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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Jul 21. 2016

안동에서 보았네

아아, 왜 그리도 빛났던가




행복의 근처를 서성이는 오후,
나는 갈대밭 속에서
소리없는 음악을 느낀다




안동호는 수몰지구의 희생으로 생겨난 곳이다. 이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갔다. 예전에 한 TV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다.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수몰지구로 지정되어 떠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의 인터뷰라 인터뷰이에게서 그다지 깊은 슬픔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기억하는 자들의 애잔함은 서려 있었다. 한 할머니는 어렸을 적 뛰어놀던 숲이며, 강이며, 들의 지형을 떠올리며 말하는 중간중간 회한에 젖어들곤 했다.

지금 안동에 가면 당연히 수몰 전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40년의 세월이 흘렀으니까. 호수는 천년만년 지금 같은 모습으로 고이고 흐르고를 반복했을 것 같은 모양새다. 삶의 흔적은 물밑으로 사라져 가고 사람들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것이 최선이었던가는 묻지 말자. 지금 있는 그대로의 안동을 즐기기 위해 온 것이니.

계절과 상관없이 안동은 빛으로 반짝인다. 봄에는 화사한 꽃잎으로, 여름에는 싱그러운 초록 잎으로, 가을에는 찬란한 황금색과 겨울에는 눈시리고 처연한 햇빛으로. 여기저기 오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천 년의 수목들은 그 빛을 받아 반짝이며 이곳이 유서 깊은 고장, 안동임을 자랑하고 있다.






병산서원의 만대루. 서애 류성룡 선생이 지었다. 어느 것 하나 곧은 직선이 없다. 나무들이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누각을 만든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생긴 대로, 자라온 대로, 나무 하나하나의 개성이 살아있는 건축물은 시간을 두고 보아야 한다. 만지고 느끼고 냄새를 맡아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나무 그림자마다 다른 이야기가 깃드는 곳, 만대루를 비추는 햇볕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렀다.




병산서원 앞에는 낙동강이 흐른다. 그 앞에 병풍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병산이 있다. 물은 계절을 머금어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색이고 몇 개의 점처럼 사람들이 걸어간다. 수직으로 깎인 듯한 절벽을 마주하며 눈 쌓인 병산의 모습을 그려본다.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부러지는 가지들, 풀썩풀썩 낙하하는 눈의 무더기들,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병산의 햇볕 속에서 갈대가 빛났다. 조용히 걸어 들어가 그 황금빛을 받아본다. 삶에서 순수한 행복이라 부를 수 있는 순간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가만히 자연을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 서걱이는 갈대 속에서 그렇게 해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의 근처를 서성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빛나는 갈대 속에서 소리 없는 음악을 느낀다.





병산을 마주 보는 낙동강의 모래 위에서 아이들은 물수제비를 배운다. 낮게 더 낮게 던져야 한다. 리차드 바크의 갈매기가 멀리 보기 위해 높이 날았다면, 돌멩이들은 한없이 낮게 날아야 한단다. 수면에 몸을 부딪치고 가능한 많은 파문을 만들며.

이상하겠지만,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너무 성급하게 배우려 하지는 말거라. 언제가 도저한 삶들이 너에게 날아들 날들이 있을 테니. 멀리 갈 것만 같던 돌멩이도 결국은 물속으로 가라앉듯이.





외국에 나가 어마어마한 규모의 역사적 건축물을 볼 때마다 습관처럼 안도의 한숨을 쉰다. 건축법이 불가사의할수록 그 정도가 심해진다. 내가 본 대부분의 고대 건축물들은 다수의 삶에 기여하기보다는 지배수단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다. 게다가 인간의 노동력을 최대한 이용했을 터였다. 그러한 것들이 지어질 때 노예로 태어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나처럼 몸 쓰기를 싫어하는 자들은 또 등판에 얼마나 많은 채찍을 맞았을까. 봉정사의 만세루가 크다지만 그러한 위압감을 주는 석조건물 같지는 않다. 물론 소소한 노역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만리장성과 피라미드에 비하랴.





봉정사는 우리나라에 있는 목조건물 중에 가장 오래된 절이다. 만세루 앞에 있는 돌계단에서도 시간이 쌓아놓은 품격을 느낄 수 있다. 돌 하나하나 지나가는 이를 붙잡고 들려줄 이야기가 산더미와 같을 것이다. 계단 위의 나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고풍스러운 각도와 모양새로 살아간다. 시간의 무딘 칼은 봉정사를 더디게 다듬어왔다. 그러나 어느 예술작품보다도 아름답게.




빛은 근본적으로 침입자다.
포토그래퍼 역시






도산서원 앞 안동호를 건너면 의촌리에 있는 단이 하나 보인다. 조선 시대 지방 별과를 보았던 자리로 안동댐이 지어져 수몰되기 전에는 송림 속에 비각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10m 높이로 축대를 쌓고 소나무 몇 그루를 심었다. 사라진 것들을 악착같이 기억하기 위한 노력이 때론 한없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무수한 소나무들에 둘러싸여 있었을 정자를 생각하면 축대는 너무나도 빈약한 상상력이다.




도산서원에는 한석봉이 쓴 편액이 있다. 그의 이름을 들으면 궁금해지곤 했다. 과연 그는 글을 쓸 때 마다 떡의 교훈을 생각했을까. 어머니. 절 기능인으로 키우실 심산이셨어요? 라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어머니는 글에 담겨야 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글을 떡처럼 가지런하고 맛있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는지.





서원의 나무들은 다를 것이다. 아마도. 반듯하게 생긴 젊은 청년들의 글 읽는 소리가 우러우렁 들리는 곳에서 천 년을 살아온 나무들인 것이다. 꽃 속에도 지혜로 가득한 향기가 피어날 것이다.





열린 문으로 살포시 들어와 화선지 한 장 누워 있는 오후. 남의 집 마당에 들어선 느낌으로 사진 한 장을 남긴다. 빛은 근본적으로 침입자다. 포토그래퍼 역시.




서원의 문은 어느 곳보다도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책처럼 낡아가는 문 앞에서 할 말을 잃는다.




한없이 울다 보면 부용대의
서늘한 아름다움을
문득 더 깊게 느낄 것만 같다






단아하게 벗어놓은 저 흰 고무신의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 음표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저 벚나무는 봄이 되면 또 얼마나 예쁜 꽃을 피울 것인가. 방에 들어가 겨우내 안거할 신의 주인처럼 나무 또한 매력을 숨기고 또 하나의 계절을 지나간다.





월영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나무다리라고 한다.   

달빛이 아니라 햇볕 속에서 빛나는 다리 또한 멋진 모습이다. 어렵게 사진을 담을 때면 동공에 카메라가 있다면 어떨까 상상하곤 한다. 담고 싶은 모든 것을 고화질로 저장하는 것. 생각만 해도 부자가 된 느낌이다.





부용대에서 강을 건너는 체험을 했다. 아주 저렴한 뱃삯을 지불하고서. 안동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주인공은 부용대로 달려가 꺼이꺼이 목놓아 울었다. 이곳에 오니 나에게도 슬픈 일이 일어난다면 왠지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없이 울다 보면 부용대의 서늘한 아름다움을 문득 더 깊게 느낄 것만 같다.





하회마을에서 19금의 하회별신굿을 보았다. 굿을 통해 그들이 진정으로 기원하거나 응징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양반문화의 메카 같은 곳에서 조롱당하고 희화화되는 양반이라니. 성이 억압된 사회에서 음성적으로 폭로되는 현상과 같은 것이 아닐까. 양반에 대한 조롱이 생각보다 신랄하다.




왜 그토록 이곳의 삶들은
 산 밑에서
웅크리려 하는지







안동에서 강구항으로 가는 길. 34번 국도를 타고 바다를 찾아갔다. 햇빛은 강 위에서 부서졌으며, 중간중간 눈부심 때문에 차를 세워야 했다. 물론 물리적인 눈이 시려 운전을 하지 못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낙동강의 풍경은 그 찬란한 빛으로 마음을 젖어들게 만들었고 모른 척 지나갈 수만은 없었다.





안동의 산은 게으른 능선으로 여행자를 맞이한다.

저물녘, 산은 빛으로 물들고 이름 모를 색들이 하늘을 점령한다. 그 밑에 일가를 꾸리고 살아가는 집들이 소박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며 강구항으로 가는 도로에서 나는 문득 서글퍼졌다. 왜 그토록 이곳의 삶은 자꾸만 산 밑으로 웅크리려 하는지.





드디어 강구항이다. 바다는 언제와도 너른 품으로 나를 맞는다. 작아지면 바늘 꽂을 자리도 없는 게 인간의 마음이라 했다. 꽂아놓은 바늘조차 쓰러뜨리는 훈훈한 수평선.





돌멩이처럼 죽은 게.

살아있는 게들은 전부 좌판으로 올라가 있거나 수족관에서 허우적거린다. 좌판에서도 죽어있는 시늉을 하지만, 상인이 작대기를 가지고 괴롭히자, 이내 귀찮다는 듯이 그 긴 다리를 오므린다. 좀 더 오래 살아남기 위해 숨죽이는 법을 배운 게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곳, 바다를 보자고 찾아간 강구항에서 나는 게들이 줄지어 사람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긴 행렬을 마주했다. 삶이란 들에서도, 강에서도, 그리고 바다에서도 녹록하지 않다. 내가 본 안동의 빛은 이곳에서 소멸해간다. 강구항의 무섭도록 짙은 바다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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