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라는 눈가림
그렇다고 아교를 발라놓은
보험 같은 관계가 좋은가
“아이들이 논리를 이해해요?”
논리적인 말로 아이들을 설득할 때 잘 수긍하냐고 지인은 물었다. 그는 마흔이 넘었지만 결혼도 하지 않았고 당연히 아이를 길러본 경험도 없다.
“오히려 아이들이 쉬워요. 어른들이 문제지.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그것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받아들이면 전혀 말이 통하지 않찮아요? 서로 각자가 믿는 걸 떠들어댈 뿐이죠.”
“음..”
그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얼굴이기도 했다.
논쟁이 격화되면 논리는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격앙된 감정은 애써 쌓아 놓은 구조물을 날려버리는 폭풍과도 같다. 그것이 특히 성별이 다른 자들의 논쟁이라면 어느새 말이 아니라 오물을 투척하는 형태로 변한다. 남자들 사이에 힘을 수반한 폭력적 언어와는 또 다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논쟁으로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사실만 깨닫게 된다. 있더라도 너무나 아득하다. 모두가 쓰러지고 홀로 서있는 모습만 그려질 뿐이다. 자신이거나 혹은 상대거나. 관계는 어딘가의 구덩이에 파묻히고 만다.
몸에 기름을 잔뜩 바르고 요리조리 피해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번들거릴지라도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가 아니라 즐길 수 없다면 피하라가 되는 것이다. 당연히 옳은 길이 될 리는 없다. 갈등을 피해다닌다고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 문득 삶은 청구서 같은 것을 보낸다. 한동안 재미 봤으니 비용을 지불해야지, 라는 듯. 억울할 뿐이다. 딱히 즐긴 것도 없이 그저 무난했을 뿐인데. 그 시덟잖은 안락에 대한 것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나 갸우뚱거려봐도 삶은 인정머리 없는 공무원 같은 얼굴로 서있다.
나로 말하자면 요 몇 년간 동요 없는 세월을 보냈다. 감사하게도. 누군가 안녕을 바라는 기도에 내 이름을 올려주기라도 한 것처럼 무탈했다. 하지만 인생은 계절을 닮았다. 어떤 궤적을 밟고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변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화 다음으로 관계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깨지기 쉬운 공예품처럼 다루는 것 같다.
“무엇이 옳은가보다 누가 나와 친밀한가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면 말이죠. “
이처럼 말하는 사람들의 관계 안에서 합리와 상식은 부속일 뿐이다. 정이라는 것은 이성과 논리를 무색하게 한다. 그렇다고 아교를 발라놓은 보험 같은 관계가 좋은가.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답은 없다. 각자의 모습으로 살아갈 뿐.
나는 그저 따뜻한 것들의 모임이면 좋겠다. 지금처럼 찬 겨울에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겨울 지나 서로의 블로섬(blossom)을 응원할 수 있는 온기면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