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지 못하는 자들이 그리는 기이한 순응의 세계
<나를 보내지 마>는 체념의 정서에
기반하는 소설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나를 보내지 마>를 읽었다. 성장소설로 읽는 이도 있고 SF 소설로 읽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글이 세련되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에겐 50페이지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지루한 소설이기도 하다. 평소 이런 류의 잔잔한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독자라면 그의 소설 읽기는 하나의 고행과 인내의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견뎌내면 세계적인 걸작들이 그러하듯 <나를 보내지 마>도 거부할 수 없는 여운을 남긴다. 한동안 잊고 있던 삶의 중요한 문제를 다시 맞닥뜨린 느낌 같은 게 마음에 들어차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다른 독서가 시작된다. 도대체 이 책 속의 무엇이 나를 미세하게라도 흔들고 있는지 그 연원을 알고 싶어 마음에 스며든 텍스트를 다시 읽게 된다.
처음부터 일관되게 가을날의 클래식처럼 흘러가던 소설은 토미의 절규로 클라이맥스에 이른다. 물론 작가의 글이 그러하듯 격정의 순간은 짧고 담담하게 묘사된다. 클론이 자신의 뜻대로 삶을 연장할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 책을 읽던 독자들의 답답함과 의문을 함께 뭉쳐 토해내듯 주인공 토미는 감출 수 없는 격정을 토로한다. 옆에서 지켜보는 캐시는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거대한 폭풍이 그저 지나가기만 바라는 사람처럼, 그녀도 그 절망의 순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클론으로서의 운명이 토미와 그리 다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캐시는 처음부터 거추장스러운 희망 따윈 품지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는 체념의 정서에 기반하는 소설이다. 클론을 양산하는 시스템에 대해 소설 속의 누구도 강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가 달이나 화성에 살지 않고 지구에 살고 있는 사실을 그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처럼. 물론 클론이라는 설정은 소설의 본질적인 배경이라기보다는 삶의 유한성을 보다 극한으로 몰고 가기 위한 장치이다. 그 극단적 배경 속에서도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행로는 기이할 정도로 순응적이다. 그들은 ‘나를 보내지 마’라고 애처롭게 소망할 뿐이다.
소설 속의 어느 누구도 강하게 무언가를 욕망하지 않는다. 근원자를 찾고자 하는 클론들의 기대도, 기증을 연기하고 싶어 하는 주인공들의 바람도, 심지어 혜일셤을 만든 에밀리와 마담의 의지도 어느 지점이 되면 당연한 듯이 바스러지고 만다. 그들은 그 상황에 강하게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욕망은 오직 클론을 양산하고 시스템을 움직이는 자들만이 소유하고 있지만 그들은 소설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클론들이 근원자를 찾지 못한 것처럼 독자들도 그 욕망의 소유자들을 만나지 못한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통해 삶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보고 싶다고 했다. 벗어날 수 없는 우리에 갇힌 주인공들이 어떤 삶을 연출하기를 원했는지 모르지만, 욕망하는 자들을 감춘 이면에 욕망하지 않는 자들이 그리는 그로테스크한 순응의 세계를 세련된 이미지로 보여주는 데는 성공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