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꾸며라' 그 말에 책임질 수 있어요?

[내면 성장 이야기] 내가 믿었던 거짓말들

by 하트온

조금만 더 꾸미면 좋을 텐데


대학 시절, 내 방에 놀러 왔던 후배가 물었다.

언니는 화장품을 숨겨놓고 써요?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깔깔 박장대소를 하며 쓰러졌다. 이 언니는 화장품을 숨겨 놓은 게 아니라 화장품이 없다는 깨달음이 그녀에겐 웃겨 나자빠질 일이었고, 나는 화장품이 안 보이는 걸 숨겨놓았다고 생각했던 후배의 생각의 흐름이 코로 웃음이 터져 나올 만큼 웃겼다.


조금만 더 꾸미면 좋겠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으며 대학을 다녔지만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고 애썼다. 조금 더 꾸미란 소리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도 없었거니와, 뭘 더 사야 하고, 어디에 돈을 좀 써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게 뻔해서 물어보기도 귀찮았다. 밥 사 먹을 돈도 빠듯한 학생 형편이라 기초 화장품도 갖추기 힘든 상황에서 들어 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는 딴 세상 이야기일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책임도 지지 않을 사람들이 남의 외모 간섭은 참 지독하게도 했었구나 싶다. '진심으로 너 잘되라고' 위해주는 듯 챙겨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만, 실은 '너는 지금 이 상태로는 부족하다'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보내는 외부기준의 세찬 물살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외모를 꾸미지 못한 것이 비단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느 날 학교 남자 선배가 물었다.


넌 왜 안 꾸미고 다니냐? 한창 외모 관리할 때 아니니?


나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마음 관리가 더 시급해서요. 마음부터 돌보고, 외모는 그 담에 신경 쓰려고요.


나는 일찌감치 내 내면 상태에 대해 파악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음 깊이에서 피눈물이 솟구치는데, 외모를 꾸미고 싶은 마음이 도무지 일지 않았다. 외모를 꾸며 사람들의 시선까지 끌면, 그런 상태의 내 마음이 더 드러날까 봐, 더 감당할 수 없는 말들을 듣고, 더 비참해질까 봐 불안했던 것 같다. 나는 꾸미고 드러내고 싶은 욕구보다, 나를 최대한 가리고 무장하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테 굵은 안경과, 검은 캡모자, 늘 몇 치수 큰 펑퍼짐한 남방이나 점퍼 차림,... 그때 외모를 꾸미지 않았던 것은, 눈에 띄지 않는 회색분자로 존재하기 위한 나의 방어기제였다.


그런 나의 심리를 모르면서, 사람들은 진짜 백이면 백 명이 다 한 목소리로, 무조건 예쁘게 꾸미고 가진 젊음을 과시하고 자랑하라고 부추겼다. 그 말은 내가 그 나이대 '숙녀'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 전통적으로 여자에게 요구되는 '교양과 맵씨'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내내 주었다. '꾸미지 않는 여자는 게을러 보인다'라는 둥, 남성이 자기 입맛대로 꾸미지 않는 여성을 대놓고 공격 비하하는 말까지 난무하던 시기였으니, 그렇게 쌓인 부담은 사실 어마어마했다.



말이 무서웠었다


나는 사람들이 하는 수많은 말들을 무서워했었다. 교수, 선배, 동기,... 대학가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너무나 많은 말의 조각들, 질투 시기 비난 원망 섞인 조롱과 냉소의 파편들이 닌자의 수리검처럼 내 심장을 파바박 찌르며 사방으로 피를 튀겼다. 말만 무서운 게 아니라 글도 무서웠다.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존재, 내게 익숙하지 않은 뜬구름 잡는 개념들에 대한 이야기도 무서웠고, 질병과 죽음과 사후에 대한 이야기도 그랬다. 심지어는 인간이 저지르는 범죄와 악행에 관한 이야기도, 눈물이 나고 가슴이 떨려서 신문을 도무지 읽을 수 없어 끊어 버릴 만큼 내 마음을 찢었고, 이별과 배신, 관계의 고통이 난무하는 인생의 고난을 암시하는 노래 가사를 들을 수 없어, 유행하는 가요와도 단절했었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나는 언제나 생각과 말과 글의 공격에 무참한 부상을 당해 피 흘리며 신음하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문을 안으로 걸어 잠갔다. 그리고, 공격을 피하기 위해 나의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에게 친절과 미소, 무거운 입으로 무장했다. 핼러윈날 귀신 좀비 분장을 한 아이들에게 사탕을 줘서 보내는 것처럼, 나는 사탕 바른 웃음을 주고 내 영혼을 뜯어먹을 말을 하는 좀비 같은 사람들을 지나쳐 보냈다. 내 문을 뚫고 들어 올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뚫고 들어왔던 사람도 함부로 말을 뱉기 시작하면 쫓겨 나가야 했다.



이젠 말이 더 이상 무섭지 않은 전사


문득 나는 많은 말들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그간 내 삶의 역사를 더듬어본다. 어떻게 나는 마음이 이토록 강해지게 된 것일까. 아이들을 낳고 지키는 사람의 역할을 맡아 '안 되면 되게 하라' 특공대 정신으로 반강제 무장해야 했던 상황이 만들어준 훈련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숨고 도망가는 겁 많은 소녀의 역할을 버리고 특전사의 역할을 맡기로 나의 '정체성'을 과감히 바꾸어 버린 것이 나를 가장 강하게 만든 순간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서 부모까지 나에게 의지하는 상황이 나를 물러설 자리 없고 숨을 기회 없는 대담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몰아갔다. 내가 무너지면, 다치고 쓰러지면, 너무 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 다치는 상황인 것이 나를 쉽게 쓰러지지 않는 사람이 되게 만든다.


이젠 뒤로 갈 순 없다. 특공대 전사 훈련으로 단련된 사람이, 숨고 도망 다니는 어린 소년 시절로 되돌아갈 순 없는 것처럼. 나는 더 강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기로 마음먹는다.


나는 이순신 장군이 되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다. 마음은 언제나 '선'과 '의'를 지향하되, 전쟁 전략에 있어선 간교하다 싶을 정도로 영리하고 지혜로운 술수를 구사할 수 있는 존재. 그래서 나를 지키고, 나아가 내가 속한, 나에게 속한 모든 것을 지켜내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장군. 설사 화살에 맞아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적이 모르도록 내 고통을 틀어막고 이겨 내야 하는 장군. 내 인생의 장군으로 나를 승격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젠 말들을 무조건 몸으로 막고 견뎌내는 전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전략으로 맞서 백전백승하는 이름을 떨치는 장군으로 나의 정서적 신분을 정의해 버리기로 했다.



그럼 이제 외모를 꾸밀 때가 된 것일까


이제 내면이 내 마음이 흡족할 만큼 강화되었으니, 이제 외모를 좀 꾸며야 하는 걸까. 외모도 스스로 정의하는 자신을 만들어 가기 위한 전략의 일부일지 모른다. 스무 살 풋풋한 청순미를 드러내는 그 시절에 맞는 전략은 사용해 보지도 못하고 버렸었지만, 지금 장군의 기개, 장군의 늠름한 아름다움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싸움 시작 단계부터 압도적인 분위기로 기를 누르고 시작하는 전략 기회는 아직 살아 있다. 일상은 검소하되, 결코 쉽게 보이지 않는 당당한 장군의 외모를 갖추고 꾸며나가 보면 어떨까.


하지만 이내 깨닫는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건 사실 상관없는 일이다. 이렇게 꾸며도 저렇게 꾸며도, 아니면 꾸미지 않아도, 상관없이 나는 나로서 기쁘다. 그리고 어차피 이순신 장군이 잘 꾸며서 훌륭한 장군이 된 것도 아닌데. 자신의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데 모든 외모의 힘도 바쳤을 것이다. 다만 큰 부상을 입을 기회를 최소화하기 위해 전신갑주 무장을 해야 하지 않았을까. 나도 그 정도의 장비, 필요한 대로 목적에 맞는 장비만 갖추고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이 더 이상 사람의 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내 마음이 마침내 내면만이 아닌 외모를 생각할 여유가 생긴 것 자체가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한 가지 더욱 분명해진 건, 사람들이 나에게 '외모를 꾸미라'라고 명령하거나 조언할 자격은 없다. 내가 그 말을 진지하게 들어줄 이유가 하등 없다. 그 말은 책임질 줄 모르는 무례한 외모 평가일 뿐이다. 그것도 말하는 사람 자신이 내리는 기준에 따른 것일 뿐, 내가 중요시 여길 나의 소신이 아니며, 내가 쌓아가는 미의 가치관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누군가는 18세기 화려한 로코코 양식을 좋아하지만, 누군가는 20세기 미니멀한 현대 추상화를 좋아하는데 어떻게 미의 기준을 획일적으로 갖다 댈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그런 자주 치워줘야 하는 먼지 같은 말을 걸레로 슥슥 문지르며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 외모는 내가 알아서 해요. 각자 자기 외모만 자기 스타일 대로 관리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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