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기록 에세이] 허먼 멜빌과 떠나는 모비딕 항해
한참의 시간이 흘렀고. 배는 서아프리카 세네갈 해역까지 이르렀다. 고요한 달밤 고래가 내뿜는 물거품을 본 순간을 멜빌은 다음과 같이 꿈결인 듯 환상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느 고요한 달밤, 파도는 은빛 두루마리처럼 넘실거리고 수면을 가득 뒤덮은 물거품은 고독이 아니라 은빛 침묵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고요한 밤, 뱃머리의 하얀 물거품 앞에 고래가 내뿜는 은빛 물줄기가 보였다. 달빛에 빛나는 그 물줄기는 천상의 것처럼 신성해 보였다. 깃털로 화려하게 장식한 신이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듯했다.
포경선을 타는 일은 극한 생계 노동이면서 동시에, 바다의 신비 가득한 장엄한 순간들의 연속이다. 잡으면 큰돈이 되는 고래는 인간의 탐욕을 부르는 '먹이' 이면서, 동시에 바다에서 '신'이 솟아오르는 것 같은 성스럽고 숭고한 기운을 발산한다. 그래서 고래를 잡아 죽이려는 자신들의 의도와 행동이 혹시 신을 모독하고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든다. 바다에서 위험에 처할 때마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할 때마다, 금단의 영역을 침범하여 벌을 받는 건 아닌지 영혼 깊숙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공포감으로 이 용감한 선원들이 미신에 빠진 겁쟁이가 되어버리곤 한다.
영혼이야 공포감에 찌들어 있건 말건, 막상 고래가 나타나는 순간에는 몸이 참지 못한다. 어두 컴컴한 밤임에도 고래가 나타났다는 외침에, 선원들은 흥분하여 보트를 내려 고래를 쫓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선장도 갑판 위로 올라와 돛을 펴라고 명령을 한다. 다음 순간 배에서 느껴지는 상충하는 두 가지 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고물 난간 쪽에서 불어와 많은 돛을 부풀리는 미풍은 배를 들어 올리는 묘한 성향을 갖고 있어서, 공중에 떠 있는 갑판이 발밑에서 공기처럼 느껴졌다. 그동안에도 배는 여전히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힘, 즉 하늘로 곧장 올라가는 힘과 수평선상의 목표를 향해 좌우로 흔들리면서 돌진하는 힘이 배 안에서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밤 에이해브의 표정을 관찰했다면 그의 내면에서도 그렇게 상반되는 두 가지 힘이 서로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성한 다리는 갑판 위에 활기찬 메아리를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죽은 다리는 갑판을 디딜 때마다 관을 탕탕 두드리는 듯한 소리를 냈다. 이 노인의 삶과 죽음 위를 걷고 있었다.
배를 움직이는 두 가지 힘을 작가는 에이해브의 내면 싸움으로, 원한을 품고 모비딕을 쫓는 자가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고 있는 삶과 죽음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선장의 성한 다리와 다리를 잃고 다리 대신 의지하는 고래 뼈가 함께 움직이며 내는 소리를 삶의 소리와 죽음의 소리가 교차하는 것에 비유하는 멜빌 작가. 생각해보면, 성한 다리는 진짜 살아있는 생명이 맞고, 다른 쪽 다리에 있는 고래의 뼈는 죽은 존재가 맞다는 것이 상기되면서 작가의 표현에 소름 돋는 전율을 느낀다. 이렇게 한쪽 다리를 고래의 죽음에 의지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다리를 그렇게 만든 아직 살아있는 고래에 대한 원한을 잊지 못하는 에이해브는 삶과 죽음을 동시에 밟고 서있는 두 극단의 경계선에 선 존재가 분명하다.
그날 밤 고래를 쫓아 돛을 올리고 속도를 내 보았으나, 결국 고래가 만드는 은빛 물줄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그 후로도 며칠 동안 쭉 아무도 고래의 흔적을 보지 못했다. 며칠 뒤 한밤 중에 또 고래 물줄기가 보였지만, 배가 돛을 올리자마자 물줄기는 전처럼 사라져 버렸다. 내 눈앞에 거대한 신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느낄 수밖에 없는, 생사의 갈림길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포경선 선원들은, 이렇게 약 올리듯 나타났다 숨어버리곤 하는 고래의 행동에 또 영혼이 덜덜 떨려온다. 그들이 느끼는 극한의 공포는 그들의 마음을 더욱더 결국은 고래에게 물어뜯겨 죽게 될 거라는 미신, 스스로에게 거는 저주의 올가미에 단단히 걸려들고 만다.
그렇게 밤마다 고래에게 농락당하고 나자 선원들도 나중에는 아무도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저 경탄만 할 뿐이었다. 때로는 밝은 달빛이나 별빛 아래에서 신비롭게 물을 뿜기도 하고, 때로는 온종일 또는 이틀이나 사흘 동안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그러다가 다시 우리 배 앞에 나타날 때마다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는 것 같아서, 그 외로운 물줄기는 영원히 우리를 유혹하는 듯했다.
선원들 사이에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미신과 '피쿼드'호에 따라다니는 초자연적인 불가사의함 때문인지, 언제 어디서 물줄기를 발견해도, 물줄기를 발견한 시간과 장소 사이에 아무리 먼 간격이 있다 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저 물줄기는 언제나 같은 고래가 내뿜고 있는 물줄기고 그 고래는 다름 아닌 모비 딕이라고 단정 짓는 선원이 적지 않았다.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그 유령이 주는 독특한 공포감이 한동안 선원들을 지배했다. 저 괴물은 음흉한 속셈으로 우리를 계속 유인하다가 마침내 가장 외떨어지고 황량한 바다에 이르면 홱 방향을 돌려 우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이 일시적인 불안감은 막연하지만 무시무시했고, 그와는 대조적인 화창한 날씨 때문에 오히려 불안감이 더욱 고조되었다. 그 푸르고 평온한 수면 아래에는 악마적인 유혹이 숨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루하고 허전할 만큼 온화한 바다를 며칠이고 항해하다 보면, 우리의 복수심을 온 세상이 혐오한 나머지 유골 단지 같은 이 배의 뱃머리 앞에서는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해버린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 배가 동쪽으로 방향을 돌리자 희망봉 일대의 바람이 우리 주위에서 윙윙거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길고 험한 바다에서 파도를 타고 오르내리게 되었다. 상앗빛 '피쿼드'호는 돌풍에 고개를 숙이고 미친 듯이 검은 파도를 뚫고 나아갔다. 물보라가 뱃전 너머로 날아왔다. 은 부스러기가 소나기처럼 퍼붓는 것 같았다. 생명이 없는 이 적막한 공간은 사라졌지만, 그것은 전보다 더욱 처참한 광경으로 바뀌었다... 불길한 바다 까마귀들이 빽빽이 날고 있었다. 아침마다 이 새들이 밧줄에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마치 우리 배를 표류하고 있는 무인선쯤으로 생각하고, 황폐해질 운명인 이 배야말로 집 없이 떠도는 자기들에게 알맞은 보금자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검은 바다는 쉴 새 없이 굽이치며 끊임없이 흐르고, 그 거대한 조류는 양심이라고 되는 듯, 거대한 우주의 영혼이 자기가 낳은 오랜 죄와 고통을 후회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날씨가 험해지고, 밤바다 파도가 거칠게 밀려들기 시작하자 공포에 찌든 뱃사람들의 마음은 죄의식의 고통에 시달리기 시작한다. 앞서 바다를 영혼이라고 표현했던 작가는 거세게 일어나는 파도를 우주의 양심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 대부분은 우주의 브레인 속, 그중에서도 미지의 우주 영혼이 요동치지 않는 좌뇌 마른땅 육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른땅에서 학문이라는 작살을 갈아, 우뇌의 예측 불허 영혼의 바다를 어떻게 탐험하고 극복해 갈지 엿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속에 정복하고 차지하고 싶은 탐욕과, 두려워 떨게 만드는 공포가 함께 공존하여 우리 마음에 상충하는 딜레마를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세상엔 전쟁과 종교가 공존하는 것이 아닐까. 아직 채 다음어 지지 않은 조악한 작살을 들고, 그 탐욕과 공포, 전쟁과 미신을 모두 끌어안기로 선언하고, 가장 먼저 그 미지의 파도 속에 발을 담근 것이 그 옛날 포경선 선원들이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탐욕과 공포가 한 뿌리에서 태어나는 쌍둥이인 것은 아닐까. 인간은 각자의 탐욕과 공포에 이끌려 살아가는 존재인 것은 아닐까. 나에게 탐욕이고 동시에 공포인 것은 무엇일까.
친구란 서로의 탐욕과 공포를 보여주고 나눌 수 있는 존재인 것이 아닐까. 포경선도 오랫동안 바다를 떠돌다 만나는 친구 포경선을 반가워한다. 같은 탐욕에 이끌려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왔고, 같은 공포와 마주하여 싸우고 있는 전우애, 같은 처지라는 유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경선과 포경선이 만나 서로의 배에 올라 교제하고 포경 정보를 교환하는 '사교방문(Gam)'도 하고, 서로에게 편지와 신문을 전해주는 친절한 우정을 베풀기도 한다. 에이 해브 선장은 다른 포경선을 만날 때 굳이 힘든 걸음을 나서서 큰소리쳐 물어볼 만큼 궁금한 사안은 한 가지밖에 없다. 흰 고래를 보았냐고. 공교롭게도 그렇게 알고 싶은 흰고래에 대한 정보는 쉽게 얻을 수가 없다. 그럴 때마다 선원들은 그들의 사고가 작용하는 속성에 따라, 흰 고래라는 이름만 입에 올려도 불길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미신을 마음에 쌓아간다. 에이 해브의 집요한 흰 고래에 대한 집착은 허무한 죽음으로 끝나고 말리라는 저주가 소설 전체에 하늘 가득 먹구름처럼 드리워져 있다.
이 세계가 무한한 평면으로 되어 있어서 동쪽으로 계속 항해하면 영원히 새로운 곳에 닿을 수 있고, 키클라데스 제도나 솔로몬 제도보다 더 아름다운 별천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 항해에도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그 머나먼 신비를 찾아서, 또는 언젠가 한 번은 모든 인간의 가슴 앞에서 헤엄칠 그 악마 같은 환상을 힘들게 추적하면서 지구를 한 바퀴 돈다 해도, 우리는 결국 황량한 미로 속으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도중에 가라앉고 말 것이다.
작가는, 소설의 한 중간에 이르러 뜬금없이 <황금 여인숙>에서 들었다는 '타운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래드니라는 항해사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고 앙심을 품은 스틸킬트라는 뱃사람이 복수를 하려고 죽일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모비 딕이 나타나 완전한 복수를 해주어 스틸킬트가 살인이라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모비 딕이 등장하는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 테네리페 출신 녀석은 배에서 50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눈처럼 하얀 고래가 있는 것을 갑자기 발견하고는... 괴물이 있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모두 광란 상태에 빠졌지. '흰 고래다! 흰 고래야!' 선장도 항해사도 작살잡이들도 모두 외치면서, 무서운 소문에도 꺾이지 않고 그렇게 유명하고 귀중한 고래를 몹시 잡고 싶어 했다네. 반면에 완강한 선원들은 저주를 퍼부으면서도 거대한 우윳빛 덩어리의 섬뜩한 아름다움을 곁눈질해 보았지. 수평으로 비치는 햇빛을 받아 푸른 아침 바다에서 반짝이며 움직이는 그것은 마치 살아 있는 오팔 같았어... 항해사가 미끄러운 고래 등에 떨어진 순간 보트는 바로 일어나서 물결에 밀려났고, 래드니는 고래의 반대쪽 옆구리로 미끄러져 바다 속으로 내던져지고 말았지. 래드니는 물보라를 뚫고 헤엄쳐 나와서, 그 베일 같은 물보라 속에 잠깐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어. 그때 래드니는 모비 딕의 시야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 하지만 모비 딕은 갑자기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휙 방향을 돌리더니, 헤엄치고 있는 래드니를 이빨 사이에 문 채 높이 솟아올랐다가 이내 곤두박질치며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네.
작가는 왜 모비 딕의 일화를 이런 방식으로 끼워 넣었을까. '피쿼드'호가 모비 딕과 마침내 맞닥뜨리기 전에 모비 딕의 생김새와 특징들을 - 자신을 해치려는 존재, 그 존재에게만 개별적인 앙갚음을 정확하게 해낼 수 있는 영리한 존재로서의 - 좀 더 알리는 방식으로 복선을 깔아 두고 싶었던 게 아닐까.
다음 장에서 멜빌 작가는 틀리게 그린 고래 그림들과 제법 정확하게 잘 그린 고래 그림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한다. 고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전 세계의 여러 가지 고래 관련 자료들을 다 찾아본 흔적이 보이는 대목들이 이렇게 소설 이야기 사이사이에 부록 참고 자료처럼 끼워져 있다. 살아 있는 고래를 정확히 완벽하게 그린 그림은 없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유까지 설명하고 있다. 고래를 가장 가까이서 보는 고래잡이들도, 고래 전체의 모습을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사람이 고래 전체 모습을 보게 되는 경우는 죽은 상태의 고래들 뿐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고래가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해 정확하게 전체를 그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 후에, 그는 기독교 세계의 사람들이 이교도 사람들을 야만인이라 생각하는 편견에 대해 도전하듯 언급한다.
오랫동안 기독교 세계와 문명에서 멀리 떠나 있으면, 신이 인간을 놓아두었던 본래의 상태, 즉 야만 상태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진정한 고래잡이는 이로쿼이족 인디언과 다름없는 야만인이다. 나 자신도 '식인종의 왕'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야만인이지만, 언제라도 그 왕에게 반기를 들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야만인이 집에서 시간을 보낼 때의 특이한 점 가운데 하나는 놀랄 만한 끈기와 부지런함이다. 고대 하와이의 전투용 곤봉이나 작살노는 거기에 새겨진 조각들이 너무 다양하고 정교하다는 점에서 라틴어 사전만큼 위대한 인내력의 승리다... 백인 선원인 야만인도 하와이의 야만인과 마찬가지다. 똑같이 놀라운 인내력으로 상어 이빨이나 다름없이 조악한 잭나이프 하나만으로 그가 만들어내는 고래뼈 조각품은 그리스의 야만인 아킬레우스의 방패만큼 솜씨가 뛰어나지는 않지만, 복잡한 도안 속에 많은 것을 빽빽이 채워 넣은 점은 그 방패와 맞먹는다. 또한 야만적인 정신과 암시로 가득 차 있는 것은 독일의 위대한 야만인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에 못지않다.
대부분의 서구 백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인종 혹은 문화에 따라 문명인과 야만인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고 반기를 든다. 기독교 문명 세계를 떠나면, 자연히 인간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어 있고 그것이 야만 상태라고 주장한다. 미국 출신의 고래잡이들을 원래는 기독교 세계에 있던 문명인이었지만, 자연 속에서 야만 상태로 돌아간 사람들의 예로 들고 있다. 멜빌 작가가 기독교 문화라는 것 자체가 인간을 자연스럽지 못하게 비틀고 옭좨는 무엇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소설 <모비딕>을 니체가 읽었을지 모르겠지만, 멜빌 작가의 생각이, 인간의 본성을 억누르고 죽여 인간 스스로를 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기독교 교리를 들고 있는 니체의 생각과 같은 맥락으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작가는 또한 육지 사람들이 바다 원주민들에 대해 가진 편견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것은 바다 자체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 육지 사람들은 대체로 바다의 원주민들에게 지독한 편견과 혐오감을 품어왔고, 우리는 바다가 영원한 미지의 땅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콜럼버스는 서쪽 바다에 떠 있는 하나의 세계를 발견하기 위해서 무수한 미지의 세계를 항해했던 것이며, 치명적인 재난 중에서도 가장 무시무시한 재난은 먼 옛날부터 바다로 나간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차별로 일어났으며, 잠깐만 생각해보아도 젖먹이나 다름없는 인류가 제아무리 자신의 과학과 기술을 자랑하고 장차 그 과학과 기술이 아무리 진보한다 해도, 바다는 최후의 심판일까지 영원히 인간을 모욕하고 살해하며,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당당하고 견고한 군함도 산산조각으로 부숴버릴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느낌이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인간은 바다가 처음부터 갖고 있는 그 최대한의 무서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
... 바다의 음흉함을 생각해보라. 가장 무서운 생물은 물속 깊이 들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가장 아름다운 남빛 아래 숨어 있다. 또한 수많은 종류의 상어가 제각기 아름답게 꾸며진 자태를 갖고 있듯이, 바다에서 가장 무자비한 종족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악마 같은 광채와 아름다움을 생각해보라. 또한 바다의 모든 생물이 가진 서로 먹고 먹히는 살상 습성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 모든 바다 생물은 천지가 개벽한 이래 영원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생각한 다음, 푸르고 부드럽고 가장 온화한 이 대지로 눈길을 돌려보라. 바다와 육지를 둘 다 생각해보라. 여러분의 내면에 있는 무언가와 기묘하게 비슷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섬뜩할 만큼 무서운 이 바다가 푸른 초목이 무성한 육지를 둘러싸고 있듯이, 인간의 영혼 속에는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찬 외딴섬 타이티가 있고, 더구나 그 섬은 절반밖에 알려지지 않은 삶의 공포에 둘러싸여 있다. 신이 그대를 지켜 주시기를! 절대로 그 섬에서 떠나지 말라! 일단 떠나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테니!
작가 멜빌은 육지와 바다를 인간의 마음을 이루는 무엇으로 끌고 간다. 인간의 마음에 평화롭고 행복한 타이티 섬도 있지만, 불확실한 미지의 공포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인간의 마음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꼬집고 있다. 마치 인간이 서로 성격과 역할이 다른 좌뇌와 우뇌를 가지고 있어 겪게 되는 혼란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기도 하다. 분명한 질서를 유지하려는 내 좌뇌의 노력이 마치 우뇌가 불러오는 감정의 대폭우에 쓸려나가지 않고 햇볕 찬란한 행복한 타이티섬에 발을 꼭 붙이고 있으려는 노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타이티섬에만 있으면 괜찮은 걸까? 자꾸 철학자 니체가 떠오른다. 풍파는 전진하는 자의 벗이며 그 속에 인생의 즐거움이 있다고 했던 그의 말이 떠오른다. 중세부터 19세기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옭아매었던 미신과 기독교 교리가 융합된 서구 사회의 문화는 교리를 철저히 따라야 풍파를 모르고 날씨 맑은 타이티섬에만 살 수 있을 거라, 타이티 밖은 악마의 세계라 금을 긋고 개인 자유를 억압하고 영혼을 감금하여 압제했었던 것인지 모른다. 그런 미신을 깨고, 인간의 자연스러운 야만성 그대로를 인정하자고, 미지의 바다를 탐험하는 강한 존재가 되어 보자고 주장하며 멜빌과 같은 작가들, 니체와 같은 철학자들이 한 목소리로 일어나 미신의 공포를 걷어내고 현대 문화에 이른 것인지도 모른다.
'피쿼드'호는 저 멀리 커다란 흰색 덩어리를 발견하고, 순간 흰 고래를 만난 것이라 여긴다. 선원들의 흥분에 찬 관심이 일제히 쏠리고, 에이해브 선장이 보트를 내리라고 명령하여, 보트 네 척이 그것을 향해 질주했지만, 그들이 본 것은 한 마리 거대한 오징어인 걸로 밝혀졌다.
그 순간 우리는 모비 딕에 대한 온갖 생각을 다 잊어버리고, 신비로운 바다가 지금까지 인간에게 보여준 가장 놀라운 현상을 바라보았다. 길이와 너비가 200미터쯤 되고 펄프처럼 흐늘흐늘한 거대한 덩어리가 크림색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물 위에 두둥실 떠 있는 그것은 중심부에서 방사상으로 뻗은 긴 팔을 무수히 내저으며 아나콘다의 둥지처럼 뒤틀리고 꼬여 있었다. 그 팔이 닿는 범위 안에 들어온 불운한 먹이는 무엇이든 무턱대고 움켜잡으려는 것 같았다.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얼굴이나 앞면은 전혀 없었고, 감각이나 본능을 갖고 있는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파도 위에서 굽이치고 있는 그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존재, 형체도 없이 우연처럼 살고 있는 망령이었다... 향유고래잡이들이 일반적으로 이 오징어를 보는 것을 어떤 미신과 결부시켰든 간에, 얼핏 보기만 해도 그 오징어는 생김새가 너무 괴상해서 불길한 느낌을 주는 것은 확실하다... 사람들은 그것이 향유고래의 유일한 먹이라고 믿고 있다... 향유고래는 수면 아래 미지의 곳에서만 먹이를 잡기 때문에 그 먹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고 그저 추측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괴물 오징어의 출현이 스타벅과 같은 미국 출신의 선원들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의 전조처럼 느껴졌다면, 퀴퀘그에게는 향유고래의 출현을 예고하는 존재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미신과 죄의식에 눌린 미국 퀘이커교도의 생각과, 맑은 눈으로 보는 자연적 야만의 인간의 사고 차이를 대조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실제로 향유고래가 나타났다. 이등 항해서 스터브가 타슈테고(인디언)와 다구 (흑인) 그리고 퀴퀘그(폴리네시안 식인종) 부하들과 함께 보트를 타고 고래를 쫓아가 고래를 죽여 잡아왔다. 그리고 그날 스터브는 고래 스테이크를 먹는다. 작가는 동시에 죽은 고래고기에 상어 떼가 달라붙어 시끄럽게 먹는 장면을 그린다.
자정 무렵에 잘라낸 고래고기가 스테이크로 요리되었다. 스터브는 고래기름으로 등불 두 개를 켜고, 권양기가 식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위에 고래고기 요리를 올려놓고, 그 앞에 떡 버티고 섰다. 그날 밤 고래고기 연회에 참석한 사람은 스터브만이 아니었다. 수천 마리의 상어 떼가 죽은 고래 주위에 몰려와 고래의 지방을 마음껏 즐겼다. 그들이 고개를 씹는 소리와 스터브가 고기를 씹는 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갑판 위에서 용감한 백정들이 황금 자루에 술이 달려 있는 고기칼을 들고 식인종처럼 아직 살아 있는 상대의 고기를 자르고 있는 동안, 식탁 밑에서는 상어 떼들도 보석을 박은 입으로 죽은 고기를 서로 뜯어먹으려고 다툰다. 이 모든 것을 거꾸로 뒤집어도 거의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당사자들에게는 충분히 소름 끼치고 상어처럼 잔인한 짓이다... 밤바다에서 포경선에 묶여 있는 죽은 향유고래를 둘러싸고 수많은 상어들이 명랑하고 쾌활한 기분을 드러내는 꼴을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은 아니다. 그 광경을 본 적이 없다면, 악마 숭배의 타당성과 악마를 회유하는 편법에 대해 판단하기를 보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작가가 고래를 죽이고 자기가 원하는 부위를 탐하는 인간의 탐욕을 죽은 고기 주변에 몰리는 상어 떼의 악마적인 본능에 비유하고 있는 듯한 묘사다. 상어가 잔인해 보인다면, 인간도 그만큼 잔인하다고, 다른 대상을 '악마'라고 부르는 인간 자신의 악마성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꼬집고 있는 듯하다.
이어 고래를 해체하는 과정과 고래 몸의 구성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가 지나간 후, '피쿼드'호는 모비 딕을 보았다는 또 한 척의 포경선, '제로보암'호를 만난다. '제로보암'호의 메이휴 선장은 그 배에 퍼진 악성 전염병을 '피쿼드'호에 전하지 않기 위해 가까이 오지는 않았지만, 보트를 타고 와서 서로 몇 미터 거리를 유지한 채 대화를 나누려 시도했다. 소설은 선장이 탄 보트를 젓고 있는 사람에 대한 묘사를 몹시 자세히 하고 있다.
저마다 한가락 하는 괴짜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루는 거친 포경 생활에서도, '제로보암'호의 보트를 젓고 있는 한 사람은 정말 기묘해 보였다. 몸집도 작고 땅딸막한 그 사내는 아직 젊은 나이인데, 얼굴은 온통 주근깨 투성이고, 숱 많은 노랑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유대 신비주의자가 입는 것 같은 긴 옷자락의 빛바랜 호두색 외투로 몸을 감싸고, 손을 덮은 긴소매를 손목까지 걷어 올리고, 눈 속에는 광적인 망상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문제의 사내는 '제로보암'호의 선원들 사이에 불가사의한 영향력을 휘두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원래 광신적인 니스카유나 셰이커교도 공동체에서 자라났고, 그곳에서는 위대한 예언자였다... 미치광이 특유의 교활함을 발휘하여 겉으로는 건전한 상식을 지닌 착실한 사람인 체하며 '제로보암'호의 고래잡이 항해에 풋내기 선원으로 지원했다. 그는 고용되었지만, 육지가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로 나가자마자 그의 광기가 홍수처럼 터져버렸다. 그는 대천사 가브리엘을 자칭하며... 자기가 모든 섬의 구세주이자 오세아니아 전체의 주교 대리라고 말했다. 그렇게 선언할 때의 그 단호한 진지함, 끊임없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상상력의 음울하고 대담한 작용, 진정한 망상이 불러일으키는 불가사의한 공포가 융합되어, 대다수 무지한 선원들은 이 가브리엘에게서 성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게 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가브리엘을 두려워했다... 역병이 발생한 뒤로는 전보다 더욱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그는 전염병을 천벌이라고 부르면서, 그 재앙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자기뿐이니까 그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역병을 퇴치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대부분 비열한 겁쟁이인 선원들은 움츠러들었고 그에게 알랑거리는 자들도 있었다. 때로는 그의 지시에 따라 그를 신처럼 숭배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시키는 광신자의 무한한 능력은 광신자 자신의 무한한 자기기만보다 훨씬 인상적이다... '제로보암'호는 고국을 떠난 지 얼마 후에 만난 포경선의 선원들로부터 모비 딕의 존재와 그가 저지른 만행을 분명히 알게 되었던 모양이다. 이 정보를 탐욕스럽게 빨아들인 가브리엘은 그 괴물을 만나도 절대 공격하면 안 된다고 선장에게 경고했고... 그는 모비 딕이야말로 셰이커 교도 가 믿는 신의 화신이며 셰이커 교도들은 성경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한두 해 뒤 그 모비 딕이 돛대 꼭대기에서 분명히 보였을 때, 일등 항해사 메이시는 녀석과 맞서고 싶은 열정에 불탔다... 드디어 작살 하나를 내리꽂는 데 성공했다. 그동안 가브리엘은 주돛대 꼭대기에 올라가 한쪽 팔을 미친 듯이 흔들어대면서, 우리 신을 공격하는 무례한 자에게는 당장 천벌이 내릴 거라는 예언을 큰 소리로 퍼부어댔다... 항해사 메이시가 보트 뱃머리에 서서 있는 힘을 다하여 고래에게 격렬한 외침 소리를 토해내며 작살을 던질 기회를 잡으려 하고 있을 때, 아! 바다에서 거대한 하얀 형체가 솟아오르더니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잡이들은 놀라서 잠시 숨을 죽였다. 다음 순간 격렬한 활력에 넘쳤던 그 불운한 항해사는 공중으로 휙 내던져졌다가 기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내려와 50미터쯤 떨어진 물속으로 추락했다..."천벌이다! 천벌이야!" 가브리엘은 이렇게 부르짖으며, 공포에 사로잡힌 선원들에게 고래를 쫓는 것을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이 무서운 사건으로 대천사의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그는 배에서 형언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가브리엘이 에이해브에게 외쳤다. "당신도 이제 곧 메이시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될 테니까. "벼락 맞을 놈!"에이해브가 고함을 질렀다.
'제로보암'호 메이휴 선장이 탄 보트를 저으며 배의 속도와 방향을 조종하고 있는 사내는, 모비 딕에 대한 선원들의 공포와 미신에 찌든 마음을 이용해, 모비 딕을 신격화하고 그들의 영혼을 제압하고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제사장처럼 굴고 있는 자다. 작가는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통해, 사람들의 의존적이고 연약한 마음을 미혹한 후 결국 인간 내면의 공포심을 더욱 키워 그 삶을 압제하고 조종하는 각종 미신적 종교와 종교 지도자들을 풍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제로보암'호 포경선 선원들이 고래를 신으로 숭배하고, 신의 뜻을 전한다고 주장하는 자기기만 끝판왕 가브리엘을 두려워하기에 이른 것처럼, 우리 자신도 인간들 위해 군림하고 싶은 어느 인간, 자신이 만들어낸 신을 이용하여 공포를 조장하는 그런 인간에게 영혼을 내맡기고 자청하여 압제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참고 자료: 허먼 멜빌의 <모비딕> (작가정신, 김석희 역) 51 - 7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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