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서평
톨스토이는 작가로서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1878년, 그의 나이 50에 <안나 까레니나>를 썼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내 안의 모든 것을 <안나 까레니나> 속에 썼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I wrote everything I had within me in Anna Karenina. There is nothing else left to me.)
남편이 아닌 다른 남성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서 당대 최고 귀부인 자리에서 사회적 윤리 도덕적 추락의 대가를 맛보아야 했던 안나 까레니나의 이야기와, 시골에서 이상적인 농업, 이상적인 가정생활을 꿈꾸는 귀족 지주 레빈과 키티의 쉽지 않은 사랑 이야기를 소설을 이루는 두 개의 축으로 세워, 그 속에 톨스토이 작가의 시대적 철학적 윤리종교적 고민과, 나아가고자 하는 이상향 삶과 꿈을 다 담은 <안나 까레니나> 소설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첫 구절로 시작합니다.
모든 행복한 가족은 서로 닮은 점이 있고, 불행한 가족은 모두 자신만의 이유로 불행하다.
지금 책을 다 읽고, 이 첫 구절, 특히 "불행한 가족은 모두 자신만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이 소설 속에서 행복하지 않았던 인물들 각자의 불행한 이유를요. 남편의 바람기와 빠듯한 형편에서 힘들어하던 안나의 올케 돌리, 가장이라는 책임에 묻혀 아내의 눈치만 보며 살아가는 게 싫고 설레는 생동감을 끊임없이 갈망했던 안나의 오빠 스찌바, 가정이 깨지고 자신을 이루던 완벽한 포장이 뜯겨 나가는 수치심의 고통을 느끼던 안나의 남편 알렉세이,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워했고, 급기야 기찻길에 몸을 던져야 했던 안나.
안나는 고위 공직자 알렉세이의 스무 살 차이 나는 어린 아내로, 세료자 어린 아들의 엄마로, 사교계를 주름잡는 우아한 고관대작 부인으로 충실한 결혼생활 중, 브론스키 백작을 만나고 그녀의 삶엔 거대한 지진이 일어납니다. 브론스키는 안나 또래의 젊고 잘생긴 매력남에다, 안나에게 한눈에 반해 그녀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버릴 듯 열정적인 구애를 합니다.
안나는 브론스키를 알게 되면서, 자신이 남편을 전혀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거짓과 위선 위에 세워진 자신의 결혼생활 민낯을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분명히 깨닫게 되어, 더 이상은 한순간도 남편 알렉세이와 함께 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랬던 만큼, 그녀 또한 브론스키라는 처음으로 찾아온 진실한 사랑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젊고 멋진 남자에게 반하고, 그 남자가 자기에게 반했다는 사실에 또 반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해 버리고 맙니다.
브론스키와 만나 사랑을 나누고 싶은 진심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안나는 처음엔 남편의 눈을 피해 브론스키를 만나고 다녔지만, 브론스키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되고 그녀는 결단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남편에게 자신이 브론스키를 사랑하며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다고 말해버립니다.
자신이 잘 쌓아 올린 성이 무너져 내린 듯 절망적인 수치심과 아내에 대한 복수심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안나의 남편 알렉세이는, 안나가 아이를 낳다가 죽어간다는 말을 듣고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기 시작하는 듯합니다. 아내에 대한 연민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 교리로 점점 이어지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 듯 보입니다. 안나와 브론스키에게 인간이 할 수 없는 수준의 자비와 용서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죽어가는 듯한 안나, 저토록 신실하고 반듯한 안나의 남편 앞에서 절망한 브론스키는 집에 와서 권총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결국 안나는 죽지 않고 살아납니다. 브론스키의 자살기도도 실패로 돌아가, 서로 그리워 참을 수 없는 두 사람은 결국 다시 만나기 시작하고, 마침내 안나는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 브론스키와 함께 이탈리아로 갑니다. 브론스키 또한 안나와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던 군인 직업도, 어머니의 기대도 버리는 희생을 합니다. 브론스키는 이탈리아에서 화가의 꿈을 키워보기도 하고, 다시 러시아로 돌아와 시골에서 병원 및 여러 가지 사업을 운영하는 대지주 백작으로 살아보기도 하지만, 러시아 사교계에서 '부도덕한 여자', '저질스런 여자'로 낙인찍힌 안나, 어딜 가도 쑥덕거리며 쳐다보는 대상이 된 안나, 아직 남편이 이혼해주지 않은 안나와 함께 살아가기가 점점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워집니다. 안나가 자기 아이들을 낳아도 자신의 성을 따를 수도 없고 재산을 물려줄 수도 없는 상황 앞에서 브론스키는 미래에 대한 희망도 꿈도 품기가 어렵습니다. 안나는 안나대로, 임신은 곧 미모를 잃는 일이고, 그건 브론스키의 변심 가능성을 높이는 일이 되므로 앞으로 아이를 임신할 마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안나가 브론스키의 마음을 생각하여 오빠 스찌바를 중간자로 세워 전남편 알렉세이에게 이혼을 요구하지만, 안나가 원할 때 이혼해 준다고 하던 그는 마음을 바꾸어 - 신비주의 신앙에 빠진 여자의 조종을 받고-, 안나에게 이혼을 해주지 않겠다고 결정해 버려 안나와 브론스키를 절망에 빠뜨립니다.
안나와 브론스키 두 사람은 함께 살면 살수록 각자가 느끼는 불만족 정도가 몹시 높아져 갑니다. 제대로 이혼하지 않고 함께 사는 생활 자체가 그들의 삶을 수치 속에 나뒹굴게 하고, 주변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뭔가를 입증하고 연민을 얻어내야 할 것처럼 느껴집니다.
안나의 괴로운 처지를 몹시 안쓰럽게 생각하면서도, 무너져가는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일으키기만도 벅찬 브론스키는 점점 자신을 탓하며 괴로워하고 자신의 자유를 인정해주지 않고 속박하고 구속하려만 드는 안나에게 화가 나고, 그 분노가 쌓여갈수록 예전과 다른 그의 차갑고 냉정한 눈빛을 느끼는 안나는 처음과 태도가 너무 달라진 남자에게 -그 남자 때문에 자신이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과도 헤어져 살게 되었는데 자신을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남자에게 - 증오심을 품게 됩니다. 단순한 미움이 아니라, 여전히 너무나 사랑하기에 온전히 사랑받는다고 꽉 차게 느끼고 싶은 만큼 더 증폭된 애증입니다.
안나는 기찻길에 뛰어들어 자살을 감행함으로써 자신을 이렇게 만들고 마음으로 점점 떠나가고 있다고 여겼던 브론스키에게 복수 아닌 복수를 합니다. 브론스키는 안나의 주검 앞에서 오열하고 넋이 나가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죽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재산을 털어 자원병들을 이끌고 세르비아 전쟁에 참전해 버립니다. 브론스키의 입장에서 안나는 모든 걸 버리고 선택한 몹시 사랑했던 여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부수고 죽어버린 상황입니다. 전쟁지로 떠나기 직전 기차역에서 만난 브론스키는 다시 군인이 되었지만, 자랑스러운 영웅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너무나 불행하고 지독한 치통마저 앓는 늙고 초라한 영혼에 불과해 보입니다.
소설을 읽고 저는 생각합니다. 브론스키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안나의 잘못은 무엇이었을까. 삶 전체를, 진실 그대로를 보여주려고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고 "실눈"을 뜨고 원하는 일부만 보고 보여주며 가식을 떨었던 잘못일까요. 사회 시선과 기준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욕망을 거침없이 추구하며 자신의 핏줄 가족까지 버렸던 탓일까요. 존재하지 않는 이상을 바라며 스스로를 속이고 서로를 괴롭힌 게 큰 잘못이었을까요. 그들이 고작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나이였을 뿐이라는 걸 생각하면, 참 안쓰러워질 뿐입니다.
그들을 생각하다가 저는 저의 20대 가장 좋아했고 가장 미워했던 남자 친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 반했다며 끈질기게 구애했고, 그 구애가 저를 몹시 설레게 했던 남자 친구였어요. 그렇게 직진으로 다가오던 남자가 제가 자신의 여자친구가 되었고, 그를 몹시 좋아하고 의지한다는 확신을 가졌던 어느 순간부터는 태도가 바뀌어 가던 것을 민감하게 느끼며 절망했던 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한계가 올 수밖에 없는 잠시 불타오르는 남자의 무모한 사랑을 믿는 것이 그 사랑의 눈빛을 끊임없이 바라는 것이 여자에게 어떤 절망감을 안겨줄 수 있는지 톨스토이 작가는 - 성욕에 쉽게 휘둘려 방탕하게 살았던 전적이 다분했던 - 자신의 행동, 죄를 소설을 쓸 때마다 다각도로 들여다보았던 듯합니다. 그리하여, <안나 까레니나>에서 마침내 진실의 불빛 아래 여성의 입장에서 섬세하게 자신의 잘못을 다 파헤칠 수 있었고, 그는 이 작품 안에 자신의 젊은 시절 매력적인 모습으로 여성들을 유혹 - 책임을 질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 - 하고 다녔던 죄를 모두 낱낱이 빠짐없이 고했다고 느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안나 까레니나>는 레빈이라는 인물의 철학적 종교적 고민들을 통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결론 내려야 하는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한 톨스토이 작가의 고민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어떤 일을 하며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무엇을 위해 어떤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할지의 고민부터, 러시아 정치 경제 농업이 나아가야 할 길까지 제시하는 철학서 사상서 같은 느낌도 다분히 풍겼습니다.
안나 까레니나에 등장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제 머릿속을 지나갑니다. 어쩌면 그렇게 그 시대 사회와, 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개인들의 삶과 갈등과 고민을 생생하게 자세히 그려낼 수 있었을까 놀랍기만 합니다. 톨스토이 작가의 독서 폭과 깊이, 전 세계 문화 사상 흐름을 꿰뚫어 보는 그의 통찰력이 어마어마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 문화 영향이 깊이 스며든 19세기(1870년대) 러시아 귀족 사회부터 농민 현실까지 그대로 살려내는 소설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행복한 가족은 서로 닮은 점이 있고"라는 소설의 첫 구절을 저는 소설을 읽고 깨닫게 된 교훈으로 챙겨가려 합니다. 그 닮은 점은, 제가 느끼기에 키티와 레빈이 찾아가던 지점, 돌리가 갈등과 고통 끝에 안나 덕분에 이른 곳, 자신이 가진 것을 족히 여기고 감사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걸로 충분하다고 족하고 감사하는 마음만이 서로를 자신을 불만족한 마음이 끝없이 타는 화형장으로 몰아넣지 않는 유일한 행복한 가족이 가진 닮은 점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문 사진 출처: 2012년 Anna Karenina 영화 포스터 (Directed by Joe Wr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