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의 풍경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 김두식 지음
풍경은 멀리서 볼 때 아름답다. 비록 그것이 인위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멀리서 보면 보기 싫은 것과 보아서는 안 되는 것, 지저분한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 나에게 해가 될 만한 것이 있다고는 전혀 상상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 안에 있어야만 볼 수 있는 것, 보고 느껴야만 알 수 있는 것들도 함께 원경에 묻혀 버린다.
김두식 교수가 책의 제목을 <헌법의 풍경>이라고 정했는지, 부제로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이라고 했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이 책의 초판이 나온 지는 20년이 지났으며, 개정증보판이 나온 지도 1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가 말하는 법을 둘러싼 풍경은 여전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썩어가는 모습을 숨기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나 악취는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책을 좋아했던 사람이 검사를 거쳐 법학교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자신에 대한 변론도 엿볼 수 있었다. 법학교수로 변신한 신의 은혜를 가장한 선택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인생에서 늘 '신의 한 수'는 필요한 법이다. 누가 알겠는가? 저 풍경 속 그늘 어딘가 악취가 나는 곳에 몸을 숨기고 있는 법의 '이용자'가 되었을지. 아닌가 ‘악수’였을까? 그 안에서 썩은 것을 도려내는 역할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책으로 들어가 보자…
김두식 교수가 하고 싶은 말은 모두에서 모두 한 것 같은 느낌이다. 개정증보판이라는 특성을 고려한다고 해도 ‘머리말’과 ‘들어가는 말’의 분량이 많다. 물론 꼭 필요한 내용이며 다음에 이어지는 본론의 내용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저자는 국가와 권력, 종교의 자유, 평등과 차별, 인권, 법의 정신 등에 관하여 알기 쉽게 예를 들어가며 설명하고 있다.
머리말에서 그는 “법의 목적은 평화이며, 그 평화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은 투쟁이다”라고 말한다. 개별적인 투쟁만으로는 변화를 이끌어낼 동력을 만들지 못하니 권리를 지키기 위한 '동감'과 '연대'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이와 같이 주장하는 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하지만 한 가지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법을 대하는 일반 국민들의 정서다. 국민에게 법이 과연 권리일까? 나는 대다수 국민들은 법을 의무로 느낀다고 생각한다. 일반 국민에게 법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전제부터 명확히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권리를 위한 투쟁과 의무에 반하는 투쟁은 성격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책의 부제를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이라고 한 이유를 이 대목에서 추측해 본다. 권력자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권리를 의무라고 세뇌시킨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잃어버린 헌법이라는 표현을 쓴 것인가 하는 추측 말이다.
서장에서는 '시민과 법 사이의 철저한 괴리 현상'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법학자들은 법학자들대로 고고한 자신들만의 자기 특권 속에 안주하며 청지기의 소명을 저버리는 가운데,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은 길바닥에 버려져 뒹굴게 된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그렇다. 하지만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거기에 운동장까지 지어준 것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그건 모든 대한민국 국민이다. 사시에 합격했다고 동네방네 플래카드 내걸고, 영감님 영감님 하고 떠 받들고, 그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안겨준 게 누군데. 이제 와서 빼앗지도 못하고 그냥 둘 수도 없고. 인간사 어디 하나 완벽한 게 없지만 이만큼 부조리한 것 또한 없을 것이다.
이 책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에 모두 쓰일 수 있는 말이다. 뭐 대부분 불굴의 의지를 표현하는 데 사용함으로 인해서 긍정적인 의미로 많이들 이해하기는 하지만.
우리는 법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라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법은 어찌 보면 '의무'와 '권리'라는 상호 대립되는 개념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지켜야 하는 의무이고 그 안에서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라는 두 가지 개념 모두.
복잡하게 얽힌 세상사에서 우리는 언제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가끔 가해자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모두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 뭐 범죄자에게 무슨 권리가 있냐고 따지는 사람들도 있다. 법에서 말하는 권리는 최소한의 인간적인 권리가 아닌가 싶다. 인간이기에 누려야 하는 권리.
권리에는 책임이 동반된다. 일반 국민들에게는 이것이 적용된다. 소수의 권력자들과 법을 이용하는 주체인 법률가는 종종 책임을 지지 않는다. 여기에서 법에 대한 불신이 생긴다.
이 책에는 검찰공화국에 대해서 말한다. 때로는 권력의 시녀로서 때로는 권력의 몽둥이로 역할을 충실히 해 오고 있다. 여전히.
김두식 교수는 헌법은 잘 못이 없다고 변론하고 싶었던 것일까?
헌법은 잘못이 없다. 다만 그 법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이 있었고 아직도 그러한 자들이 버젓이 권력을 누리고 있다. 법을 불신하게 만든 것은 법 그 자체가 아니다. 법을 다루는 사람들 스스로가 만들어 내 것이다. ‘병원에 가면 없던 병도 생긴다’는 우스갯소리처럼 ‘검사 앞에 가면 없던 죄도 만들어진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그렇다. 늘 사람이 문제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창조물은 문제가 없다.
우리를 둘러싼 헌법이라는 병풍이 우리를 보호하는 본연의 역할을 뒤로하고 권력자들의 악취와 더러운 모습을 가리는 데 이용된 것은 아닌가 싶다.
국가가 그렇고 권력자가 그렇다. 우리는 국가와 그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았다. 권한을 주었을 뿐이다. 권한이라는 단어를 풀이해 보면 그 안에는 범위가 있다. 그 범위를 넘어서면 제재해야 한다. 그 힘은 시민에게 있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럴 힘이 부족하다. 저자는 말한다. 그러기 위해 동감하고 연대해야 한다고. 그래서 변화의 바람으로 악취를 날려 버려야 한다고.
저자는 스탠리 코언의 말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우울한 소식을 접할 때마다 사람들은 흔히 그 고통을 모른척하거나 이미 알았던 사실도 미처 몰랐다는 듯이 반응합니다.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에게도 책임은 있다. 방관한 책임. 권리를 누리려면 잃어버린 권리를 다시 찾아와야 한다.
저자는 풍경 속으로 들어가라 말한다. 관망하지 말고 썩은 내가 풍기는 그 안으로 들어가 동감하고 연대하여 바꿔보자고 한다. 그게 아름다운 풍경을 지켜내는 최선이라고.
끝으로
“사람이 풍경일 때처럼 행복할 때는 없다.”
정현종 시인의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나>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이를 패러디하며 마무리한다.
"헌법이 풍경일 때처럼 평화로울 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