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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Jul 13. 2016

낭만의 일본 기차여행

기차로 찾아가는 일본 소도시


일본의 소도시를 찾아가는 여로는
비밀스러운 캐릭터들이
잔뜩 등장할 것 같은
만화책을 시리즈로 앞에 둔 것 같았다


기차가 달라 봤자 얼마나 다르겠어. 그렇다고 날개가 달린 건 아니잖아? 본격적으로 일본 기차여행을 떠나기 전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본통인 지인들은 말했다. 일본기차는 그 종류만 해도 수백 가지가 넘는다고. 우리나라 기차처럼 KTX, 새마을호, 그리고 이름을 잘 알지 못하는 몇 가지로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실제로 고단샤에서 나온 <일본기차여행>이란 책을 봤는데, 일본 기차는 마치 지역의 특산물처럼 지방마다 모양과 내부의 인테리어가 가지각색이었다. 기차 한 칸에 콘도를 옮겨다 놓은 듯한 럭셔리한 침대열차는 기본이었고, 어떤 기차는 도쿄에서 출발해 2박 3일 동안 홋카이도의 끝까지 달려가는 것도 있었다.

부산까지 길어도 5시간이면 가는 우리나라에선 잘 상상이 가지 않는 여행이었다. 정말 은하철도 999처럼 중간중간 정차하며 소도시를 여행한다. 관광을 하다 보면 승객들은 기차가 다시 출발하는 시간에 맞추어 헐레벌떡 뛰어오기도 하지만, 또 그런 긴장감이 여행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차창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대지를 달려가고, 식당 칸에서 와규 스테이크를 썰면서 와인을 깃들인다. 그리고 은하가 가득한 밤하늘을 보며 덜컹덜컹 소리에 잠이 드는 여로, 아 이 얼마나 낭만적인 여행이란 말인가.

일본 기차여행은 내가 꿈꿀 수 있는 낭만여행의 최고봉이었다. 물론 유럽 기차여행도 있지만, 소도시의 아기자기함을 좋아하는 나는 왠지 일본 기차여행에 더 끌렸다. 단량기차를 타고 일본의 소도시를 찾아가는 행로는 뭔가 비밀스러운 캐릭터들이 잔뜩 등장할 것 같은 만화책을 시리즈로 앞에 둔 것 같았다.



 

일본 기차여행은 내 버킷리스트에 항상 상위에 있었다. 그러다 일과 관계된 기회가 생겨 그 소원을 풀었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북극성’이라는 기차를 타고 도쿄에서 홋카이도를 여행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많은 비용이 필요한 럭셔리한 여행이다. 대신 일반인들은 잘 들어보지 못한 시코쿠 같은 시골마을을 몇 번 찾았을 뿐이다. 하지만 일본 기차 여행의 낭만은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다. 포장마차처럼 생긴 개방형 기차를 타기도 하고, 강을 따라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길을 달려 숲 속에 숨은 100년 된 료칸을 찾아가기도 했다. 또 지방마다 특산물로 만든 에키벤을 사 먹기도 했으며, 어느 눈 내리는 겨울날 정차된 역에서 우동국물을 들이켜며 세상 좋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돈이 많이 들고, 나 같은 일반인이 경험하기 힘든 기차여행 빼고는 소소한 낭만은 대부분 느껴봤다는 뜻이다.




물론 자랑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밥먹듯이 일본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동안 여행지에서 많은 사진을 찍으면서도, 딱히 기차여행만은 사진을 정리해 본 적이 없다. 어째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기차여행만은 여행답게 오롯이 즐기고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브런치에 글을 쓰는 계기를 통해 갑자기 잊고 있었던 일본기차여행의 낭만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혹 일본기차여행을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동기부여가 될까 해서 사진과 함께 ‘낭만’ 부분만 보여드리고자 한다. 준비과정과 현지에서 필요한 수면 밑의 번잡한 자맥질은 철저히 빼고서. 혹시라도 실질적인 정보를 기대하셨던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시중에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 여행정보는 그곳에서 참고하시면 될 것 같다.



 

일본 기차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일본으로 가야 한다. 늦가을의 어느 날 비행기를 타고 홋가이도의 벌판을 날아 신치토세 공항에 도착했다. 11월의 홋카이도에는 우리가 기대하는 눈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가을겆이가 끝난 평야의 황량함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내 일본여행은 언제나 그렇듯, 공항에 내리면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이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될까. 비를 몰고 일본에 오는 진상, 지인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그래도 기차를 타고 가는 여행이라 그리 날씨에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차창으로 맺히는 빗방울과 어른거리는 풍경이 오히려 여행의 낭만을 더해주는 경우도 있으니까. 실제로 치바현을 여행할 때는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했다. 해변 철로를 달려가는 기차를 파도가 삼켜버릴 것처럼 몰아치기도 했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온 듯한 어두운 하늘 밑에서 폭풍우 한가운데를 질주하는 여행이란 상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신치토세 공항에서 비에이로 가는 길에는 다행히 날씨가 나쁘지 않았다. 일본기차여행의 재미 중 하나는 차창으로 밖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밖을 볼 수 있는 것은 어느 기차나 마찬가지지만 좌석이 창을 향하게 되어 있는 기차가 많다. 고개를 돌릴 필요 없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뜻이다. 눈 쌓인 들판과 가옥의 생김새와 산과 강의 모양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 지루해지기도 하지만, 날씨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는 처음 보는 풍경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 사진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건널목 개폐기의 종소리에는 묘한 낭만이 있다. 딸랑딸랑... 경각심을 느껴야 할 소리지만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련한 추억이 생각난다. 기차와 연관된 기억이 아니더라도, 어렸을 적 뛰어놀던 좁은 골목길이라든지, 연인과의 추억이 어린 장소라든지, 아무튼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뒤적여 보게 된다. 우리내 삶과 비슷한, 그다지 행복하거나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생활의 소리가 울려오는 것이다.



일본여행을 하다 보면 한 칸짜리 단량기차를 보게 된다. 눈 덮인 홋카이도의 벌판을 달려가는 단량기차는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다. 긴 기차의 행렬보다 뭔가 애잔하고 깊은 이야기를 전해줄 것 같다. 사진은 시코쿠의 어느 역에서 찍은 기차이다. 철로가 하나밖에 없어 마주오는 열차와 나누어 쓰는 역이었다. 20분 정도 정차를 했는데, 상대편에서 오는 열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승객들은 하차해서 역 앞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먹거나 간이역을 둘러보는 둥 한가하게 시간을 보낸다. 바쁘게 지나가는 일상의 쉼표 같은 기다림이다.


 일본의 기차역은 기차 다음으로 또 하나의 볼거리이다. 간이역에서 만나는 소소한 즐거움은 '소도시성애자'들의 기본 만찬이다. 언제 문을 닫을지도 모르는,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애달픈 집착인 셈이다.


곧 폐쇄될 것 같은 간이역에서도 역장들의 프로의식은 빛난다. 그 허름한 역에서 슬렁슬렁한들 누가 크게 탓하겠는가. 기차를 맞이하고 보내는 모습에서는 절도 속에 감춰진 철로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엿보인다. 뿌리 깊은 역사적 증오를 무장해제시키고야 마는 감동적인 모습이다.



"다카마쓰 공항에서는 분명 곰팡내가 날 것이다. 간이역의 쇠잔함이 공항의 크기만큼 증폭되어 있을 뿐, 그곳을 지나는 여행자가 공항에서 기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나 같은 소도시 마니아들은 안다. 그 허름함에 심장이 뛴다는 사실을. 쓰러질 듯 위태로운 건물과 한적한 길가의 LAWSON이 문득 가슴팍에 무언가를 꽂아놓을 때가 있다..."


때론 감상에 젖어 출발하는 비행기 안에서 끄적거린다. 소도시로 향하는 일본 국적의 비행기에는 유독 나이 많은 일본인들이 많다. 대부분 우리나라 관광을 끝내고 귀국하는 사람들이다. 왠지 모르지만 상을 치르고 돌아가는 사람들처럼 조용하다. 소도시의 적막함이 그대로 느껴진다. 어디로도 질주하지 않는 일본 소도시의 정지된 풍경은 내 사진과 글의 오래된 화두였다.



 

언젠가 갔던 시코쿠 여행의 첫날, 다카마쓰항 근처의 호텔에서 묵었다. 저녁을 먹고 7시부터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갑자기 주어진 시간은 대욕장의 물처럼 많게 느껴졌다.

온천에는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 한 분만 있을 뿐이다. 그는 힘들게 발 하나하나를 떼어 욕탕으로 들어갔다. 몸을 닦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개인사의 중차대한 임무를 완수한 사람의 그것처럼 보인다. 혹은 어떤 모호한 관념의 움직임 같기도 하다. 목욕을 끝내고 어두운 들판 한가운데 불을 밝히고 있는 로손에 가서 아사히 맥주와 오징어를 샀다. 일본의 오징어는 어째서 이렇게 맛있는 건지.
돌아오는 길에 반쯤 지구의 그림자로 덮여있는 달을 보았다. 달은 다다를 수 없는 이상향처럼 지평선위에 떠 있었다. 그 밑으로 차들의 붉은 미등이 끊어질 듯 이어져 갔다. 마을 어딘가에서 건널목 개폐기가 내려가는 종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는 어둠을 세차게 흔들어놓는다. 그 혼돈 뒤에 내려앉는 더 농밀한 어둠. 나는 시코쿠의 어느 시골에서 밤기차에 기댄 승객처럼 마을을 바라본다. 이름 모를 산은 몇 개의 농가를 집어삼킬 듯 서있다.



 

시코쿠 여행은 내 일본 소도시 여행의 결정판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외로웠고 그 외로움은 글쓰기의 자양분이 되었다.

둘째 날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우리는 선술집으로 향했다. 현지 가이드를 위해 만났던 마루타니 상이 가르쳐준 술집은 역 바로 옆에 있어 찾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술자리에서는 기차여행의 기대가 어우러진 대화가 이어졌다. 거나하게 취한 우리는 선술집을 나와 다카마쓰항으로 걸어갔다. 오후 8시면 대도시에서는 여전히 휘황한 불빛에 사로잡혀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일본에서도 가장 낙후된 시코쿠의 어느 소도시. 정전이 되기라도 한 듯이 도시는 적막감에 빠져 있었다.
간간이 빈 택시만이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갔고 자전거를 탄 노인들은 유령처럼 지나칠 뿐이었다.
혼자였다면 아마도 나는 어딘가로 전화를 했을 것이다. 가로등의 불빛마저 반갑게 느껴지는 이곳 소도시에서 내 삶은 잠깐 동안 정체되어 있다고. 그리고 나는 기꺼이 그 정체를 즐기고 있다고.
내 삶이 복잡한 도시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느낄 때 나는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여행에서 만나는 건 더 깊은 수렁이거나 고민의 다른 형태일 뿐, 어떤 해결책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찾게 되리라는 기대가 내 여행을 지속시킨다. 너무 오래된 불멸의 환상이다.




치바와 시코쿠, 그리고 홋카이도까지, 일본 여행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여행을 했다. 질로나 양으로나. 하지만 내 여행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렇게 글과 사진으로 또다시 그곳을 돌아보고 있으니.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본격적으로 일본 소도시 여행을 떠나볼 생각이다. 가방에는 편안한 옷가지와 성능 좋은 카메라, 그리고 종류가 다른 몇 가지 설렘을 넣고서. 물론 전국으로 뻗어있는 낭만의 레일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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