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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Jun 19. 2016

여행, 그 불멸의 환상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우리는 선술집으로 향했다

여행에서 만나는 건
더 깊은 수렁이거나
고민의 다른 형태일 뿐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우리는 선술집으로 향했다.
마루타니 상이 가르쳐준 술집은 역 바로 옆에 있어 찾는데 그리 어렵지 않았다.
 
선술집에서는 회가 안주로 등장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물고기가 접시에 놓인 채 아가미를 헐떡거리고 있는 게 그리 즐거운 눈요깃거리는 아니었다. 녀석이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눈빛이었다.
이상하게도 수족관에 있는 놈들보다 더 또렷해 보였지만, 나는 그런 기분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묘한 가학이 지배하던 그날의 술자리는 지느러미가 움직임을 멈추던 순간과 함께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변했다.

우리는 앞으로 여행할 기차 노선에 대해 기대에 찬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혹은 여행의 낭만에 대해.
 
거나하게 취한 우리는 선술집을 나와 다카마츠항으로 걸어갔다. 오후 8시면 대도시에서는 여전히 휘황한 불빛에 사로잡혀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일본에서도 가장 낙후된 시코쿠의 어느 소도시. 정전이 되기라도 한 듯이 도시는 적막감에 빠져 있었다.
 
간간이 빈 택시만이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으로 사라져 갔고 자전거를 탄 노인들은 유령처럼 지나칠 뿐이었다.
 
혼자였다면 아마도 나는 어딘가로 전화를 했으리라. 가로등의 불빛마저 반갑게 느껴지는 이곳 소도시에서 내 삶은 잠깐 동안 정체되어 있다고. 그리고 나는 기꺼이 그 정체를 즐기고 있다고.

선술집을 나올 때 수족관에는 서너 마리의 물고기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다가올 운명을 모르는지, 조바심이나 걱정 따윈 없다는 듯, 녀석들의 움직임은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옆에 있던 동료가 어느 순간 사라져 식탁 위에서 숨을 헐떡이게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이 접시 위에 오르기 전까지 느긋한 유영은 영원하리라 생각할 것이었다.
 
내 삶이 비린 도시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고 느낄 때 나는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여행에서 만나는 건 더 깊은 수렁이거나 고민의 다른 형태일 뿐, 어떤 해결책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찾게 되리라는 기대가 내 여행을 지속시킨다.


너무 오래된 불멸의 환상이다.






heat050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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