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성장 에세이] 내가 믿었던 거짓말들
우리가 잘 아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 주인공, 쟝발쟝은 태어나서부터 40이 넘을 때까지 멀쩡한 사람 미치고 팔짝 뛰다 못해 인간 이하의 괴수로 돌변하게 만들 지경으로 인생이 지독히도 안 풀린 사람이었다. 누가 작심하고 아파봐라 죽어봐라 시궁창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 또 치는 것만 같다고 느꼈다. 거기서 빠져나오려 아무리 애를 쓰고 발버둥 쳐도, 그는 모두가 혐오하고 경멸할만한 밑바닥 삶에서 결코 조금도 더 나아져서는 안 된다는 듯 세상이 합심해서 죽자고 떠밀고 또 떠밀어 주저앉혔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그를, 결혼한 누나가 데려다 키워주지만, 누나 또한 남편을 일찍 여의고 어린아이 일곱을 혼자 먹여 살릴 일이 막막한 상황에 처해 버렸다. 굶주린 조카를 위해 빵 하나 훔치려다 잡힌 쟝발쟝은, 무려 19년 동안 춥고, 더럽고, 인간의 존엄성이란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이 무시무시한 19세기 프랑스 감방 생활을 해야 했고, 그가 감옥, 그 영겁 같은 시간 속에 꼼짝 못 하고 갇혀 고통당하는 사이, 누나와 조카들은 뿔뿔이 흩어져 행방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감방에서 나왔을 때도, 사회는 그를 받아주기는커녕 의심하고 혐오하고 배척하기만 했다. 미리엘 주교를 만나 은혜를 입고 내면에 다시 하늘로부터의 빛이 스며들어와 다시 선함과 성스러움을 싹틔우기 시작할 때까지, 그는 뭐든 훔치고 뺏을 준비가 된, 원한과 분노에 사무친 악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개과천선한 쟝발쟝이 불법으로 거주지를 바꾸고 이름과 신분을 속일지언정, 돈 잘 버는 기업 사장이 되고, 한 도시의 존경받는 시장이 되고, 점잖은 옷차림에 태도를 갖추고 '번듯하게' 일어서는 모습을 보며 독자들은 얼마나 안도하고 열광했던가! 그가 그렇게 많은 돈을 모아, 비참하고 억울한 짧은 생을 살다 간 팡띤느의 딸 꼬제뜨를 학대에서 구하고, 그녀의 아버지가 되어 예쁜 정원이 딸린 집에서 두 사람이 의지하며 일하는 사람 따로 두고, 주변 불우한 사람들을 돕기까지 하며, '번듯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자랑스럽고 흐뭇했던가!
이 마음이 바로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에게 '번듯한 인생'을 요구하는 마음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끊임없이 이 한반도를 넘보는 세력들의 침략을 당해왔고, 기득권 적폐 세력의 부당한 착취 아래 해마다 보릿고개 찢어지는 가난에 시달려 왔으며, 일제 압제와 한국전쟁, 전쟁 후의 가난한 물자, 군부 독재, 아이엠에프,... 무너질 대로 무너진 나라는 외세와 부정부패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너무나 어려운 시간을 겪어왔다.
쟝발쟝이 살아남기 위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수치스러운 도형수 신분을 세탁하고 부를 축적해야 했던 것처럼, 우리 조상들은 스스로의 삶을 일으켜 성실하게 교육 제대로 받고, 가난하고 못 배워 식민지 노예 취급 당하고 쉽게 학살 대상이 되었던 비천했던 운명을 세탁하여 번듯하게 떵떵거리며 살아가라고 대대손손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 뼛속에 새겨진 한국인의 정신이 되었다. 아직도 그 욕구가 우리 모두의 관념 속에 남아, 전 세계를 향해 대한민국이 선진국 대열에서 보란 듯이 잘 사는 걸 보여주고 싶고, 인정받는 세계 최고가 되고자 끊임없이 영혼을 갈아 넣는 노력을 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이류 삼류가 아닌 일류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민족정신이 키워진 것인지 모른다.
이 관념은 우리의 언어 속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여봐란듯이 살아야지.
남보란 듯이 잘되어야지.
번듯한 직장 잡고 번듯한 집도 사야지.
남들 하는 거 다 하고 살아야지.
대학 간판은 따고 봐야지.
이왕이면 알아주는 일류 대학, 직장 다니고, 알아주는 명품 사야지.
귀티 나고 부티나는 사람 되어야지.
문제는, 이렇게 남 부럽지 않게 번듯해지는 결과에만 너무 집중하다 보니, 삶의 과정이라는 가치를 무시하는 급한 사람들이 너무 많고, 옳은 길로 바르게 가고자 하는 윤리와 도덕마저도 내팽개치고 '모로 가는' 사람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주변에 나보다 더 잘 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두렵고, 조바심 나는 마음은 도저히 상대가 나보다 더 앞서 가는 걸 참을 수 없는 시기 질투로 이어지고, 그런 마음은 쉽게 절망하고 불행해져 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불행의 씨앗은 우리가 읽었던 전래동화 곳곳에 박혀 있기도 하다. 누가 나보다 잘되거나, 하나라도 더 가지면 내가 기죽고 배 아파 잠 못 자는 이야기, 남보다 더 높게 신분 상승 이루고 번듯하게 호령하며 살겠다고 아등바등 애쓰는 이야기, 상대의 삶이 나보다 더 나아지지 못하게 하려고 갖은 술수를 부리는 이야기, 착한 이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 궁궐에서 생선 고깃국에 흰쌀밥 먹고 하인들 여럿 부리고 살게 되고, 악인은 가진 것 몽땅 뺏기고 부러워 배 아파 죽는 장면이 해피 엔딩인 이야기들로 넘친다.
남들이 보고 대단하다 여기고 인정할만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 반만년 역사를 타고 흘러 내려와 우리 뇌리에 끊임없이 주입되었다. 나 또한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모두 종합해 보면, 번듯한 대학 번듯한 직장에 다니다가 번듯한 사람 만나 결혼해야 한다였고, 결혼해서 시부모님이 당부하신 말씀의 골자 또한, 번듯한 집을 장만해 번듯하게 꾸며 놓고 번듯한 상차림을 하고, 번듯하게 두 명 이상 자녀를 낳아서, 그 아이들도 번듯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 잘 시켜 키워내라는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놈의 '번듯하게 살기'가 내 안에 들어와서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명문대 들어가기, 이름만 대면 아는 직장에서 일하기, 그런 직장에 다니는 남자 찾아 결혼하기라는 구체적인 실행 명령으로 번역되었고, 그 명령이 내 10대 20대의 가녀린 어깨를 무지막지하게 짓누르며 그토록 푸르렀던 시간과 에너지를 다 잡아먹은 거대한 숙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번듯하게 살기'를 죽을 때까지 열심히 실천해 내고 장례식까지 온갖 명문 집단이 보낸 화환을 받아 전시하고 번듯한 성공을 자랑하며 생을 마무리하는 사람들도 세상엔 많이 있다. 처음엔 부모를 위해, 나중엔 자식과 후손을 위해 '번듯한 삶'을 위해 노력했으리라. 평생 그런 번듯한 삶을 사는 것이 보다 쉬운 선택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성향상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고가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이 자신을 위해 혹은 누군가를 위해 무슨 선택을 어떻게 했건, 나는 그 삶에 대해 참견하고 훈수를 둘 의도가 없다. 남보다 나의 선택이 더 옳다고 주장할 근거나 타인의 삶을 평가할 의지는 더더욱 없다.
다만, 나는 그렇게 계속 살 수가 없더라는 것뿐이다. 나는 30대에 접어들자마자, 더 이상 보여주기식 삶을 이어갈 수 없었다. 아이들을 낳고서 너희들도 앞으로 '번듯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건 나를 아프게 했던 거짓말이라는 걸 확실히 깨닫고 있었고, 그 '번듯하게'를 버리고 자유로워진 내면의 힘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으므로, 아이들에게 억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외식'이 바로 끝도 없이 '남보기에 번듯함' 만을 추구하는, 간판 따고 포장하는 일에만 열심인 위선적 삶이라는 깨달음이 내 마음 내 삶 깊숙이 번져나간 후였다. 그때쯤 미니멀리즘이 다가와, 나에게 남들에게 보여주고자 이고 지고 사는 무겁고 쓸모없는 것들은 죄다 버리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오히려 내가 정말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살면 더 행복하고 자유롭게 원하는 방향으로 더 가벼운 발걸음으로 신명 나게 나아갈 수 있다고, 나를 도우려는 의도가 분명한 지혜의 말을 들려주었다.
이미 나는 모범적인 삶에서 탈선을 시작했지만, 그것이 크게 주변 사람들에게 드러나기 시작한 건 자녀가 어느 정도 크고서부터였다. 남들에게 보여줄 만한 삶을 만들어 가는 일을 조금도 하지 않았고, 자녀에게도 강요하지 않았다. 부모도 시부모도 이해할 수 없는 말도 안 되는 '홈스쿨' 같은 선택들을 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모두를 기함시키고 우리 가족을 '내 논 자식'으로 여기도록 만들기에 이르렀다. 지금은 잔소리하기도 귀찮으신지, 경조사를 빌미로 만나면, 조용히 밥만 먹고 헤어지는 상황이다. 내 학창 시절 내내 육성 회장 활동 하며 정기적으로 학교에 기부하고, 아픈 자식 업고 달려가 학교에 충성하게 하여 개근상에 우수 모범생 표창장을 다 쓸어 받게 만든 부모님이 손자 학교까지는 신경 쓸 수 없고, 유명 헝가리 음악가를 초빙해 싫다는 자식 억지로 피아노에 바이올린을 몇 년씩 시키셨던 시부모님이 손자들까지 닦달할 기력은 없으신 것이다.
결국 주변 사회가 환호하고 선호하는 사람은 될 수 없었지만, 내가 환호하고 선호하는 자신이 될 수 있었다. 평가하고 서열 매기는 외부기준 남의 시선이 가득한 무대를 벗어난 삶은 처음엔 난감하고 아득했지만, 점점 자유롭고 상쾌한 자연의 건강한 공기를 즐기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자연과 맞닥뜨려본 적이 없고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관객들이 앞에 가득 차 있는 작은 무대가 부담스럽고 괴로울지언정 더 안전하고 편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선을 차단할 수 있는 나만의 소신을 일구어 내면 아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더 큰 세계를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신나는 자유가 펼쳐진다.
번듯한 삶을 잘 만들어 가는 사람 모두에게 그 삶을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고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일이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면 정말이지 아무도 간섭할 필요 없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다.
다만, 나는 번듯한 삶을 만들어 가는 일이 고통스럽고 버거워 숨이 막히고 죽을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꾸역꾸역 견디고 있는 사람에게 꼭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번듯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그 바람은 힘들고 가난하고 비천했던 역사, 그 수치스러운 시간을 잊고 성공하는 삶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욕망이며, 남부럽지 않고 기죽지 않는 삶을 이루고 나도 보란 듯이 잘 살 수 있는 걸 만인 앞에 증명하고픈 우리 부모님들의 버킷리스트였을 뿐이라고. 내가 그들의 욕망 버킷리스트 꿈을 이루는 존재로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반드시 남들처럼 남들 하는 거 다 하며 남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그 거짓말을 버리고 마음껏 자유로워져도 된다고. 남 앞에 증명하고 보여주려고 요란을 떨어야 하는 삶 대신, 남 모르는 남과 동떨어진 "월든 호숫가"에서 조용히 소박하게 내 삶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도 된다고. 나 다운 삶, 내 속도에 맞는 자유로운 삶을 찾아내면, 지금 당신이 과도한 기대와 스트레스에 떠밀려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행복을 분명 되찾을 수 있으니 아직 섣불리 절망하지 말자고. 나는 당신이 '번듯하게'를 과감하게 속시원히 던져 버리고, 마침내 찾아낼 당신 다운 소신과 그 소신이 만들어갈 설레는 일상과 미래가 몹시 기대가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