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성장 에세이] 내가 믿었던 거짓말들
<목걸이>라는 단편 소설 작품으로 유명한 19세기 프랑스 사실주의 작가 기 드 모파상의 작품 중에는 <벨아미>라는 장편 소설이 있다. 소설 제목 '벨아미'는 '잘 생긴 친구'라는 뜻으로 남자 주인공, 조르주 뒤루아를 칭하는 별명이다. 매력적인 외모를 가진 젊은 청년 조르주는 원래 가난하고 무식한 시골마을 출신에다, 군인으로 프랑스 식민지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복무하며 아랍사람들을 상대로 강도질과 약탈을 일삼던 무뢰한이었다.
조르주는 군을 제대하고 파리에서 저임금 노동을 하며 빠듯하게 살아가던 중, 우연한 기회로 옛 동료의 도움을 입어 19세기 떠오르는 최고 커리어, 돈과 힘이 따라오는 전문직, '신문사 기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한다. 그를 바닥 하류 인생에서 유명 신문사 기자 수준으로 끌어올려 준 친구 덕분에, 그는 상류 사회 인사들과 어울릴 기회를 얻는다.
이미 여자들이 자신을 보면 금세 반해 어떤 도움이든 주고 싶어 안달이라는 걸 잘 아는 조르주는, 상류층 여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번 돈을 몽땅 털어 멋진 옷을 사 입고는 친구를 통해 만나게 된 귀족 부인들과 양다리 세 다리 불륜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그는 그 여자들과의 관계를 이용해 신분상승과 재산 마련 그리고 원하는 만큼 쾌락을 즐기는 데까지 성공가도를 달린다.
하지만 결코 만족을 모르는 조르주는 아무리 위로 올라가도, 항상 별 볼일 없는 인사들이 자신보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많이 누리고 사는 격분할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저 멍청이들만큼은 누려야 하지 않겠나 욕심은 점점 커져가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방법은 점점 더 교활하고 뻔뻔해져 간다.
자신을 도와준 친구였지만 부인 잘 만나 그 자리를 지키는 게 아닌가 은근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하던 차에, 마침 친구가 병으로 단명하자 조르주는 그 친구의 아내와 결혼을 해버린다. 그녀의 도움을 입어 더 이상 일반인 조르주 뒤루아가 아닌, 귀족 '뒤 루아 드 캉텔 남작'으로 신분 상승까지 이룬다. 하지만 자신의 아내가 된 여자를 사랑할 수도 신뢰할 수도 없는 조르주는 그녀의 재산만 뺏고 갈라선다. 결국은 북아프리카 식민지 전쟁 소식을 주물러 주식 사기로 엄청난 재산을 마련한 대갑부 신문사 사장의 재산을 시기하기에 이르고, 자신도 같은 수준의 재산을 가질 방법을 궁리한 끝에 그 딸과 - 그녀의 어머니와 불륜관계였음에도 뻔뻔하게 -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고야 만다. 조르주는 결혼식을 하는 그 순간마저도 자신의 아내 될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불륜 상대 정부의 매력을 생각하며 - 조루주는 이 결혼으로 끝이 아니며 끝없이 쾌락과 야망을 좇으리란 걸 암시하는 장면으로 생각된다 - 이렇게 소설은 끝이 난다.
조르주는 한마디로 여자 마음을 사로잡아 제 욕망의 도구로 이용하는 영악한 파렴치한이다. 조르주는 기 드 모파상 작가를 가장 많이 닮은 주인공이라고 하며, 작가가 가지고 있던 여성에 대한 혐오와 여성을 도구화하는 비뚤어진 시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인물이다.
나는 소설의 첫 부분, 조르주가 처음 느꼈던 욕망과 분노가 인상 깊었다. 기자가 되기 전 적은 돈을 가지고 하루하루 버텨야 했던 조르주는 그 더운 여름날에도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음껏 마실 수 없고 그 좋아하는 여자들과도 원하는 만큼 놀아날 수 없는 신세를 한탄했다. 욕망은 가득한데 그걸 충족할 길이 없으니 욕구불만족이 극에 달에 있었다. 파리시내를 쏘다니다 그는 더 부유한 신분의 사람들이 카페에 느긋하게 앉아 시원한 음료를 마음껏 마시며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자들과 어울리는 걸 보고 화를 낸다.
돼지 같은 것들!
자신이 누리고 싶은 것을 누리는 바로 그 존재들에게 몹시 화가 난다. 그가 그 순간 느낀 것은 지독한 시기심이었다. 시기심은 타인의 소유에 대한 단순 질투심을 넘어선 상태, 자신이 가져야 할 것을 자격 없는 타인이 가졌다는 사실에 극심한 분노에 이른 마음 상태다.
조르주가 아무리 신분이 높아지고 많이 가져도 불행한 이유는 바로 이 걷잡을 수 없는 '시기심' 때문이다. 어떤 위치에 이르건 그는 주변 사람들이 누리는 걸 저도 누리기 위해 열심히 돈을 탕진했으므로,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는 생활이 계속되었으며, 자신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누리는 사람을 보면, 자신이 가진 것이 부족하다는 결핍감이 더 크게 들고, 저 사람이 저걸 누릴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끝없이 화가 났다. 그 분노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저 사람과 똑같은 걸 가질 방도를 찾도록 그를 몰아갔다. 소설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 저 정도 사회적 위치에 도달했으면, 그 잘생긴 얼굴로 저 좋다는 괜찮은 여자와 저 안락한 집에서 멋지게 사랑하며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의 세계는 결코 그가 만족할 만큼 충분해지지 않는다. 항상 자신이 가진 것보다 욕망은 더 크게 자라나 있다.
조르주만큼 신분상승이나 재물에 대한 욕망이 컸던 건 아니었지만, 생각해 보면 내가 10대 후반부터 20대 내내 불행하다고 느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내가 성취한 것보다 항상 더 크게 자라나 있는 욕망'이 문제였다. 그 욕망을 키우는 메시지가 있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어딜 가나, 중간은 가야 한다
얼핏 보면 중간 정도 하겠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만 갖추면 최고 자리까진 욕심내지 않겠다는 소박한 바람 같지만, 실은 어떤 자리에서건 뒤쳐져 무시당하는 입장에 처하지는 않겠다는, 항상 주류와 발맞추어 달리겠다는, 남들 하는 만큼은 하겠다는 의지 충만한 야심이 숨어있다. 그 야심은, 벨그래프의 가장 가운데 부분, 가장 사람이 많은 곳에 있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며 대세이며 안전하다는 확고한 믿음에서 태어난 발상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믿고, 믿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아래와 같은 말들을 수없이 들으며 자랐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나대지 마라
튀지 마라
몸 사려라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이룬 곳 한 중간에 튀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만 같다. 내가 평범한 한국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한, 삼성 엘지가 잘 나가고, 김연아 BTS가 1등 하면 내 이미지도 덩달아 좋아지는 것만 같다.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지는 노력, 한가운데 속하는 노력만 하면, 달리 내가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집단이 함께 굴러가는 보편성 대세의 힘 위에 군림할 수 있는 것만 같다.
문제는 우리의 시선은 항상 내 주변의 가장 잘난 사람들을 주류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요즘 세계인들에게 먹히고 우리 자신이 용납할 수 있는 평범한 한국인의 모습이란 건, 아이돌 같은 외모에, 드라마 주인공 정도의 로맨틱한 조건은 다 갖춘 평범이다. 그 보편성, 그런 '중간'을 추구하는 길에 서 있는 한, 내가 아무리 가만히 있고 싶어도 같은 길에 서 있는 주변 사람들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요즘은 다들 ** 정도는 하던데
야 넌 아직도 ** 안 하냐?
** 모르면 뒤떨어진 옛날 사람이래
부모님이 말씀하신 '중간은 가야지'도, 반 전체에서 중간 등수를 하라는 뜻이 결코 아니었다. 가급적 잘하는 친구들 틈에 섞이라는 것이며, 공부 잘하는 친구들이 가는 학교에 나도 휩쓸려 진학하고, 선후배 동기들이 취직한 대기업 비슷한 곳에 나도 취업해야 한다는 뜻이다.
조르주가 군대에 있을 때는 그 수준 사람들 가운데 남부럽지 않게 누리면 되는 것이어서, 식민지 사람들을 대상으로 뺏고 괴롭히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리에 와서 보니 말할 수 없이 낮은 수준에 속하는 형편없는 자신의 처지와 입지에 분노가 일었다. 자신이 볼 때 별 것 아닌 저 '돼지들'이 누리는 만큼은 자신도 누려야'만' 했다. 최소한 저 카페에 끼어 앉아 마시고 싶은 만큼은 목을 축일 수 있어야 했다.
나 또한, 내 주변 사람들이 해내는 일은 나도 다 해내고 봐야 했던 것 같다. 대학에 가고, 대학원에 가고, 유학도 가야 했다. 내 눈에는 그런 학업 과정이 결코 최고의 소수들이 누리는 특별한 것이 아닌, 너도 하고 나도 하고 웬만한 범인들이 다 하는 '중간은 가는' 일처럼 느껴졌다.
조르주처럼 시선이 자꾸 위로만 향할 뿐, 아래를 내려다보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러니 만족도 없었고, 감사도 없었다. 끝없는 사다리 타기에 몰두하는 일 외에, 내가 진짜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도 없었다. 항상 내 앞에 앞서 달리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조급한 마음이었고, 마음에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모두가 그렇게 사는 것 같고, 모두를 따라 중간은 가야 한다는 생각에만 깊이 빠져 있었다.
항상 무리의 중간에 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의심하기 시작했던 건, 미국에 와서 'herd mentality'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였다. 이 용어는 사람이 자기 소신을 바탕으로 개별적인 판단이나 결정을 내리는 대신 주변 사람들의 행동이나 의견을 따르는 집단 심리 및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말이다. 쉽게 말해, 뭐든 혼자 결정하기보다 괜찮아 보이는 옆 사람을 따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내 마음 상태를 설명해 주는 용어였다. 주변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하거나 혼자 튀는 걸 좋게 보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자라며, 늘 주변 사람들 눈치를 보고 집단 분위기에 맞춰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나의 내면에 새겨놓은 '집단주의 마인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마인드가 나에게 오랫동안 혼란에 빠지게 하는 고통을 주었으므로 나는 이 또한 벗어나야 할 거짓말로 분류하고 나를 분리시키려 애를 썼다. 그 사고의 강박에서 빠져나온 순간 나는 깨달았다. 지금까지 나를 잃어버리고 주변 사람들을 따라 뛰어다니느라 열매 없이 피곤하기만 한 시간을 보냈다는 걸 말이다. 나는 우선 나를 되찾아야만 했다. 나를 천천히 관찰하면서, 내가 독서와 글쓰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사색과 성찰에 진심인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나의 기호 성향이 어릴 때 분명하게 두드러졌었는데, 나의 본성 대로 나아갈 길이 언제부턴가 완전히 막혀버렸던 것이다.
지금 내 앞에는 아무도 없다. 남이 가는 길을 따라 뛰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내 삶은 몹시 고요하고 차분하다. 처음 한동안은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것에 자주 불안해지기도 했었다. 외롭다는 착각도 종종 밀려왔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중간에 껴서 가야 한다는 생각이 퇴색할수록, 나 자신의 소신이 강해질수록 불안감은 잦아들고 안정감이 커져나갔다. 외롭다는 생각이 점점 물러나고, 전에 맛보지 못했던 가슴 시원한 자유와 설레는 행복감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전에 살았던 삶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남의 나무를 기웃거리는 삶, 하루 종일 아무리 뛰어다녀도 열매와 보람이 전혀 느껴지지 않던 삶이었다면, 지금의 삶은 나의 나무를 키우며, 모든 것이 성장 과정이고, 모든 결과가 열매가 되는 삶이다. 나의 나무가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보는 과정 자체가 삶의 의미이며, 때때로 무너지는 일이 생기고 남의 눈에 실패처럼 보이는 상황이 생기더라도 바로 이 자리 내 땅 내 길 위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을 알기에 나를 잃고 혼란에 빠질 두려움이 없다.
남의 나무만 무성한 '중간'을 과감히 떠났기 때문에, 나의 땅을 찾고 그곳에 나의 나무를 심고 키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험한 '중간'이란 건 극심한 혼돈과 고통과 인생 낭비를 부르는 허상에 불과했다. '남들 하는 만큼 중간은 가야 한다'는 말을 모두가 쉽게 당연하다는 듯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 몇 십 년을 훌쩍 앗아갈 수 있는 극도로 위험한 '오류 표지판'인 걸 자각한 내 사전에는 지워져 없는 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