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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Aug 08. 2016

여행가이드북을 만든다는 것

출판계 3D 업무 중 하나인


여행가이드북을 만드는 일은 여행만큼이나 낭만적인 일이라 생각했다.


독자의 컴플레인은 파퀴아오의 주먹처럼
각도를 가리지 않고 날아들었다.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한때 나는 여행가이드북의 편집자였다. 제법 잘 나가는 여행서 시리즈를 담당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잘 나서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팀에 합류하기 전에 이미 가이드북은 잘 팔리고 있었고, 머리를 긁적거리며 숟가락을 얹었을 뿐이다.

가이드북이 잘 판매되었던 건 무엇보다 시류를 탔기 때문이었다. 회사의 사장은 주 5일 근무가 확산되어가던 시기 취미실용서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여행서 시장은 조금씩 장작이 쌓여가고 있었다. 누군가 불을 붙여주기만을 기다렸는데, 운 좋은 사장이 그 장작더미 옆을 지나다 그만 발견하고 만 것이었다. 나는 여행서 시장이 그렇게 활활 타오르고 있을 때 회사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이드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다른 일을 하다 단행본 출판사에 합류했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켠 듯한 갈지자 행보는 아직 끝나지 않아 지금은 또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을 하고 있다.

어쨌건 여행가이드북을 만드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에세이류의 책에서 오탈자가 나오면 대부분의 독자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곤 한다(당연히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인생이 아름답다거나, 내일부터 희망이라는 찬가를 읽어가며 사소한 일에 흥분할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가이드북에 잘못된 정보가 실리기라도 하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여행자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해버리기 때문이다. 반나절을 들여 목적지로 갔는데 생각하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된다면 어쩌겠는가. 뭐 그럴 수도 있죠, 라고 대범하게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것이다. 어느 날은 편집부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면 나중에 그 책임을 톡톡히 져야만 한다.

     

 “거기 00출판사죠? 가이드북 담당자 바꿔주세요!”

     

격앙된 목소리에 끌려가듯 전화를 받은 나는 30분이 넘게 훈계를 들어야했다. 호주에 간 여행자였는데, 가이드북에는 분명 기차에 침대칸이 있다고 나와 있는데, 기차를 타러 갔더니 없어서 10시간 넘게 고생을 했다는 이야기였다. 급기야는 소비자보호원을 찾아가겠다고 했다. 30분 동안 “내가 영어를 잘해서 그나마..” 라는 이야기를 서른 번은 넘게 들은 것 같다.

당장 담당자를 광화문 사거리에 효시해버리겠다는 투로 전화를 하셨지만, 편집부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 외에 달리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전임자가 편집한 책이고 취재한 작가가 따로 있긴 했지만, 당장 응대를 해야하고 어찌 되었건 현재 가이드북 시리즈를 책임지는 편집자로서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보상으로 자사에서 출판된 다른 책을 보내드리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가이드북의 정보는 책을 인쇄하는 순간에도 바뀌기 때문에, ‘현지에서 다시 한 번 확인을 요한다’ 라는 문장을 허벅지에 문신을 세기는 심정으로 써 놓았지만, 독자의 컴플레인은 그와 상관없이 파퀴아오의 주먹처럼 각도를 가리지 않고 날아들었다. 전해 들은 이야기이긴 한데, 모 출판사의 한 편집자는 <불만제로>라는 TV 프로그램에까지 출연하는 굴욕을 겪었다고 한다. 다행히 얼굴이 아닌 양 다리가 브라운관에 보여지긴 했다. 여행가이드북을 만드는 일이 여행처럼 즐거운 경험만 있는 게 아님을 알려주는 일화이다.


 


정보가 잘못되면 푸근한 인상으로 이해해주는 독자들은 없다. 여행지에서 금쪽 같은 시간을 허비하기 때문이다.



가이드북을 만들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은 지도를 보는 일이었다. 저자가 써준 정보가 지도에 제대로 표기되어 있는지 찾는 건 생각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개미도 기어가기 힘든 지도 위의 좁은 골목길을 장시간 보고 있으면 동공에 지진이 일어난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 편집자가 지도교정을 보다 속이 울렁거려서 결국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는 과장이 아니다. 여행자로서 보는 것과, 정보를 확인하며 꼼꼼하게 체크하는 것은 천양지차였다. 더군다나 가상의 파퀴아오는 옆에서 언제든지 주먹을 날릴 기세가 아닌가.

나는 독자의 민원 전화를 받고나서 강박관념 같은 게 생겼다. 책이 인쇄되기 전까지 긴장의 연속에서 살아야 했다. 게다가 가이드북을 만들기 전까지 지도라는 걸 자세히 본적이 없었다. 심지어 여행지에서도 지도를 보지 않았다. 감으로 이동해서인지 실수도 잦았지만, 우연히 뜻하지 않은 발견도 했었다. 그런 게 여행의 재미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에는 여행지에서 전쟁을 수행하듯 지도를 보시는 분들도 있는 법이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인쇄용 지도를 확인한다는 건 특히 인내를 요하는 일이다. 한번 나가면 재판을 찍을 때까지 거의 수정이 불가능했다. 대부분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책 속에 들어있는 수십 장의 지도를 본문의 정보와 일일이 대조해 보는 편집자를 옆에서 지켜보는 일은 인간이 수생동물로 퇴화하고 있는 현장을 보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눈은 튀어나오고 목은 길어지는.. 아, 내 젊은 날이 다윈의 진화론에 반기를 드는 일터에서 파묻히게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가이드북을 만들 때, 오랫동안 동행할 수 있는 마음 맞는 작가를 섭외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두 번째 어려움은 작가였다. 밤길에서 가장 무서운 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편집자를 가장 괴롭히는 건 가상의 주먹왕 랄프보다 가이드북의 게으른 저자들이었다. 물론 존경이 저절로 우러날 정도로 성실한 저자들이 많았다. 가이드북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성실함이기 때문이다. 여행에세이와 달리, 감성적인 글과 화려한 사진을 찍는 기술이 없어도 기본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재배열하는 어느 정도 스킬만 있으면 가능하기 때문에 가이드북 저자의 문턱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그렇긴 해도 출판사들의 경쟁이 치열해지다 보니, 이미 스킬과 성실함을 갖춘 저자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가끔씩 여행가이드북을 쓰겠다고 회사로 메일을 보내는 분들이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책으로 출간할 수준이 못되었지만,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매혹적인 글과 사진을 보여주며 아직 접하기 어려운 현지 정보를 가진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껍데기가 훌륭하다고 속까지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과일 상자 아래에는 언제든지 썩거나 크기가 다른 과일이 숨어 있는 법이다.


 


마감이 끝나면 나를 기다릴 달콤한 휴식, 그저 나를 기다릴...


책은 마치 엄마 뱃속에서 4년을 살다 나온 아기처럼,
적지 않게 지쳐보였다.


어느 날 오다쿠들만 알고 있는 도쿄의 핫 스팟들을 소개하고 싶다는 메일을 받았다. 여행가이드북을 쓰겠다는 사람치고는 문장도 괜찮았고, 사진이 훌륭하지는 않았지만, 디자인이 가미되면 그럭저럭 봐줄 만 했다. 무엇보다도, 마니아들만 알고 있는 정보가 훌륭했다. 더군다나 그때까지 한국시장에서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으니 불현듯, 작가가 사무실에 처음 들른 날이 생각난다. 요즘처럼 무더운 여름이었다. 밖은 땡볕이었는데 34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작가는 그런 날 검은 가죽 잠바를 입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굵은 두께의 뿔테안경을 쓰고, 사막의 넝쿨 같은 머리로 나타났다. 분명 무언가가 형질변경이 되고 있는 듯한 퀘퀘한 냄새를 풍기며 사무실에 들어왔다. 나는 그런 모습조차도 마니아의 자질이라 착각했다. 그와 계약을 하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전대미문, 금시초문의 비서 같은 가이드북을 뽑아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물론 초창기 경험이 없었던 나의 크나큰 오판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취재가 끝나서 계약 후에 한 번만 더 도쿄에 갔다 와 5개월 안에 책을 낼 수 있다고 장담했던 작가의 책은 그 후로 4년이 지난 다음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것도 순산이 아닌 제왕절개로 말이다. 처음에 취재가 끝났다고 했던 정보는 숍들이 사라져버려 다시 취재해야 했고, 책은 마치 엄마 뱃속에서 4년을 살다 나온 아기처럼, 적지 않게 지쳐보였다. 그렇게 힘들게 나온 책이 잘 팔리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속세를 떠나 자기 길을 찾아간 자식처럼 독자들에게 금세 잊혀지고 말았다.

     


기획이 성공해 시장의 호응을 얻으면 기획자는 날아갈 것처럼 기쁘다.


 


물론 세상일이 그렇듯,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이드북을 만드는 일은 힘들었지만, 보람이 더 많았다. 가장 큰 성취감은 내가 기획한 여행서가 시장에서 빛을 보았을 때이다.

지금부터 6년 전이니 아직 우리나라에 오키나와 가이드북이 나오지 않았을 때였다. 우연히 한 여행사에서 일하는 가이드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오키나와 한 곳만 가이드한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전 세계 전 지역을 통틀어 우리나라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여행서는 도쿄와 오사카지역이었다. 오키나와는 위치 자체도 생소한 곳이었다.

여행서 한 권을 만들려면 수천만 원의 투자금이 들어간다. 자칫 오판하면 매출이 크지 않은 출판시장에서 적지 않은 투자금을 날리고 경영진에게 '일 못 하는 인간’으로 찍힐 수 있는 상황이다. 어떤 지역의 여행객이 늘어난다고 반드시 여행서가 잘 팔리리라는 보장도 없다. 아무 곳이나 책으로 낼 수 없는 이유였다.

가이드는 전생에 오키나와 사람이었다고 확신할 정도로 그곳이 주는 매력에 푹 빠져있었다(지금 와서 생각하니 약간 그곳 사람들의 분위기를 닮은 듯도 하다). 어느 날 국제거리의 횡단보도에 서 있는 데 뜨거운 전류 같은 게 땅속에서 올라와 자신을 전율시켰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당장 가이드북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몇몇 출판사에 기획안을 보내봤지만, 수익성이 없다며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나는 한 사람이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 장소에는 분명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어떻게 독자들이 공감하게 하느냐가 편집자의 역량이라고 믿었다. 지금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그 후로 회사의 경영진을 설득해 오키나와 가이드북을 만들 수 있었다. 오키나와는 현재 일본지역의 여행서 중 가장 잘 팔리는 여행서 중 하나가 되었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미지의 세계, 그 문을 여는 것, 또 그것을 많은 독자로부터 인정받는 것은 여행서 기획자로서 크나큰 보람이 아닐 수 없다.



 

여행가이드북을 만들고 나면 마치 그곳에 다녀온 것 같다. 간접 경험을 하기에 이만한 것이 또 있을까.


여행서의 편집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존재이다. 책을 기획하고 작가를 섭외해 출간을 진행하는 영화의 감독 같은 존재이지만 그들처럼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편집자는 작가가 취재를 잘하고 디자이너가 편집을 잘할 수 있도록 서포트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에 가깝다. 하지만 여행가이드북을 편집하는 일이란 책이 한 권 한 권 늘어날 때마다 주름과 새치도 그만큼 늘어나는 일이다. 일년에 나이를 남들보다 서너살 더 먹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심지어 마감 때면 피를 팔고 있는 것 같다는 편집자도 생겨날 정도니까.

오늘도 수많은 출판사에서 여행서를 편집하느라 날밤을 새우는 편집자가 적지 않을 것이다. 여행가이드북은 다른 책과 달라 출간 시기에 굉장히 민감하다. 성수기를 놓치면 매출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성수기가 되면 잡지발행처럼 한바탕 전쟁을 치룬다.

여행서 시장이 커지면서 가이드북 편집자의 수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여행작가로 성공하는 책 등은 시장에 제법 있지만, 어디에서도 여행가이드북 편집자에 관해 이야기하는 글은 만나보지 못했을 것이다. 작가가 속을 썩이고, 독자의 컴플레인에 긴장하더라도 자신이 만든 여행서가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보여 울고 웃고 하는. 여행자들에게 좋은 추억을 주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땅의 가이드북 편집자들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쓴다. 그들이 외형적인 퇴행을 멈추고 다시 사람으로 진화의 방향을 선회하길 희망하며.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체계적인 출판시스템이 필요하다.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는 편집자들을 위해 여행가이드북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선진적인 출판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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