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르고 사는 이유가 있다

[에세이] 미니멀리스트의 사생활

by 하트온

미니멀리스트도 어지른다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10년 차 혹은 11년 차 미니멀리스트니 하며 숫자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해가 바뀌고 기억력은 더 흩어져, 내가 몇 년째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고 있는지 더 이상은 추적이 힘들고 귀찮아져 버렸다. 더 이상은 셀 필요가 없기 때문에 내 몸이 내 머리가 더 이상은 세지 않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모른다. 10년 11년 미니멀리즘을 추구했다고 해서 내가 정리정돈의 달인이 되었다거나 햇수가 경력이 되는 전문가 경지에 오른 것이 아니다. 그저 그 시간 동안 겹겹이 나를 싸고 있던 껍질을 벗어가며 나의 본질을 향해 떠나온 여정이었을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특별한 성질을 가진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나를 알아가는 여행을 꽤 오래전에 떠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내가 이렇게 오랜 시간 미니멀 라이프를 살아왔다고 해서, 어지르는 습관이 완전히 고쳐졌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나는 아직도 틈만 나면 어지르고, 책상은 무언가로 금세 수북해지곤 한다. 미니멀리즘은, 어지르는 나를 부끄러워하고, 내가 어지른 물건들을 후딱 치워 숨기자는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어지르는 나를 나 자신의 일부라고 용납해 주는 과정이다. 내가 왜 무엇을 어떻게 언제 어지르는지, 나를 유심히 관찰해 주고, 어질러진 물건들 속에 담긴 나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깨닫고 도와주는 과정이다.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인 것들이 말해주는 나에 대하여


내 책상 위에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말해보자. 그 각각의 물건에 담긴 내 마음을 짚어 보자.


즐겨 쓰는 볼펜 세 자루씩, 총 여섯 자루. 책상 위, 책 사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즐겨 쓰는 볼펜이 떨어져 글쓰기 작업을 하다 온라인 수업을 진행하다 흐름이 끊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윤곽을 드러낸다.


커피 잔이 2 개, 간식 담았던 그릇이 두 개. 간식 그릇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아둔 과자 봉지. 무언가를 다 먹고 마시고, 부엌으로 가져다 놓는 일을 제때 하지 않는 습관이 엿보인다.


한 발 뒤로 물러나 보니, 요즘 새로운 작문 수업 커리큘럼 짜느라 모아놓은 자료들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초등학생 수업 자료와 중학생, 고등학생 수업 자료들이 뒤섞여 겹겹이 쌓여 있다. 각 학생의 수업이 끝나고 자료를 치우지 않고, 그 위에 다음 학생 수업을 위한 자료를 펼쳐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요즘 읽고 있는 책들이 두어 권 있고, 얼룩덜룩 손자국이 그대로 보이는 아이패드와 스마트 폰, 그리고 컴퓨터 스크린이 나를 마주하고 있다. 한쪽에는 올해 새 달력도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너무 오래돼서 더 이상 인터넷 연결이 안 되는 더 이상 쓸모를 찾지 못해 방치하고 있는 맥북도 한쪽 구석에 놓여있다. 배터리를 교체해야 하는 휴대형 키보드 - 스마트폰 타이핑 용도 -하나가 내 신경을 긁는다. 내 삶에 요긴한 것들에 충분히 감사하지 않고 사는 게 아닌가, 나의 관심, 나의 손길이 필요한 물건들을 내가 잘 돌보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를 돌아본다.


나는 오랜 시간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며, 정리 정돈에 통달한 편이라고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온 것이 무안해서 아차 싶다. 물건을 없앨 줄도 알고, 온라인 쇼핑을 멀리할 줄도 알고, 물건을 줄여 공간을 늘릴 줄도 알지만, 아직 시스템을 만들 줄 모른다. 아직 나 자신을 효과적으로 장기적으로 돕는 일에 서투르다. 나를 도울 줄 모르는 만큼 어지르는 것이다. 물건마다 가야 할 자리 설정이 필요하고, 물건을 꺼내고 다시 넣는 구체적인 시간 설정이 필요하고, 쓰레기통이 필요하다.


치우기보다 시스템을 구축하기


일단 없어도 되는 것을 치워본다. 작은 쇼핑백을 가져와 임시 쓰레기통으로 삼고, 과자 봉지를 버린다. 그다음엔 컵과 스낵 그릇을 부엌에 가져다 놓는다. 먹을 것, 마실 것을 책상으로 가져오기 전에,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쓰던 그릇이 있는지 먼저 확인하자고 스스로를 좋게 타이른다.


책상엔 꼭 필요한 볼펜 - 검은 펜과 삼색펜 - 두 자루만 놓고 싶다. 볼펜이 떨어질까 불안하면 책상 뒤 책장에 볼펜 여분을 위한 볼펜 꽂이를 하나 만들자고 아이디어를 낸다. 책상 위에 있던 두 개의 볼펜 꽂이병을 하나는 지금 쓰는 것, 다른 하나는 여분용으로 나누어 정리해 지금 쓰는 것이 담긴 꽂이병만 책상 위에 둔다.


다음은 책상 위의 수업 자료들과 프로젝트 자료들. 진짜 제대로 작동이 되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내가 한 사람 수업이 끝날 때마다, 5분 정도 시간을 내서 수업 시간에 사용한 자료들을 정리하여 책상 위가 아닌 다른 장소에 놓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로, 책상 위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 각 학생의 자료를 구분되게 둘 곳이 필요하다. 책장 위 빈 공간에 자료 둘 곳을 마련해서, 책상 위엔 내일 수업할 자료와 시간 날 때마다 작업 중인 커리큘럼 프로젝트 자료들만 남기고 정해진 각자의 자리에 치워놓는다.


오래된 맥북의 경우는 쓸모는 없는데 아직 살아는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그 운명을 결정하지 못해 쌓인 짐이다. 이 맥북의 활용방안이 있는지, 내일 시간을 내어 검색을 해 본 후, 최종 결정을 내릴까 한다. 내 마음이 명확히 정해져야, 물건을 둘 곳도 명확히 정할 수 있다. 키보드 배터리도 내일 갈기로 한다. 새 달력은 더 눈에 잘 띄게 해 편리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내가 앉는 자리 바로 옆 벽에 거는 것이 좋겠다.


내일 할 일들 리스트를 기록해서 컴퓨터 스크린에 붙여놓는다.



나를 위한 미니멀리즘


미니멀리즘 다큐멘터리 같은 프로에 나오는 미니멀리스트의 책상 같은 느낌은 결코 전혀 아니다. 하지만 책상 위에 필요한 것만 있어서 많이 편해졌다. 드디어 두려움이나 미련을 빼고 질서와 시스템을 구축하여, 내가 쓰기 편리하도록 나를 위한 책상이 되었다. 이제야 내 책상을 스스로 잘 정리할 줄 아는 어른이 된 기분이다.


결국 미니멀리즘은 나를 위한 것이다. 다른 미니멀리스트의 흉내가 결코 아니다. 나에게 맞는 나만의 방식을 구축해 가는 길이다. 나의 공간이 쾌적하고 편리해질 수 있도록 나를 돕는 과정이다. 나 스스로를 잘 도울 줄 몰랐던 어설픈 어른들이, 나를 돕는 법을 익히고, 소신을 세우고 단단해져 가는 성장의 길, 제대로 어른이 되어 가는 길이다. 특히 나처럼 제대로 자라지 못했던 구석이 많아 너무 많이 어설펐던 어른은 오래오래 걸어야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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