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자기 마음 집
꿈을 꾼다는 의미
꿈이 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결핍을 채우는 변화를 바라는 욕구이면서, 동시에 상상력을 기반으로 나의 미래를 쓰는 창작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꿈을 상상하고 묘사할 수 있는 아티스트라고 믿는 편이다. 꿈을 꾸는 일은 모두가 할 수 있고, 지금 당장 내 꿈이 무엇인지 모르겠는 사람도 마음의 빗장만 열리면 춤추는 구두를 신은 발이 절로 움직일 달음질이라고 생각한다.
꿈은 다양하다. 작가들의 문체와 장르가 다 다르고, 화가들의 그림체와 색감이 천차만별로 다른 것처럼, 각 사람의 내면에 그려지는 꿈의 생김새도 사람마다 독특하고 다양하다. 물론 '이발소 그림'처럼,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는 성공담도 있다. 몹시도 가난했던 청년이, 마침내 자신의 꿈을 이루고, 능력을 떨치면서 그토록 어려웠던 생계가 해결되었을 뿐 아니라, 더 크고 안락한 집에서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나은 식생활 문화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 이런 식의 성공 스토리가 다소 진부한 건, 많은 사람들이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부터 극복해야 했던 어려웠던 역사가 길었던 탓이 아닐까.
시대와 사회 문화가 변하면서 달라진 성공담도 있다. 제인 오스틴이 살았던 시대 - 18세기 말, 19세기 초 -만 해도 여성들 성공은 신분과 재산, 안전과 안정을 보장받는 것이었고, 그것을 이루고 지킬 보험 장치로, 그시대 최고 럭셔리 백마 타는 왕자님이나 세력가 귀족 남성과의 결혼을 최고의 성공가도로 생각하고 원하는 신분의 남성과 그 집안 문화에 어울릴 교양과 실력을 갖추려고 노력해야 했다. 20세기 중반까지 대부분의 한국 여성도 그런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 21세기 현대 여성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 쟁취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성공을 위해, 보다 자신에게 집중된 노력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어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처럼 부지불식간에 내 안으로 파고들어 온 타인의 시선이라는 잣대로, 어디서 누가 어떤 마음으로 시작한 것인지 모호한 종교 역사와 전통문화가 심어준 엄격한 도덕관으로 내 꿈을 심하게 압박하고 있다. 누르고 막고 때리고 못되게 차갑게 군다. 쉽게 가질 수 없고 이룰 수 없는 꿈을 꾸려하면, 말도 안 되는 생각으로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한다는 자학이 올라오고, 넌 정신 못 차렸구나 냉소가 떠오르자마자 수치스러워지고, 내 안에 떠오른 발상이 옳은 건가 아닌가, 남 앞에 내놓기 멋진 개념인가 아닌가 이리저리 남의 관점에서 살피고 뜯어고치느라 바쁘다.
결국 내 꿈은 자유롭게 날아보지도 못하고, 스스로 밟아 짓누른 결과로 힘없이 스러져 골골하다 죽어간다. 내 상상력이 나래를 펼쳐볼 기력을 잃고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푸시식 꺼져 가라앉아 버린다. 일관적이고 효율적이고 이성적이고 개념 있고, 어떤 종류의 잣대에도 거슬리지 않는 옳은 생각만을 제조해 내기에 급급한 기계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내가 내 인생에서 무엇을 바라고 원하건, 나는 나만의 꿈을 꿀 자격이 있다. 그 꿈의 내용이 다소 이기적이고 속물적이거나 허황되고 오글거리더라도, 나 혼자 꾸어보는 나의 꿈을 막을 필요는 없다. 그럴 필요가 없음을 나는 아이들을 키우며 깨달았다. 세 살 아이가 나중에 커서 우주에 가고 싶다고 할 때, '너 우주에 가면 가족과 영영 헤어지거나 죽을지도 몰라'라고 초를 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 나이에 그런 꿈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지금 내가 꾸는 꿈도 지금의 나에게 잘 맞고 자연스럽다. 지금 내가 갖고 싶은 것, 해보고 싶은 것, 언젠가 가져보고 싶은 것, 혹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솔직한 꿈을 적어도 나 자신과는 소통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꿈이 좀 미숙하고 어설퍼 보이거나, 뚱딴지 삼천포 같거나, 어디서 주워들은 스토리를 끼워 맞춘 양 진부하면 어떤가. 어린아이들의 성장을 기다려주는 인내심을 나 자신에게도 보여주자. 내가 성장하는 만큼 내 꿈도 성장하고,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명작처럼 남다르게 독특하고 아름다운 영향력을 뿜게 되리라는 것을 믿어주면 된다.
테라스가 있는 집
나는 테라스에 대한 로망이 있는 편이다. 어렸을 때, 아빠가 손수 설계에 참여해서 지었던 이층 집 일층에는 할머니와 엄마 아빠,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가 쓰시는 큰 방들이 있었고, 이층에는 2 개의 작은 방 - 내 방과 동생 방 -이 있었다. 아이들의 방에서 나오면, 책장과 피아노가 있는 작은 도서관 같은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은 넓은 테라스로 이어져 있었다. 테라스는 야외지만, 유리로 덮인 지붕이 있어, 비 내리는 날, 눈 오는 날도 나가서 경치를 즐길 수 있는 멋진 장소였다. 나는 어렸고 겁이 많아서 2층 내 방이 아닌 1층 할머니 방에서 잠들곤 했고, 테라스의 가치를 충분히 알고 즐기지 못했다. 밤에 즐기는 별 멍이나 달 멍, 비 내리는 날 유리 지붕을 두드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비 멍의 즐거움을 알지 못했고, 이젤을 펼쳐놓고 아파트 촌이 둘러싸기 전 아직은 미나리밭 소나무밭이 드문드문 남아 있는 부산 변두리 동네를 그릴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
충분히 누리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이층 테라스와 내 방이 자꾸 꿈에 등장하곤 했다. 잠자다 깨면, 간절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을 뜯었다. 언젠가는 테라스가 있는 집으로 이사 가거나, 아니면 지금 집에 테라스를 만들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 사는 집은 이층에 테라스를 지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 1층 뒷마당 나가는 문 앞에 쪽마루를 만들고 벤치를 놓아 머릿속 공간을 실현시키려고 이래저래 노력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뒷마당을 어떻게 꾸며봐도 내 머릿속에 있는 낭만 가득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나는 별이 쏟아지는 2층 테라스를 내 안에 정성껏 지어보기로 했다. 테라스에서 바라보는 풍경도, 테라스의 크기와 구조도, 테라스를 꾸밀 가구와 소품 종류도 다 내가 - 어떤 한계의 간섭도 없이 - 정하기로 했다. 나는 저 멀리 알프스 산이 보이는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테라스에, 저 먼 나라 페르시아 인도 아프리카 나라의 이국적인 원목 특산품들을 가져와 화려하고 환상적인 공간으로 완성해 냈다.
꿈을 지켜주는 비밀 테라스
내 안의 테라스는 나의 성채 안 어떤 공간에서도 허락하지 않았던, 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곳, 나 스스로가 나를 막지 않는 곳이다. 내 생각과 행동을 오래 다스려온 터줏대감 가치관 도덕관조차 잠시 판단을 보류하고 나를 무조건 수용하는 공간이다. 햇살에 반짝이는 얼음 가득 냉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테라스에 펼쳐 놓은 얇은 커튼이 드리워진 데이베드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좀처럼 드러내 본 적 없었던 내면의 조각들을 펼친다. 녹색 담요 위에 빨간 화투장 놓듯 촤르륵 부채처럼 펼친 조각들을 하나씩 툭 툭 툭 선명하게 자유롭게 신명 나게 던져놓는다.
오직 해와 별과 달과 비, 숲과 공기만이 존재하는 이곳에선, 이 모든 존재가 나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준다. 여기선 가족에 대한 연민이나 죄책감 없이. 패륜이 효도가 어쩌고 찔러대는 유교 가치의 바늘 없이, 가족으로부터 받는 부담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여기선 내 안 깊숙이 숨어 있는 진짜 감정을 누구에게도 변명하고 수식할 필요 없이 있는 대로 쏟아낼 수 있다.
때때로 여기서 나는 내 안의 '화'를 날 것 그대로의 상태로 끄집어낸다. 화가 있다. 화는 언제나 거기 내 복부 주머니에 캥거루 새끼처럼 당연하게 들어 있다. 이유는 모르겠다. 기억도 할 수 없는 아기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엄마 뱃속에서부터 시작된 내 본성을 이루는 감정인지 알 수 없다. 그도 아니라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인간이 처한 꼬락서니 현실과 디킨스 작가가 표현한 대로 '저열하고 악의적인' 군중 심리에 휘둘려 사는 인간 본성에 자꾸 화가 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차가운 커피를 들어 한 모금 크게 삼켜 뜨거운 열을 식히며, 내 '화'의 다른 측면을 본다. 내 화는 어쩌면 깊은 실망인지 모른다. 이 실망은 나를 낳고 키운 부모를 향한 것일 수도 있고, 나를 둘러싼 이 세상 사람들, 혹은 더 나아가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우주 전체를 향한 것일 수도 있다.
실망하고 있다는 말을 나는 한 번 더 뒤집어 생각해 본다. 이렇게 깊이 실망하고 있다는 말은, 바라는 이상이 심히 높다는 뜻이기도 한 것 같다. 나는 이상이 너무 높은 극단적 이상주의자 일지 모른다. 그래서 부모의 애정에도, 친구 간 의리에도, 이웃 간 온정, 심지어 인간을 구하는 신의 사랑에도 나는 최고치의 이상을 세워놓고 있어서, 쉽게 실망하고 돌아서고 차라리 고립을 선택하는 것인지 모른다. 지겹게 반복해온 삶에 대한 꿈에 대한 좌절을 더는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아예 기대를 버리고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았지만, 약간의 앞마당만 장식처럼 열어 놓고, 열려 있는 사람인 척 다 괜찮은 척 꽤나 친근하고 너그러운 척 잠시 보여주는 미소 짓는 안면 근육만 기계적으로 작동시키며 마음에 분칠 한 연기자 인생을 살아왔는지 모른다.
나의 화, 다시 말해, 나의 높은 이상을 나의 고립 안에 가두어 두고 싶지 않다. 나는 '우리의 이상'을 함께 신나서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책을 읽다가 나와 이상을 함께 하는 <위대한 유산>을 쓴 디킨스, <빨강 머리 앤>을 쓴 몽고메리, <부활>을 쓴 톨스토이, <귀여운 여인>을 비롯에 수많은 명작 단편을 쓴 체호프, <검은 고양이>로 유명한 공포 소설 추리 소설 장르 발명가 에드거 앨런 포, <자기만의 방>을 쓴 버지니아 울프 같은 사람들을 찾아내는 기적이 일어날 때가 있다. 내 마음 같은 결의 작가들과 연대하고 내 이상을 외치는 목소리를 키워갈 때, 그때 나의 꿈도 커져가는 걸 목격하곤 한다. 깨닫고 보니 나의 이상이 바로 나의 꿈이다. 테라스는 꿈이 태어나 자라는 곳이다. 짓밟히고 찢긴 꿈을 다시 이어 붙이고, 치료하고, 펼치고, 키워가는 섬세하고 안전하고 중요한 곳이다. 테라스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나만의 비밀 아지트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mosiunterwe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