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위로하는 따뜻한 차 한 잔

[힐링 푸드 에세이] 내 마음을 먹여 살리는 밥

by 하트온

3년 만에 봄


일어나 보니 갑자기 스타가 되지는 않았지만, 일어나 보니 스타가 보입니다. 어제까지 밤하늘에 떠있던 별들이 일시에 땅에 강림하신 듯 사방에 별 같은 꽃들이 울긋불긋합니다. 누가 더 예쁘게 차려입나 봄처녀 내기하듯 꽃나무들이 너도나도 다투어 청순가련한 꽃망울을 터뜨려대니 운치 있는 분위기와 꽃향기가 불꽃처럼 터지는 낭만 축제가 열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4월 초순*이네요. 마치 길고 긴 겨울을 보내고 3년 만에 제대로 봄을 맞이하는 듯한 비장한 느낌이 밀려듭니다. 제 마음은 그동안 내내 겨울이었던 걸까요. 2020년 해가 바뀐 이후, 제 마음은 풀린 적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 세상의 변화에 대해 저는 잔뜩 굳어 마음을 놓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하루하루 일상을 잘 살아왔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밥도 잘 챙겨 먹고, 좋은 책도 찾아 읽고 글도 부지런히 쓰면서 마음을 다독이고 스스로와 가족을 돌보며 잘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변화가 뜬금없어 충격받은 만큼, 더 긴장했고 더 노력하며 내 내면을 내 삶을 챙겼던 거구나 뒤늦게 깨달음이 밀려옵니다.


모두가 마스크를 벗고 마음을 풀어도 저는 꽤 오래 그러지 못했습니다. 빨리 긴장하고, 늦게 긴장을 푸는 성격 탓이 아닐까 생각하면서 저는 뜨거운 차를 한 잔 끓이는 중입니다. 저처럼 잘 긴장하는 예민한 사람에게 차 한 잔의 여유는 일상의 터지고 긁힌 자리를 발라주는 연고 그 자체입니다.



차 한 잔의 역사


지금의 중국이 주장하는 대로 중국이 전 세계 문화의 원조였던 시절이 확실히 있긴 있었습니다. 당시 몹시 선진화된 문명국이었던 중국의 물자 기술 등이 유럽으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유럽은 실제로 중국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유럽으로 흘러들어 간 중국 문화 중 '차'는 몹시 귀하고 인기 있는 품목이었습니다. 17세기말 영국과의 무역 초기에 동인도회사를 통해 영국으로 건너간 차는 몹시 비싸고 귀해 왕실에만 바치는 진상품이었으므로, 왕족과 귀족들만 특별히 즐기는 최고급 음료라는 이미지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몸의 치료를 돕는 약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했다고 합니다. 차를 일상적으로 마시는 궁정 음료로 정착시키고 널리 퍼뜨린 일등 공신은, 본인도 차를 즐겨 마실 뿐 아니라 궁정의 손님들에게까지 차를 아낌없이 대접했던, 찰스 2세와 정략결혼으로 영국의 왕비가 된 포르투갈 왕가 출신의 캐서린 공주였다고 합니다. 마카오를 식민지로 두고 차를 직수입할 수 있었던 포르투갈의 경우 이미 귀족들이 차를 즐겨마시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었고, 그 포르투갈 문화를 그대로 들고 온 캐서린 공주의 등장은 영국 상류층 사교문화에 불어닥친 폭풍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국에 차 문화가 급속도로 번지면서 전국 방방 곡곡, 커피와 중국 차를 마실 수 있고 구매할 수도 있는 "커피하우스"라는 곳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고, 이는 동네 '인싸'들이 몰리는 사교장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차를 마시는 것이 고품격 요즘 대세 힙한 문화가 되었고, 상류층 여성들이 주도하는 티 파티 바람은 영국 전역을 휩쓸고 국외로까지 유행을 전파시켰습니다. 영국 귀족 사교 문화나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고급품을 은근히 선망하며 따라 하는 프랑스나 러시아 귀족들의 모습이 모파상의 '벨아미'나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니나' 같은 상류사회를 그린 소설에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더군요.


18세기에 접어들어, 이제 웬만큼 사는 집은 다 차를 즐겨마시게 되면서, 아침 식사 메뉴까지 토스트와 차가 기본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커피에 다채로운 재료를 첨가해 마키아또, 카푸치노, 모카, 아메리카노,... 다양하게 마시는 것처럼, 차 또한 기호에 따라 설탕, 우유, 크림을 첨가해서 다양한 방식으로 마시게 되었고, 하루에도 차를 몇 잔씩 마시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바람직하게 여기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차 문화는 계속 퍼져 나가, 마침내 손님 접대의 기본은 물론이요, 서민들의 삶에도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따뜻한 벽난로 앞에 예쁜 찻잔과 디저트로 멋들어지게 차린 티 테이블. 가족 지인들과 둘러앉아 달달한 밀크티를 즐기는 시간은 모두의 로망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낭만이 없냐며 무리를 해서라도 상류층이 마시는 고급 음료 고급문화 유행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열광은, 너도 나도 자신의 집 안으로 차 문화를 도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차는 국민 음료가 되었고, 떨어져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 되어버렸지요. 티 파티 사교는 이제 전국민적인 교양 문화로 자리 잡았으며, 오후 티 타임의 여유를 모르고, 손님에게 차 한 잔 대접할 줄 모르는 사람은 기본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쯤부터는 영국의 차 문화는 중국의 음료를 맛보는 차원이 아닌, 독특한 영국만의 스타일로 자리 잡았고, 영국을 대표하는 영국 고유의 문화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나를 위로하는 차 한잔


차 문화가 어느 나라에서 시작되어 어느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 전파시켰건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침 공복에 그리고 늦은 오후에 차 한잔으로 노곤한 몸을 깨우는 문화, 추운 겨울에 뜨거운 차를 손에 들고 사는 일상, 차를 앞에 놓고 담소를 나누는 사교가 제 삶에도 깊숙이 스며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억에도 없는 순간부터 몸이 차가운 체질인 저는 따뜻한 차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몹시 단조로운 직육면체 공간에 갇혀 지내는 감옥 같은 고등학교 생활, 인생 전체가 걸린 위험천만한 입시를 준비하는 긴장된 수험생활을 하면서, 저는 예쁜 카페, 각종 차와 다과가 차려진 예쁜 상차림을 마음에 떠올리며 그 희망으로 자신을 위로하곤 했습니다. 사람마다 힘든 시간을 견디며 고등학교를 벗어나면 해 보고 싶은 게 참 다양하고 많았겠지만, 저는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들과 모여 차를 나누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시간에 대한 간절한 욕구가 있었습니다. 때때로 지친 머리를 책상에 누이고 쉬는 시간에, 저는 그 온기와 향이 어우러지는 시간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사람들과 모여서 차 한 잔 함께 하는 그 욕구를 실컷 풀며 살아왔으니, 저는 꿈을 이루었다 할 수 있는 인생일까요?


오늘 저는 일상적으로 마시는 이 평범한 녹차에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의미를 부여해 보려 합니다. 수 세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왕족에게 바쳐진 진귀하고 이국적인 차라고 상상하며 뜨거운 차를 조금씩 음미해 봅니다. 처음 그들이 느꼈을 그 이질적인 느낌을 상상해 봅니다. 술이 아닌 음료를 나누는 일. 취해서 어울리는 게 아닌 맨 정신으로 나누는 사교.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 같습니다. 차 만드는 기술이 아직 유럽 사회에 알려지지 않았던 때, 신비롭고 세상 진귀한 무엇이라는 첫인상이 더욱 그 경험을 특별하게 했을 것 같아요. 이 따뜻한 차 한 잔에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했었다는 사실을 되짚어 봅니다. 중국과의 아편 전쟁의 계기가 되었고, '보스턴 티 파티'에서 바닷물에 던져지며 미국 독립의 불을 일으켰던, 결코 평탄치만은 않았던 그 차의 역사를 곱씹어 봅니다. 현대인에게 인기 있는 그릇 구성에, 미국 아이들의 티 파티 소꿉놀이에까지 스며있는 유럽 전체를 흔들었던 티 파티 사교 문화 대 유행의 흔적을 느껴봅니다.


저희 집에는 한국식 다도 세트도 있고, 서양식 찻잔도 있지만, 어느 쪽이건 전통 형식에 너무 얽매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찻잔 모양 딱 한 가지를 고수해야 할 만큼 그렇게까지 '틀'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마시는 방법도 있고, 저렇게 마시는 문화도 있고, 기분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 새롭게 달라질 수도 있다고도 저는 생각합니다. 즐기는 방법의 다양성 유동성을 인정하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싶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기억하고 싶어요. 지금은 모두가 편하게 누리는 것들이, 한 때는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특별한 일이었고, 쉽게 접할 수 없는 귀한 것이었음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야 내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지, 얼마나 발전된 사회, 지금 태어나 다행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처럼 자주 심신의 재충전이 필요한 사람은, 차 한 잔 마시며 늘어지려는 몸에 활력을 돋우고, 긴장한 마음을 풀어 주고 달래는 여유 있는 티 타임 문화가 더욱 특별한 혜택으로 다가옵니다. 마음을 위로하는 따뜻한 차 한 잔의 힘을 더욱 크게 느낍니다. 이 힘을 크게 특별하게 대단하게 느낄 수 있는 저 자신이 제 삶이 제가 살아가는 이 시간이, 지금 차 한 잔으로 녹녹해진 마음에 상당한 호감과 즐거움으로 다가옵니다. 참 괜찮은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23년 봄에 시작한 글을 오늘 드디어 완성해 올립니다.

**영국의 티 문화 관련 자료 출처: https://www.bbc.com/travel/article/20170823-the-true-story-behind-englands-tea-obsession

***대문 이미지 출처: Pixabay (by Myriams-F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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