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푸드 에세이] 내 마음을 먹여 살리는 밥
아는 사람만 아는 콩잎
샛노란 가을 단풍 콩잎을 따서, 소금물에 절인 후 된장 깊숙이 푹 묻어 놓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한 겨울에 꺼내먹는 콩잎 반찬은 정말 별미입니다. 제가 아주 많이 어렸을 때 시골 할머니집에서 처음 맛본 콩잎 반찬은 순식간에 제 미각을 사로잡고,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저의 인생 반찬이 되었습니다.
세 살 버릇만 여든까지 가는 게 아니라, 세 살 입맛도 여든까지 가는 모양입니다. 서울로 가고 미국에 오게 되어 콩잎을 못 먹어 본 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콩잎이 최애인 건 바뀐 적이 없습니다. 저는 언제나 노란 콩잎이 어느 집 된장독에서 발견되는 순간 맛있게 먹을 준비가 되어 있지요.
할아버지 등
저의 친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제가 다섯 살 때쯤 돌아가셨기 때문에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많이 없습니다. 엄마도 결혼하고, 얼마 겪어보지 못한 시아버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하시고요. 다만 시골에 사시는 할아버지가 부산 우리 집을 방문하셨을 때, 두 돌짜리 저와 갓 태어난 제 동생을 데리고 아기 돌보랴 밥하고 살림하랴 정신 못 차리는 엄마를 보곤, 엄마의 짐을 덜어주려 저를 업고 시골로 데려가 주셔서 감사했다는 말을 했어요. 할아버지 등에 업혀 사는 시대가 그때부터 시작된 모양입니다.
처음 시골에 도착했을 땐. 제가 많이 보챘다고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경남 진동 시골 동네엔 아직 과자나 식료품을 파는 슈퍼나 마트가 없었습니다. 도시에서 살던 저는 매일 그렇게 도시에서나 사 먹을 수 있는 과자와 과일을 노래 불렀다고 합니다. 집 앞 점포에서 매일 같이 아빠가 출근길에 주시던 동전으로 사 먹던 초코파이와 새우깡, 아이스크림, 트럭 과일 장수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와 확성기에 대고 노래를 불러가며 파는 참외며 딸기가 간절히 생각났겠지요. 할아버지는 도시에 나간 자식이 부쳐준 과자나, 읍내에서 사 온 간식거리가 있는 집이 있는지 저를 업고 동네 집집마다 돌아다니셨어요.
저는 그 후로도 몇 번을 몇 달씩 시골에서 도시로, 도시에서 시골로 옮겨 다니며 살았어요. 그러는 사이, 저는 시골 음식 맛에도 차츰 길들여졌던 모양입니다. 도시에 살 때는, 갑자기 콩잎 반찬이 너무나 먹고 싶어 엄마를 졸랐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한 번은 엄마와 함께 콩잎을 한 번 찾아본다고, 동네 시장에 나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 종류 장아찌 반찬을 늘어놓고 파는 반찬 가게에서 콩잎이라고 파는 것을 찾아서 사 왔습니다. 이름은 콩잎인데, 너무 세고 짜고, 어린 마음에도 이 맛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마침내 명절이 되어 시골에 가는 날이 왔습니다. 시골에서 콩잎 반찬 먹을 기대를 잔뜩 하고 갔는데, 마침 콩잎이 똑 떨어졌던 모양입니다. 명절 음식을 만드느라 분주한 할머니는 이 많은 음식들을 다 마다하고 어린 손녀가 콩잎을 고집할 거라 생각도 못하셨지요.
그날도 할아버지는 저를 등에 업고 나섰습니다. 할아버지 등에 업혀 이집저집 다니며 혹시나 콩잎 반찬을 찾을까 몹시 기대했었던 마음이 기억납니다. 밤공기가 추웠지만 할아버지의 등은 따뜻했고, 밤하늘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캄캄했지만, 저는 큰 별 하나를 안고 있는 것처럼 환하게 느껴졌습니다. 콩잎을 가진 집은 없었지만 더 이상 고집부리던 마음은 없어지고, 이상한 마음이 밀려왔어요. 최초로 느낀 '미안함'이었던 것 같아요.
"할아버지 다리 많이 아프겠다."
내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할아버지에게 이 말을 했다고, 할아버지는 천재 신동을 만난 듯, 두고두고 할머니와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어요.
이제는 할아버지 얼굴도 목소리도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할아버지 등의 기억은 여전히 살아있어요. 그 등에 그토록 오래 매달려 다녔기 때문일 거예요.
웃으면서 쓰다듬어 주거나, 귀엽다고 직접 말해 주지 않아도, 사랑은 등으로도 다 표현된다는 것을 할아버지 덕분에 알게 되었습니다. 가슴으로만 사람을 품는 게 아니라, 등으로도 충분히 따뜻하게 품어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등에 붙어 보냈던 그 시간이 지금도 저를 특별하고 큰 사랑을 받은 존재라고 믿을 수 있게 도와줍니다.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사시다 간 할아버지지만, 제 마음에 깊이 새겨진 할아버지의 따뜻한 등은 오래오래 함께 있을 거예요.
내 마음을 먹이는 콩잎 밥상
제 마음은 다시 그 시간, 그 시골 마을로 달려갑니다. 창호지 바른 문과 대청마루 쪽마루가 있는 오두막집이 옹기종기 모여있던 그 마을, 앵두나무가 있고, 소가 한 마리 매어져 있던 그 마당. 그 마당 입구의 사랑채. 그 사랑채에서 담배를 피우며 글을 쓰고 책을 읽던 할아버지. 마당 한쪽에 가지런히 정리된 장독대. 장독 안엔 된장과 간장, 김치가 있었을 거예요. 집 가로 흐르는 도랑은 가재가 살 수 있을 만큼 깨끗했고요. 할머니와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오는 길에, 도랑에서 가재를 잡아 된장찌개를 끓여 먹고, 도랑 옆에 무성하게 핀 호박잎도 한 줌 따와서 쌈을 해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참외와 딸기는 없지만 시골에 많이 있던 자두와 앵두, 그리고 산딸기, 가을이면 풍성하던 감과 밤. 장이 설 때나 멀리 나가서 사 오는 귀한 과자와 사탕. 그 날들, 그 순간들의 시골 기억이 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저는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나를 위해 차려주신 내 입맛에 맞춘 콩잎이 있는 밥상이 제 마음속에 영원히 차려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밥상은, 자꾸 더 많이 뭘 해야 하고 가져야 한다는 도시의 욕망에 지친 내 영혼을, 나로서 충분했던 기억, 충분히 사랑받았던 기억으로 영혼을 먹이고 어루만져 줍니다. 그러면 내 마음은 한없이 편안해져 따스한 할아버지 등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안온하고 안전한 잠 속으로 빠져듭니다.
대문 사진 출처: Pixabay (by dldusd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