각했다 - 냉정하고 침착하게 죽음과 파멸의 구렁 속으로 뛰어드는 거야. 누구든 올 테면 와봐라.


이것으로 삶은 충분했다고 마무리 의식을 치르고, 이스마엘에게 남아 있는 나머지 날들은 하루하루가 그저 덤으로 얻은 여분의 시간이 되었다. 그는 즐거운 모험으로 나머지 날들을 대담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이 '거듭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죽었기 때문에, 다시 살아난 이후의 삶은 그저 선물로 얻은 기쁨의 연속이 되는 것. 그것에 지금까지의 나를 죽이고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의미가 있다. 이스마엘처럼 유언장을 써버리면 어떨까. 삶에 대한 질척이는 미련, 불안 두려움을 죄다 내면의 땅 속에 묻어버리면 어떨까. 남은 날들을 매일 새로운 선물을 과감히 풀어보듯 기쁘게 담대하게 살아가면 어떨까.




*참고 자료: 허먼 멜빌의 <모비딕> (작가정신, 김석희 역) 42 - 50장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by furu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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