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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Sep 18. 2017

나는 종종 검은 것들에 빠져든다

늦여름, 증도 여행



밤이 되자 증도의 자연은
모든 스위치를 껐다.
무리에서 이탈한 새 한 마리가 허둥지둥
어딘가로 날아갔을 뿐.




전라남도 신안에 있는 증도로 늦은 휴가를 떠났다. 예상은 했지만 증도는 정말 먼 섬이다. 가도 가도 내비게이션의 시간은 제자리였고 나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내내 그곳에 있는 엘도라도 리조트를 '멀도라도'라고 불렀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낙조에 그만 입이 쩍 벌어지고 말았다. 발리나 코타키나발루를 연상시키는 일몰이었다. 이곳의 해가 항상 불타는 오렌지빛으로 저물리는 없다. 그래도 해 질 녘이 되면 또 어떤 장관을 연출할지 아침부터 기대감이 몰려왔다. 한정된 시간에 귀중한 것을 챙기는 게임처럼 낙조를 배경 삼아 수백 장의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우리 아이들은 모래놀이를 스마트폰의 게임만큼 좋아했다. 해가 기울건 저녁놀이 핏빛을 뿜어내건 아랑곳하지 않고 모래성을 허물고 세우고를 반복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되자 증도의 자연은 모든 스위치를 껐다. 무리에서 이탈한 새 한 마리가 허둥지둥 어딘가로 날아갔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은 여행지의 아침이다. 돌아갈 날은 아직 여유 있게 남아있고 둘러볼 곳들이 여행의 향기를 연신 뿜어대며 나를 기다린다. 아침 식당의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마저 기대감을 고조시키고 머신에서 갓 뽑아온 커피 한잔으로도 솔솔한 행복감에 젖는다.


증도에서 맞이하는 아침도 예외는 없었다. 여행지 숙소의 커튼으로 스며드는 아침햇살은 언제나 선물처럼 느껴진다. 햇살은 책상이나 카펫, 침대 모서리를 지나 조용히 여행자의 마음속에도 놓여지는 것이다.





리조트는 가격에 비해 그다지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것 같진 않다. 오랜 시간의 흔적이 여기저기 얼룩처럼 묻어있다. 전립선염을 앓고 있는 광장 앞 분수는 조만간 욕구불만을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쿨럭쿨럭거리며 힘없이 물을 쏟아내고 있다. 음식도 잘 먹었습니다 라고 기분 좋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뷰 하나는 만족한다. 바다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빠져나가는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성수기가 끝나서 그런지 구내 어딜 가도 한적한 분위기다. 상인들의 표정에는 활기 대신 나른함이 묻어있다. 심드렁함이 상업적인 친절함으로 바뀌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증도에서 뭔가 에너제틱한 관광을 기대한다면 애초부터 번지수를 잘 못 찾은 것이다. 슬로시티라는 별칭답게 증도에는 딱히 관광지라 부를 만한 곳이 없다. 성수기가 지난 해변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기울어 쓰러질 듯한 파라솔 밑으로는 여기저기 수거되지 못한 지난여름이 흔적이 뒹굴고 있다. 사람들과 여름날의 흥겨움이 빠져나간 해변에는 어디로도 가지 못한 모래와 바다만이 덩그렇게 남아있고 여의도 면적의 두배라는 거대한 염전에서는 소금만이 느리게 단합하고 있는 중이다.


눈에 보이는 능선이며, 들판과 밭에서는 여유로움과 쓸쓸함, 게으름 등등이 적당한 비중으로 섞여있다. 그 느긋한 공기를 병에 가두고 '증도에어' 라는 라벨을 붙이는 행위예술을 생각해보다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만다. 생의 고달픔을 잠시 내려놓은 여행자의 무의미한 장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의 테마를 굳이 붙이자면 실루엣 트래블 정도 되겠다. 결과적으로 남은 사진에는 아이들의 실루엣만 가득하니. 큰녀석은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고 불만투성이다. 점프하는 사진을 이리 멋지게 찍어줬는데도.


여행시즌이 돌아오면 증도의 낙조와 갯벌이 자주 마음을 들썩이게 할 것 같다. 아이들이 뭐라 해도 드러나지 않은 것들이 힘 있게 말하는 실루엣의 매력 때문이다. 나는 종종 검은 것들이 감춘 무언가에 빠져들곤 한다.










heat05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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