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도 너를..
지난봄. 너를 또 보았어.
윤기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반질반질한 촉감은 그대로 남아 있더군. 검버섯이 핀 팔을 보니 살짝 미안한 마음도 생기더라. 좀 더 자주 봐야 했는데. 너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게는 너를 자주 본다는 것이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야. 우리가 함께 붙어 지내던 시간들이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니까.
너는 기억 못 할 거야. 이제 기억은 내 몫이고 너는 그것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지. 벌써 2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종로 3가에서 처음 만났지. 가냘프고 동그란 얼굴은 차갑다 못해 예리하게 느껴졌어. 아마도 그것이 내 마음을 움직였을 거야. 그때는 그런 스타일을 좋아했으니까. 양쪽의 길이가 조금 달랐던 두 팔이 내 몸에 닿을 때 느껴지던 촉감. 처음에는 차갑다가 조금씩 따스해졌어. 그런 네가 좋았어.
미안하지만 너를 만나기 전에 그 자리에는 이미 주인이 있었지. 너에게 더 정이 갔던 것은 단순함이 주는 소박함 때문이었던 것 같아. 살갗을 감싸는 부드러운 안정감도 한몫했다고 봐.
그랬던 너를 멀리하게 된 이유를 말해 달라고?
그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 변덕스러운 내 성격이라고 오해하고 있었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변명처럼 느껴질 거야. 변명일지도 모르고.
그 이유는 매우 매력적인 녀석이 등장했기 때문이야. 물론 너도 눈치챘을 거야. 어느 날 갑자기 너를 멀리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너와 함께하는 날이 조금씩 줄어들고 너를 보는 내 눈길도 다른 곳을 향하기 바빴으니까. 그게 누구냐고? 말하지 않아도 알 텐데. 휴대전화라는 괴물이야. 이제 와서 질투하는 거야?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너는 나에게 더 큰 의미가 있으니까.
이제는 너의 역할이 더 중요해졌어. 본연의 역할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지만. 아마도 그게 너를 잊지 못하고, 여전히 미련을 갖게 되는 진짜 이유일지도 몰라. 시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너이기 때문이지.
움직일 수 없다고, 너의 몫을 하지 못한다고 자책하지 마. 되살려 주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마. 나에겐 지금 그대로의 네가 더 좋아. 그래서 아직도 난 너를 간직하고 있어.
너의 두 팔로 내 손목을 감싸고 지그시 눈을 감아 본다. 차갑고 부드러운 기억들이 일렁인다. 봄의 바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