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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 715

사람과 사랑으로 가득했던

by 유현

Unit 715 / 555 Flinders Street.


1년 동안 멜버른에 머물면서 살았던 셰어하우스의 주소다. 셰어생은 한국인 여성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나는 입주한 첫날부터 내 방을 비우는 마지막 날까지 이 집에서 무한한 환대와 안정을 느꼈다.


셰어생의 대부분은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유자이므로, 그들이 최대로 머물 수 있는 기간은 워킹홀리데이 비자의 유효기간인 1년이다. 나는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갖고 있는 1년 동안 한 번의 이사도 하지 않고 715호에만 머물렀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사가 귀찮아서.)


1년 동안 715호에 몇 명의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을까 생각해 봤다. 머물렀던 사람이 떠나고 새로운 사람을 맞는 것에 대해 무감각해진 나를 문득 발견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소중한 인연들에 대한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텍스트로 남겨야겠다고. 그것이 이 글을 쓰는 이유다.


그러니까 715호의 집 구조는 이렇다. 4개의 독방이 있고, 모두가 자기만의 방을 가지고 있다. 가장 큰 마스터룸 독방에는 화장실이 달려있다. 마스터룸을 사용하는 사람은 본인 방에 있는 화장실을 사용한다. 나머지 세 사람은 거실에 있는 화장실을 공용으로 사용한다. 거실로 나오면 공용 식탁과 의자들이 있고, 싱크대, 주방용품 등 생활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갖춰져 있다.


2024년 3월 중순쯤, 내가 처음 715호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Y, J, 그리고 A가 살고 있었다.(나는 집에서 항상 막내였기 때문에 앞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언니다. 하지만 굳이 언니라는 호칭을 뒤에 붙이진 않고, 대신 그들의 이니셜을 사용하겠다.) Y가 나간 후에는 S가 들어왔고 한동안 715호에는 S, J, A,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서 살았다.


Y

Y는 715호에 가장 짧게 머물다 간 사람이다. Y는 내가 입주하기 1주일 전에 들어와 생활하다가 내가 입주하고 1주일 뒤에 나갔다. 집 바로 뒤에 기찻길이 있었는데, 기차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견디지 못하겠다는 이유에서다. 내가 Y와 단둘이 가진 추억이라고는 집 근처의 어느 한식당에서 엄청나게 짠 가지볶음을 먹은 것뿐이다. Y가 이사를 간 이후에도 종종 다른 친구들을 껴서 카페를 가거나 밥을 먹기도 했는데, 어느 이유에서인지 같은 멜버른 시티에 살면서도 꾸준히 인연을 이어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Y가 있는 곳에는 항상 좋은 사람들이 존재했고, Y는 항상 분위기를 밝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의 영어 이름이 ‘Joy’인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J

J는 내가 조금 어려워했던 사람이다. 3개월을 한 집에서 함께 살았는데도 끝까지 벽을 허물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던 사람이다. 이유는 모르겠다. 가끔 J가 강한 대구 사투리를 섞어 이야기를 할 때는 꼭 화가 난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가 쌀쌀맞은 사람이 절대 아니라는 것은 안다. 오히려 따뜻한 사람에 가깝다. 워홀 생활의 초기였던 어느 날 밤, 계속되는 구직 생활에 지쳐 방에서 소리 없이 혼자 운 적이 있다. 다음 날 나는 J에게 구직 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얘기하며 전날 혼자 운 일에 대해 말했다. 바로 그날 오후 J는 본인이 일하는 카페에서 샌드위치며 패스츄리며 온갖 맛있는 빵들을 가져와 내 냉장고 칸에 꽉꽉 채워놨다. 그리고 그 빵들에 대해서는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달 반 동안의 구직 생활 후 드디어 카페 일을 구하게 되자, 나에게 ‘그동안 고생했던 것이 다 여기서 일을 하기 위함이었다고 느낄 정도로 그곳이 좋은 일터였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준 사람도 J다. 내가 카페 트라이얼을 망쳤던 날, J는 기운이 없는 나를 마켓에 데려가 귤을 사줬고(귤을 파는 아저씨가 마커를 사용해 귤껍질에 스마일 페이스도 그려줬다.) 우리는 함께 핫도그를 나눠먹었다.


A

A는 멜버른에 위치한 대학교의 학생이었다. A와 나는 새로운 음식에 도전하기를 좋아했다. 우리는 서로 식성도 잘 맞고 가치관 또한 잘 맞아서, A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항상 얻어가는 것-지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이 있었다. A는 나의 세계를 넓혀주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우리 둘 다 미국의 어떤 범죄 다큐멘터리를 시청한다. 그러고는 미국의 사건과 한국의 사건을 비교하면서 사법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는 깔깔 웃는다. 나는 A 덕분에 실화 범죄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에 흥미를 갖게 됐고 우리는 자주 그 얘기를 했다.) A는 715호에 살았던 사람들 중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다. A만이 나의 유머코드를 이해했고 또 자주 나를 웃겼다. A는 나를 이해했다. 나도 A를 이해했다. 우리는 서로의 웃음, 분노, 슬픔 포인트를 이해했다. 나는 A를 동경했던 것 같다. A로부터 항상 배울 점을 찾고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날이 이상하게 따뜻했던 8월의 어느 날, A와 공원 잔디밭에서 노래를 틀어놓고 한참을 누워있던 것을 떠올린다.


D

D와는 고작 2개월 밖에 같이 살지 않았지만 현실적인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해준 사람이다. 개발자로 일하고 있는 D는 직장으로부터 잠시 휴식을 취하고 한국에 돌아갈 때 필요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 호주에 왔다. D는 한국에서 자신이 몸 담그고 있던 IT 분야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IT 관련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는 나는 그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들었다. D는 A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으로 나와 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무한한 이상주의자인 나는 D와 얘기할 때만큼은 현실주의자가 되곤 했다. 그는 언제나 나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강조하며 여러 조언을 해주는 고무적인 존재였다. 여러 주제의 이야기들이 오가던 어느 날 밤, D는 나에게 “지금 네 나이에 이런 이야기를 같이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흔치 않아.”라고 했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약간의 짜릿함을 맛본 것 같다.


L

L와는 거의 6개월을 함께 살았다. 한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했던 L는 성격도 아이처럼 해맑았다. 나보다 3살이 많은 언니 었지만, 어떤 때에는 나보다 어린 사람처럼 응석을 부리기도 했다. 나는 L의 맑은 웃음을 가장 좋아했다. 내가 하는 별 것 아닌 이야기에 눈을 활짝 접고 푸하하 웃는 L를 보면 마치 내가 유머감각이 꽤 좋은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L는 호주에 조금 더 머물고 싶다며 세컨드비자를 취득하기 위해 번다버그 농장으로 떠났다. 호주에서 차일드케어를 해보고 싶다는 목표를 갖고 농장에서 온갖 궂은일을 해내는 L를 존경했다. 나는 어쩌면 L의 단순함과 실천력을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생각과 걱정이 너무 많은 내가 섣불리 시도하지 못하는 것들을 L는 고민 없이 실행했다. L가 세컨드비자 신청을 위한 농장일을 모두 마치고 브리즈번 도시로 나왔을 때 나도 마침 브리즈번 여행을 하고 있었으므로 우리는 브리즈번 시티의 어느 카페에서 만남을 가졌다. 그때 L가 선물로 준 리치는 내가 살면서 먹어 본 리치 중에 가장 달고 맛있었다.


H

H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었다. 한국에서 나와 같은 도시-그것도 버스로 10분이면 가는 바로 옆 동네-에 사는 H는 운동을 사랑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는 말이 참인 것을 H를 보며 깨달았다. H는 거의 매일 러닝을 했다. 우울한 기분이 들 때면 일단 달린다고 했다, 그러고 나면 잡생각들이 없어지고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고. 나는 H의 말솜씨와 유머, 넘치는 에너지를 좋아했다. H는 항상 나를 장난스럽게 ‘냥냥이’라고 불렀다. H와 나는 커피와 패스츄리를 좋아했고, 둘 다 먹는 것을 좋아했다. 데이오프날이 겹치면 함께 카페를 가고 마켓을 구경했다. 어느 날 영어이름을 고민하던 H에게 나는 ‘Hazel’이라는 영어이름을 지어주었다. 갈색 머리에 히피펌을 한 H는 눈동자도 밝은 갈색이었는데, 한국인에게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눈동자색을 가진 H에게 ‘Hazel’이라는 이름이 완벽하게 어울렸다. H와 내가 나누는 이야기의 폭은 아주 다양했다. 어느 저녁, 단 둘이 식탁에서 얘기를 하다 나는 H에게 나의 결핍과 강박, 상처들에 대해 얘기했다. H는 아주 좋은 리스너가 되어주었다. 내가 멜버른을 떠나는 날 아침, 나에게 선물과 편지를 건네주며 눈물을 참으려고 했던 H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M

M은 H와 동갑이지만 아주 다른 에너지를 갖고 있다. M은 아마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차분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M의 낮고 조용한 목소리를 좋아했다. 다소 느릿한 속도로 차분하게 말하는 M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나의 속얘기를 마구마구 꺼내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와 함께 있을 때면 나는 아주 수다스러워졌다. 언젠가는 둘이서 쉬지 않고 식탁에서 4시간을 대화한 적도 있다. (M은 주로 본인의 방에 있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이것이 우리가 대화한 가장 긴 시간이다. 대화의 질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는 아주 좋은 리스너이자 상담사였다. 실제로 한국에서 상담사로 일했던 M은 직업윤리 의식이 대단했다. 나는 그 점을 존경한다.


S

나는 S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마 나는 S를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S는 나와 너무 달랐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말버릇부터 그를 이루고 있던 거대하고 견고한 가치관까지. S는 내가 715호에 입주하고 3일 뒤에 입주했다. 내가 715호에 있었을 동안 S도 나와 함께 715호에 살았다. 거의 1년을 같은 집에 살았지만 나는 그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이 맥락에서의 ‘이해’란 ‘납득’, ‘수용’의 개념보다는 ‘파악’, ‘해석’의 개념에 가깝다.) S는 애인 얘기 하기를 매우 좋아했다. S는 회사에서 있었던 안 좋은 일을 불평하기 좋아했다. 나는 매번 그 이야기들을 듣기 싫은 티를 냈고, 우리는 거의 싸울 뻔하기도 했다. 초반에 나는 S에게 좋은 조언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모든 노력들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로는 크게 마음을 쓰지 않았다. S와는 피상적인 얘기만 하려고 했다. 그렇다고 S가 못된 사람인 것은 아니다. 나는 못된 사람을 끔찍이 싫어하는데 S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범주에 속했다. 분명 나는 S의 여러 모습을 좋아했다. S가 장난스럽게 나를 ‘황냥’, ‘학생’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았다. S가 끓인 매운 틈새라면이 좋았다. S가 나의 농담에 크게 웃는 것이 좋았다. S의 작고 귀여운 뜨개선물들이 좋았다. 나는 S에게 쓴소리를 하면서도 누구보다 S의 행복을 바랐던 사람이다. 나는 S의 최저점(rock bottom)을 목격했고, 그로부터의 극복을 진심으로 응원했고,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도록 그를 도왔다. S는 내 워홀 생활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사람이다. 내가 멜버른을 떠나는 날 S는 아침부터 나를 공항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었고, 내가 버스에 탈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며 배웅을 해주었다. 나는 끝까지 S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포옹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포옹에는 우리 둘만 아는 인사이드조크, 언쟁, 추억, 눈물, 우정, 애증 같은 것들이 뒤섞여있었다.


책 <더 셜리 클럽>에서 좋아하는 대목을 떠올린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가 된다.’

715호는 앞으로도 사랑이 가득한 채로 남을 것이다. 셰어생들이 모두 바뀌더라도 사랑만큼은 그 자리에 남아있을 것이다. 나는 사랑의 대물림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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