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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Sep 24. 2016

코트다쥐르에서 잃어버린 것

과거에서 온 분실물


그의 마세라티만이 리조트 주차장에서 강한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이태리에서 온 한 마리의 검은 종마처럼.




프랑스의 코트다쥐르에서 휴가를 보낸 적이 있었지. 비수기의 한때, 우리 외엔 아무도 없었네. 노을이 질 때마다 마음은 허허로워졌네. 수영장에 버려진 돌고래 튜브처럼 울고 싶었을 거야. 시간은 지천으로 남아서 어딘가에 담아두고 싶을 정도였고 빌딩을 서너 채 더 살 수 있는 경제적 여유도 있었는데 왜 그랬을까.


노인은 살짝 술에 취한 듯 보였다. 와인잔을 돌려가며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이어가고 있다. 저녁해가 기운 태안반도가 코트다쥐르를 연상시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이곳은 질척이는 갯벌이 보일 뿐이니.




불쑥 튀어나오는 사춘기 소년을 배불뚝이 몸속으로 구겨 넣으며 나는 인생의 뒤안길 같은 곳에 서있는 사람처럼 지독한 허무와 함께 있었네. 고독조차 내 편으로 만들고 싶을 만큼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혔지. 그런 느낌은 어떤 전조 같은 거라네. 텅 빈 리조트의 수영장을 바라보며 난 문득 깨달음 하나를 얻었으니까. 무서운 진실 하나를 말이지.


진실이 언제나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술이 들어간 자에게서 나오는 진실은 그럴 확률이 크다.




이제까지 난 내 운명과 거래를 하고 있었다네. 그리고 그 거래는 항상 공정하다고 믿었지. 인간은 무엇인가 얻게 되면 반드시 그에 합당하는 무언가를 잃게 되지. 아무리 버둥거려봤자 피할 수 없다네. 노력과는 상관없네. 운명은 인간의 땀 같은걸 원하는 게 아니야. 항구로 오는 폭풍이 인과응보를 실현하기 위해 오는 것은 아니니까. 억지로 이름을 붙인다면 인간의 정의와는 상관없는 자연의 섭리라고나 할까. 나는 제법 순응하며 살아왔다고 믿었어. 적당히 얻었고, 그에 합당한 걸 빼앗기면서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는 식탁 위에 놓인 자신의 양 손을 바라봤다. 버린 것과 움켜쥔 것을 가늠하기라도 하듯. 어두워진 바다만이 저 멀리서 그의 행위를 유심히 보고 있는 듯했다. 이따금씩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이 날아와 리조트 지붕으로 내려앉았다 이내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을 번들거렸지만, 어떤 대상도 그들의 관심사항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순간에도 그게 뭔지 알 수 없다네. 더욱이 조그마한 성공에라도 취한다면, 뭔가 하나 없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더군다나 얻은 것과 비등해 보이지도 않는다네. 하찮아 보일 뿐이지.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그것이 다시 나타나곤 하지. 영원히 사라지면 좋을 텐데 잔인하게도 그렇지 않다네. 노크소리 한번 내지 않는다네. 문을 열면 불현듯 그것이 앞에 놓이게 되는 거지. 물론 오랜 시간이 흐른 뒤라네. 깨닫고 나면 후회가 깊은 상처를 만들 때쯤이지. 오래전에 헤어진 지인을 스친 것처럼, 얼굴은 변해있고, 긴가민가 하게 되지.




운 좋은 이들은 문 앞에 놓인 걸 알아보지 못한다는 거야. 아마도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을 거야. 그런 뜻에서 운명이 무언가의 대가로 가져간 건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네. 수명을 빼앗아간들 얼마를 빼앗겼는지 모르니 실익을 계산하기 어려운 것처럼. 어쩌면 영원히 모르고 사는 게 축복받은 삶일지도 몰라.           

하지만 그런 행운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건 아니지. 언젠가는 반드시 커다란 회한이 되어 우리에게 나타난다네. 물론 다시 소유할 수 없는 형태나 양식으로 말이지. 얄궂게도 인생에서 지독히 커다란 실패를 맛본 순간이 될 가능성이 크지.

그때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네. 되돌릴 수 없는 기회나 잃어버린 성공의 가능성 때문에 그처럼 슬픈 게 아니라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얻은 것에 비해 잃어버린 건 보잘것 없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작은 것은 의미를 부여하면 할수록 너무도 커지곤 하지. 세속적인 성공이나 부의 축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라네. 그 가치를 한번 인식하게 되면 영원히 잊을 수 없지.





나는 내 부의 축적으로 내가 잃게 된 게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믿었네. 진실한 사랑. 아이들과의 추억. 그리고 돈 하고 바꿔버린 꿈. 뭐 그런 것들이지. 그래서 두려운 게 없었지. 하지만 아니었어. 프랑스 해변에서 문득 깨달은 거지. 운명과의 거래는 공정하지 않았다네. 훨씬 더 가혹하게 내 것을 수탈한 것이라네. 그것을 깨우쳐주기 위해 이국의 바람이 그날 마음속으로 들어와 소용돌이를 일으킨 것이지. 그리고 의식 밑에 가라앉아 있던 어두운 심연을 보게 한 거고. 아주 젊은 시절 내 곁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 갔던 것들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하구에서 퇴적돼 버린 것들을.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것들이지. 나와의 재연결을 위해 아우성치지 않는다네. 내가 다가갈 수 없는 곳에서 물끄러미 그리고 측은하게 나를 바라볼 뿐이지. 젊은이. 그게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있겠나?
  




과연. 그와 같은 부를 거머쥐게 되면 알 수 있을까. 얻은 것이 없으니 그처럼 잃어버린 것도 없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바다는 우리의 대화에 더는 관심 없다는 듯 더 멀리 뻘을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의 마세라티만이 리조트 주차장에서 강한 존재감을 발하고 있었다. 이태리에서 온 한 마리의 검은 종마처럼.


코트다쥐르와는 너무도 먼 태안의 휴양지에서 만난 노신사는 아마도 우리가 믿고 싶은 인과응보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난한 젊은이가 죽을 때까지 경험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그는 술기운을 빌어 처음 본 사람에게 자신만이 경험한 삶의 비의 같은 걸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난 그가 깨달았다는 걸 알지 못하고 그에 따른 슬픔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가 말한 것처럼 나는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들을 문 앞에서 매일매일 지나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외판원을 만난 듯 뚱한 얼굴을 하고서. 물론 알아본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을 것이다. 그의 말 대로라면 앞으로 나는 더 잃어야 할 것이 많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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