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견이 따르는 삶

바퀴가 있는 삶 ep.9 (by 코리하 라이브)

by 코하

아홉번째 이야기: 참견이 따르는 삶


글: 코하


요즘 내 고민 중 하나는 인터넷과 함께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TV를 계속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영상 시청을 하는 패턴이 생방송 TV 시청보다는 내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영상을 보는 OTT 서비스 위주로 많은 부분 넘어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는 가끔 수요가 생기는 스포츠 경기라던가 본방사수를 하는 예능프로그램 몇몇 때문에 차마 해지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지금 세 가지 정도 유지하는 서비스에서 플랫폼이 하나만 더 추가되어도 기존의 TV는 해지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 코하의 옆집에는 아직도 가끔 지역 케이블로 가입된 유선티비가 잘 안나온다며 가끔씩 SOS를 청하는 동네 어르신 한 분이 살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영상을 자기가 원하는 시간대에 OTT 서비스를 이용하여 시청하고, 거의 대부분의 정보를 인터넷을 통해 얻으며, 쇼핑과 외식도 앱을 통해 주문하고 배달 받고, 대부분의 문화생활 역시 인터넷으로 하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영상을 TV 본방에 의지하며, 거의 대부분의 정보를 뉴스와 지인의 정보전달을 통하며, 쇼핑과 외식은 무조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고, 대부분의 문화생활 역시 오프라인이 기준이 되는 세상을 살고 있겠죠.


무엇이 낫다 아니다를 비교하려는 게 아닙니다. 대부분의 선택엔 이유가 있고 자신에게 편한 선택을 할 것이니까요. 그리고 위처럼 모든 면에서 양극단인 경우는 적을 겁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서비스를 취사선택해서 삶에 적용시켜 살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는 비단 나이나 성별, 또는 장애유무 같은 것으로 갈리는 것이 아닌 새로운 시스템을, 최신의 기기를, 인터넷의 활용을, 각 개인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에 따라 갈립니다. 그리고 그에 더해 개인이 수용 혹은 거부를 선택해야 하는 것 중에는 새로운 사상, 집단과 개인의 관계, 기계와 인간의 관계, 나의 개인적 성향과 다른 타인에 대한 배려 같은 다양한 생각도 포함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다양성이 무한증식하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과 관계성 중에서 참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원래는 무례한 난입자, 혹은 현피 뜨고 싶은 사례집 같은 걸 생각했는데..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면서 방향이 많이 수정되었습니다. 아직 들이받고 싶은 혈기가 있는 게 좋다고 해야할지..;;)


불과 20~30년 전만해도 참견이 미덕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이 있었습니다. 동네엔 모두 아는 사람들이고, 그 관계성에서는 참견이라는 행위를 통해 관심을 표하고, 그 내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일상을 나누고, 혹시 모를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게 가능했습니다. 관심과 오지랖과 참견과 간섭과 강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도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게 가능했던 시기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먼 과거의 전래동화 이야기가 아니라 고작 20~30년 전에 말입니다.


그리고 20년에서 30년의 시간이 흐르며 사람들의 생각은 꾸준히 변화되었고 지금에 와서는 참견이나 오지랖이 그다지 좋은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개인의 특성을 존중하고 존중받으려 하고, 프라이버시가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로 평가받으며, 당사자가 허락하지 않은 조언은 폭력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 사회적으로도 수용되고 있는 세상이니까요. 그리고 불과 20~3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크게 변한 생각의 변화 덕에 우리는 '참견의 미덕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모르는 누군가의 참견을 결코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덕에(?) 장애인으로 바퀴가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코하의 일상과 임산부로, 유모차를 통해 바퀴가 있는 삶을 살았던 육아맘으로, 그리고 마침내 두 아이의 엄마로 살고 있는 리하의 일상에는 꽤나 다양한 형태의 참견이 이뤄지곤 합니다.


그러한 이유로 이번 글을 쓰기 위해 편집장 리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니 '폭력적이라고 까지 느꼈던 나쁜 참견'의 빈도가 가장 많(2번 외출에 1번 꼴)았습니다. 나쁜 참견 중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장애인, 혹은 임산부/애엄마인데 "굳이 왜 밖에 나다니느냐."라고 지적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그말인 즉 장애인이든 임산부든 아이의 엄마든 개인의 삶이 있고, 그 삶에서 당연한 외출의 목적이 있을 것임에도 그 부분에 대한 무시 내지는 폄하가 일상의 순간순간에 많이 존재한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그 말을 한 당사자는 단순히 '왜 나왔는지'가 궁금했을수도 있으나, 저 상황에서 '넌 왜 나왔냐'라는 질문을 '사회적인 포지션이 평균 이상이라 여겨지는 사람'이 듣는 경우는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왜 일을 하느냐.', '왜 병원을 멀리 다니느냐.', '왜 나다녀서 다른 사람을 번거롭게 만드느냐.'같은 선을 넘는 폭력적인 참견도 많았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 장애유무, 성별차이, 임신유무 등에 관계 없이 사람으로써 존재를 부정당하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여기에 약간의 비약을 섞으면 '넌 왜 사느냐.'라고 들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말들이 아직 늦가을 모기처럼 귓가를 맴도는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견 중엔 꼭 위와 같은 나쁜 참견만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빈도수만 따지자면 압도적으로 위와 같은 사례가 더 많긴 할겁니다만..)


코하만 해도 젊었을 적, 아직 수동휠체어를 타고 지금보다 장애인 편의시설이 부족했던 시기에 지하철같은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그 중에서도 내가 곤란할 때마다 어디선가 쓱 나타나 도와주던 군인 동생들에게 특별한 감사를)의 도움을 받았고, 지금도 간간히 지하철 플랫폼 사이 간격이 너무 떨어져 지하철을 타다가 앞바퀴가 그 사이로 빠지거나 할 때 그 무거운 전동 휠체어를 들어올려 도와주던 분들이 있어 아직까지 잘 살아있기도 합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좋은 기억은 어떤 노인이 위에서도 이야기했던 "왜 나왔느냐."라는 무례한 질문을 할 때, 옆에 앉아계시던 다른 어르신이 나서서 "이 사람이 나와서 뭐가됐든 자신의 일을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 내가 당신이 왜 나왔는지를 물어보면 당신은 기분이 좋느냐."며 자신의 일처럼 화내주시던 모습을 옆에서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리하의 경우엔 코하의 경우처럼 전철에서 열차랑 승강장 사이 폭이 좀 넓어서 유아차 바퀴가 빠질 수 있던 상황에 유아차를 혼자 들어서 내리려고 하는데 갑자기 어떤 젊은 남자분이 반대쪽에서 같이 들어줘서 후딱 편하게 내일 수 있어서 너무 고마웠던 일이 기억에 오래 남더란 이야길 하더군요. 바퀴가 있는 삶은 닮는 거냐며 휠체어나 유아차나 하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리하의 좋은 기억은 아이를 거대 쇼핑몰에서 잃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곳이 역이랑 백화점, 마트, 영화관이 같이 있는 너무 복잡한 곳이라 아이가 어디로 갔는지 전혀 감도 못잡겠고 너무 깜짝 놀라서 무작정 에스컬레이터를 달려 내려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디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려서 내려가다 말고 뒤돌아봤더니 한 모녀가 울고있는 아이를 데리고 달래주고 계셨고 지금도 그 모녀분들을 생각하면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하네요.



각자의 기억에 소중히 자리한 이런 일화들도 있는 만큼 '원하지 않았던 다른 누군가의 참견'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문제는 어떤 참견이 내 외출에 난입할지 알 수 없다는 거지요. 물론 당연히 그것을 선택할 수도 없지요. 나쁜 참견만 계속되는 상황도 싫지만 그렇다고 좋은 참견만 취사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그닥 바람직하진 않아 보이니까요.


하지만 바람은 가져봅니다. 내가 나에 대한 불특정 다수의 모든 참견을 관리할 순 없지만 그래도 '가급적 상대의 입장에 서서 상대가 좋아할 만한 참견을 여러번 생각한 끝에 참견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난 군대도 안 갔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