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우정 김떡순 친구들

[힐링 푸드 에세이] 내 마음을 먹여 살리는 밥

by 하트온

제 마음에 지금 김밥, 떡볶이, 순대, 김떡순 한상이 차려져 있습니다. 알록달록 신선한 재료가 꽉꽉 알찬 김밥, 말랑말랑 매콤 달콤한 떡볶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야들야들한 순대,... 진한 어묵 국물과, 바삭 쫄깃 김말이까지 가세하면 세상 남부러울 것이 없는 완벽한 한 상이 될 테지요.


저는 김떡순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임신을 했을 때 간절했던 음식도, 향수병이 도질 때 애타게 찾던 음식도, 항상 김떡순이었어요. 이태리에 피자 먹으러 다녀오는 여유를 부리듯, 지금 당장 한국 음식 먹으러 날아간다 해도, 제가 가장 먼저 찾을 식당은 분식집이며, 시킬 음식은 김떡순입니다. 이렇게 김떡순에 대한 저의 사랑은 확고합니다.


김떡순은 학창 시절을 함께한 동무입니다. 그때는 한상에 같이 펼쳐 놓은 친구들이 얼마나 중요했는지요. 그들을 얼마나 의지했는지요.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 그들은 나의 구글이었고, 스마트폰이자, 넷플릭스, 유튜브였습니다.


중고등 학교 시절의 나를 생각해 보면, 말 그대로 '이불 킥' 장면들만 주르르 떠오릅니다. 어찌 그리 바보 같고, 어리바리했을까요. 세상은 이해가 되지 않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습니다. 중간고사 준비란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 체, 친구 따라 처음으로 독서실이라는 곳엘 가서, 다른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불안만 한가득 마음에 얹어 왔던 기억이 납니다. 갓 중학생이 된 여자 아이들이, 잠 오는 걸 막아주는 약이 있다며 '각성제'를 들먹거리고, 전교 1등은 누가 할 것이라고 수군거리던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어떻게 누가 먼저 찾아들어갔는지 첫 기억은 흐릿합니다만, 제 기억 속의 우리들은 학교만 마치면 학교 앞 분식집에 달려가 앉아 있습니다. 가방 안에 꼬깃 접은 용돈을 모아 떡볶이 순대 김밥을 시켜놓고 함께 둘러앉아 먹던 그 시간. 우리들의 우정은 참 어설프고 미숙했지만, 우리 앞에 놓인 그 음식들은 참으로 완벽했고 맛있었습니다. 아주머니들이 마법처럼 지글지글 뚝딱 완성해 주시던 음식들은 우리를 매일 그곳으로 불렀고, 그 맛의 기억은 초고속 열차처럼 그 시간으로 나를 단숨에 데려갑니다.


우리들의 우정은 어찌나 보잘것없던지요. 의리도 인내심도 몹시 부족했던 그 관계들은 쉽게 토라지고 하찮은 일로 말다툼하고 하루종일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기도 하고, 반이 달라지면 서로를 쉽게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도 아닌 그깟 시험 점수 때문에 서로와 비교하고 질투하며 때론 마음에 미움 시기가 싹트는 것을 느끼며 고통스러워하기도 했어요.


이런 관계들은 길바닥 모래알처럼 세상 도처에 널려 있을 거라 믿었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한때 친했던 존재들이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면 빠져나가는 대로 아쉬워하는 마음 없이 우리들은 각자의 길로 모래 바람처럼 흩어져 날아갔습니다. 시시때때로 그때 그 시절이 그립고, 친구들이 궁금한 마음이 밀려와도, 어릴 적 미성숙했던 시절을 굳이 찾아내, 케케묵은 시간이 쌓아 놓은 무안하고 머쓱한 공기를 풀썩거릴 마음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나이 50을 코앞에 둔 저. 제 안에 멈추어 있던 그 기억들이 전혀 다른 색채를 띄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때의 그 김떡순 친구들이 참 고맙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옵니다. 그 친구들이 항상 내 곁에서 밥 먹고, 하굣길을 같이 걸어주고, 분식집에도 함께 가 주었구나 깨닫습니다. 그게 참 고마운 일이었구나 뒤늦게 정신이 퍼뜩 듭니다. 나와 함께 먹어주고 걸어주고 시간을 보내는 존재에 대한 고마움을 이제야 깨닫는 저는 아직도 참 바보구나 싶습니다. 아직도 미처 다 모르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게 얼마나 많을까요. 가늠도 되지 않는 저의 무지 앞에서 마음이 아득해집니다.


그때의 삶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사랑과 보호 속에 있었던 것인지도 이제야 깨닫습니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도시락을 싸주고 입고 갈 옷을 준비해 주던 이의 마음과 정성, 매일 밖으로 나가 대식구 먹을 밥값을 벌어오던 이의 희생과 노력, 착한 값에 착한 재료로 배고픈 여학생들의 허기를 달래주었던 착한 마음들,...... 감사할 일들 천지였는데, 그것을 이제야 조금씩 마음으로 실감하고 있는 중입니다.


다행히 아직 김떡순을 함께 사랑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한국 가게 하나 없는 남프랑스 시골지역에서 5년간 유학을 했던 제 절친도, 가장 그리웠던 음식은 김치도 갈비도 아닌 김떡순이었다고 합니다. 큰 기관에서 무거운 직책을 맡고 가끔 티브이에 전문가 박사님으로 출연하는 그녀지만, 길을 가다 출출할 때 혼자서라도 김떡순 한 상을 차려놓고 먹는 버릇은 없어지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지금까지 연락하는 절친들은, 수없이 많은 김떡순 동지들을 잃어버린 후에야, 친구에게 제대로 예의를 갖추고 오래 관계 맺는 법을 익혀 겨우 잃지 않고 지킬 수 있었던 우정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 가치가 배로 높아져 가는 저만의 무형 문화재 보물 재산입니다.


김떡순은 서로 달라야 제맛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함께 있어야 참맛이지요. 김밥을 떡볶이에 찍어 먹고, 떡볶이를 순대 위에 얹어 먹어야 하니까요. 순대의 느끼함을 담백한 김밥이 편안하게 잡아주고, 자칫 무료해지기 쉬운 단조로운 김밥을 매콤한 떡볶이가 화려하게 북돋아 주어야 하니까요. 김밥과 떡볶이가 채우지 못하는 순대만이 가진 담뿍 밴 고기 향이 주는 든든함이 있으니까요. 친구란 서로 몹시 다른 존재들이면서도, 그래도 함께 둘러앉아야 채워지고 완성되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함께 둘러앉아 김떡순 한 상을 펼치고 싶은 사람들, 그들은 참 고맙고 귀한 친구들입니다.



대문 사진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dreamingkm&logNo=150170750454&view=img_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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