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한편의 판토마임

by 권희대


강력한 허구의 세계로 이끄는 무서운 말



영화 <버닝>을 보았다. 문학적인 영화다. 이창동의 다른 영화를 보면서 딱히 감독이 소설가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 것 같은데 버닝은 좀 달라 보인다. 청춘은 그동안 그가 소설이나 영화로 구현하려던 세계와는 거리가 있는 소재다. 국밥을 기가 막히게 만드셨던 분이 퓨전 파스타에 도전해본 느낌이랄까. 어떤 기자는 ‘문학소년이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청춘’ 이라고 까지 이야기 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파스타가 맛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트렌디한 맛과는 비교할 수 없는 원숙하고 독특한 맛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젊은 감독이 지금 청춘을 동시대의 젊은이가 공감할 수 있도록 그려낼 수 있는 연령적인 특권을 가졌다면 70을 바라보는 감독은 분명 외부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이버의 낮은 평점 테러도 이와 무관해 보이지는 않는다. 어쩌면 내부와 외부의 간극을 메워주는 것이 감독의 문학적 상상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만든 다른 어떤 영화보다도 메타포가 등장하는 비율이 높은 것 같고 주인공 혜미를 표현하는 기재들도 다분히 소설적이다. 그녀가 판토마임(물론 하루키의 원작에도 있지만)을 배운다든가 하루에 잠깐 남산에서 반사된 빛이 그녀의 자취방으로 들어왔다 사라져버린다든가 하는 것들이 그렇다. 더군다나 그 빛은 주인공들이 섹스를 하는 짧은 시간도 유지하지 못하고 환영처럼 사라져버린다.

원작과 달리 자극적인 결말 속에서도 혜미에 대한 어떤 궁금증도 해결해주지 않는 영화는 결국 관객들에게 한편의 판토마임처럼 다가온다. 혜미가 마임을 하면서 종수에게 알려주는 ‘없는 것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 ‘없다는 사실을 잊으라’ 는, 강력한 허구의 세계로 이끄는 무서운 말과 함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