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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디앤디 Oct 10. 2024

552번

창 밖으로 수원터미널이라는 간판이 점점 커지더니 버스가 멈춘다. 일련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짐을 챙겨 좁은 통로를 헤집고 나온다. 도착지가 무슨 출발선이라도 된 듯이 서둘러 버스에서 내린다. 그러고는 각자의 낯빛으로 그 빛이 시작된 곳으로 방향을 잡는다. 누구는 미소가 가득한 표정으로 갈 길을 재촉하고, 어떤 이는 땅이 꺼질 듯 숨을 길게 몰아 쉬며 흐릿한 빛을 따라 더디게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검푸른 어둠이 잦아들면서 길가에 즐비한 간판 불빛들이 경쟁하듯 너도나도 불나방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중간중간 덜컹 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잠을 자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하다. 짙은 구름이 낮게 깔린 탓 일지도 몰라. 아슴아슴한 느낌을 지우려 무거운 머리를 흔들어 보지만 덜그럭 거리기만 한다. 마치 머리뼈와 뇌 사이에 공간이 생긴 듯이.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쪽으로 향했다. 아직 내리지 않은 승객이 눈에 들어온다. 여덟아홉 살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남자 아이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멈춘 줄도 모르고 자고 있다.

“꼬마야! 꼬마야! 다 왔어. 내려야지.” 작고 힘없는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죽은 듯 너무 힘없이 움직이지는 몸. 순간 쿵 하고 무언가 내 가슴에 떨어진 느낌이다. 꼬마가 게슴츠레 눈을 뜬다. 다행이다. 살아있네. 눈을 뜬 꼬마는 놀란 듯 몸에 비해 큰 가방을 가슴팍으로 끌어당겨 꼭 안는다. 책가방 같은데 그 안에 소중한 것이라도 숨겨 놓은 듯이. 그러고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서둘러 버스에서 내린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 한 일은 아니었지만 괜스레 서운한 마음이 든다. 한편으로는 어린아이가 이 먼데까지 혼자서 버스를 타고 왔나?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하는 걱정 반 호기심 반의 오지랖을 떨며 대합실로 향한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만나고 헤어지는 모습들 너머로 텔레비전 혼자서 지지직 거리며 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수원은 처음인데 낯설지가 않네. 언제 본듯한 모습이다. 데자뷔가 이런 것일까 하며 화장실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아까 그 꼬마가 매점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출구를 나오니 무거운 공기가 습기를 머금은 채 둥둥 떠다니며 한 여름 특유의 메케한 냄새를 풍긴다. 낮과 밤이 만나는 시간답지 않게 소란스럽게 느껴졌다. 속이 울렁거린다. 메스꺼운 속을 달래며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재촉한다. 어~어어.. 내가 타야 하는 552번 버스의 큼직한 바퀴가 살짝 뒤로 움찔하다가 기어코 앞으로 굴러가고 있다. 뛰어간다고 출발한 버스를 잡아 탈 수 있는 거리는 아니다. 버스가 왼쪽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이자 오른쪽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그 꼬마가 또 보인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 생각에 잠겨있던 꼬마는 버스가 가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충분히 버스를 탈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버스를 타지 않고 그 버스를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 어려서 보호자가 있지 않으면 못 타는 것일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승차거부를 당한 것 같다. 시외버스도 타고 왔는데 시내버스를 못 탈까? 하고 생각을 한다. 그러고는 언제부터인지 어떤 이유에서인지도 모른 채 그 꼬마를 뒤 따르고 있다. 작고 가냘픈 체구라 더욱 기운이 없어 보였지만 곧은 발걸음이 당차 보인다. 두어 걸음 떨어진 곳까지 다가갔을 때 꼬마를 부른다.

“꼬마야! 같이 가자” 내가 따라오는 것을 몰랐는지 움칫 놀라며 뒤를 바라보며 경계와 불안이 동시에 묻어나는 말투와 표정으로 “아저씨는 누구세요?” 한다.

“어.. 나는 너랑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이야.” 라며 둘러댄다.

“그럼 삼원백화점 가시는 거예요?”

“어.. 응 그래, 그래 나도 삼원백화점 쪽으로 가는 거야” 순진한 마음에 같은 방향으로 간다고 하니 순순히 목적지를 밝히는 꼬마가 더욱 불안해 보인다. 나도 삼원백화점으로 간다고 하니 경계를 푸는 듯싶다.

“아까 552번 버스는 왜 안 타고 걸어가고 있니?”

“터미널 매점에서 껌을 사 먹었어요. 그래서 버스비가 부족해요.”

“그랬구나. 그런데 거기까지 가는 길은 알아? 걸어가기에는 멀지 않겠니?”

“길은 몰라요. 멀어도 갈 거예요.”

“길도 모르는데 무작정 걸어가면 어떡해?”

“버스가 지나 간 길을 따라가면 갈 수 있을 거예요. 552번 버스”

“지금은 버스도 안 보이는데…”

“저 앞에 세 번째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갔어요. 저 사거리까지 가서 우리도 왼쪽으로 가면 돼요. 일단 거기까지 가서 또 버스를 기다려야죠.” 꼬마의 뒷 꽁무니만 쫓아오다 보니 버스가 어디로 지나갔는지 알 수 없는 나로서는 그 꼬마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똑똑한 아이 같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라는 말이 그새 나오는 게 친근함 보다는 외로움이 느껴진다.

“똑똑한데, 이름이 뭐야?”

“대원이요. 성은 강이에요.”

“대원이는 삼원백화점에는 왜 가는 거야?”

“엄마 찾으러 가요.”

그 순간 후드득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꼬마가 둘러맨 가방 위로 떨어진다. 꿉꿉한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비로 변했다. 하필 이때. 급한 데로 저만치 떨어진 길가의 가게 처마 밑으로 몸을 피한다. 잠깐 사이에 그 비는 작은 체구의 꼬마까지도 모두 무겁게 적시어 놓았다. 가게 유리에 비친 꼬마의 모습과 내 모습이 중첩되어 마치 이중노출 된 사진처럼 보였다. 처마 밑에서 꼬마는 가방을 열어 안에 든 것이 괜찮은지 확인한다. 아직은 무사한지 가방을 다시 닫고 버스에서 처럼 가슴에 꼭 안는다. 십여분이 지났을까 소나기는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하고 꼬마도 다시 길을 나선다.

얼마나 갔을까, 뒤쪽에서 버스가 오는 소리가 들린다. 552번 버스다. 꼬마는 그 버스를 반기며 버스에서 눈길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버스는 물이 가득 찬 웅덩이를 박차고 지나며 꼬마에게 흙탕물을 끼얹었다. 반가운 시선을 이런 식으로 돌려주다니 세상 참 얄궂다. 그럼에도 꼬마는 그 버스에서 시선을 놓지 못한다. 그 버스가 지나간 길을 기억해 두고 따라가야 했으니까.


사거리에서 좌측으로 갔다. 버스가 지나간 길이다. 거기까지만 볼 수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또 사거리가 나왔다. 버스는 어느 쪽으로 갔을까? 알 수가 없다. 기다리자니 조금 전에 흙탕물을 끼얹고 간 버스가 사과를 하러 오지 않는 한 바로 올 이유도 없으니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꼬마는 길가는 사람들에게 삼원백화점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 사거리에서 곧바로 가다가 두 번째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갔다가 다시 왼쪽으로 가란다. 그러고는 그쯤에서 또 길을 물어보란다. 버스만 따라가면 될 거라는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너무 단순했다. 길은 하나가 아니었다.

물어 물어 도착해 보니 처음 길을 물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결국은 제자리다. 질문이 틀렸던 것일까? 삼원백화점 가는 길을 물어볼 것이 아니라 552번 버스가 가는 방향을 물어봐야 했던가? 어떤 질문이든 같은 결과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신은 여전히 호의를 베풀지 않고 있다. 꼬마는 기다린다. 552번 버스가 오기를.

저 멀리 사거리에서 꼬마가 있는 쪽으로 파란색의 버스가 다가온다. 552번 버스다. 우렁찬 엔진 소리가 우~웅~응 스쳐 지나간다. 꼬마는 이내 뛰어간다.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듯. 그렇게 꼬마와 버스가 멀어져 간다.



“대원 님.” “강대원 님.” “정신이 드시나요?”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

열린 병실 문을 사이에 두고 간호사와 의사의 대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아직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나 보네요.” 의사는 자신의 실력을 보호자에게 자랑하고 싶은 듯 달뜬 표정으로 말한다.

“예, 이번이 두 번째 수술인대도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가족이 없다는 말씀은 전에도 하셨지만 그래도 누군가 오시겠지 했는데… 나이가 60세가 다 되었는데 병문안 올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간호사는 보호자가 없어 자신들의 손이 더 가는 것이 번거롭지만 그래도 안쓰러운 듯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말투다.

“수술이 잘 되어서 다행이에요. 의사로서 개인적으로도 병원의 입장에서도 그렇고요. 성공확률이 높지 않은 수술을 간절히 원하시니 안 할 수도 없고요. 미리 보증금에 수술비까지 모두 지불하셨다니까요.”

“의지가 강하신 분 같아요. 아직 찾지 못한 게 있으시다고 그것을 꼭 찾아야 한다고…”

“의지가 강한 분 같지는 않아요.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녀 가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려도 꼭 탈이 나야 오시는 걸로 봐서는 병을 고치려는 의지는 없어 보여요. 하지만 이번에 퇴원하시면 원하시는 것 꼭 찾으시고 다시는 병원에서 안 보았으면 좋겠네요.”


고맙네요. 당신들의 호의는 신이 가진 것보다 훨씬 크네요. 이제는 다른 버스를 기다려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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