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0일의 글
호주에 와서 버린 습관이 있다.
더 이상 밖에서 노이즈 캔슬링 에어팟을 착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 살 때는 외부소음 하나하나가 나의 스트레스였다.(아마 이것은 나의 예민한 기질과 비대해진 자의식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자의식 과잉이 나의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길거리 매장에서 지나치게 시끄럽게 터져 나오는 귀가 아픈 노래도, 그 노랫소리를 이길 기세로 고함에 가까운 데시벨로 웃고 떠드는 사람들도, 바쁜 퇴근 시간 10초에 한 번씩 들리는 자동차들의 경적 소리도, 방금 지나간 여자의 몸뚱이와 와꾸를 봤냐며 그들만의 외모품평회를 열며 낄낄거리는 남자들의 불쾌한 목소리도. 솔직히 말하면 나는 한국에 사는 동안 한국을 정말 싫어했다. 분명 한국은 빠르고, 편하고, 재미있고, 아름다운 나라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나는 한국이 싫은 이유를 끝도 없이 댈 수 있다. 문득 장강명 작가의 '한국이 싫어서'를 읽으며 무한 공감을 했던 것이 생각난다. 나는 어쩌면 내 모국에서 이방인이 되기를 자처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아무도 이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사람이 싫었다. 바깥세상과 단절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이 노이즈 캔슬링 에어팟을 착용하고,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큰 볼륨으로 듣는 것이었다. 그럼 잠시나마 외부소음을 잊고 나와 노래만 남겨질 수 있으니까.
원래는 안전 상의 이유로 밖에서 노이즈 캔슬링 에어팟을 착용하지 않았다. 모든 길이 초행길이고, 일행 없이 오로지 나 혼자서 다니는 것이기 때문에 노이즈 캔슬링 에어팟을 착용하면 위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트램에서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을 놓치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길을 가다가도 나에게 내 신발끈이 풀렸다거나 영화관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기 때문에(저번에는 대뜸 나를 붙잡더니 지금 시간이 몇 시냐고 물어보는 남성분도 있었다.) 그들을 의도치 않게 무시하는 일을 만들고 싶지 않기도 했다. 솔직히 사람들이 미친 듯이 붐비는 시티의 초중심지인 멜버른 센트럴과 차이나타운 쪽을 지나갈 때는 조금 힘들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영어를 포함한 수많은 언어 속에 놓이는 상황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했다. 그렇게 나는 점점 적응을 하게 됐다. 이제는 에어팟이 꽂혀있지 않은 맨 귓구멍이 더 편하다. 게다가 무료로 영어 듣기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영어가 쓰이는 나라에서 귀를 막고 영어를 듣지 않는 것은 큰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연을 감상하고, 사람들 사는 것을 구경하는 것이다. 호주는 재미있는 나라다. 놀거리가 많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재미있다. 본인의 개성을 한껏 드러낸 헤어스타일, 문신, 옷차림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며 처음 보는 이에게 먼저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거나, 처음 보는 카페 직원에게 본인의 주말에 대해 얘기하는 일이 매우 흔하게 일어나는 곳이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그들의 고유한 캐릭터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다채로운 나라다. 나는 가끔 커피를 포장해 나와서 아무 벤치에나 앉아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구경한다. 저들의 이야기는 무엇일까 상상하며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샜는데, 결론은 나는 호주에서 바깥세상에 관심을 좀 더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어딜 가느냐에 따라 다른데, 혜화나 종로 쪽은 시도해 볼만하다. 강남, 홍대, 잠실 쪽은 절대 안 된다. 나는 잠시라도 좋으니 한국어가 들리지 않는 곳,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호주에 온 지 고작 한 달 조금 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갔을 때보다 호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고 자유롭다. 이런 감정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다. 호주에 오고 나서부터는 내 계획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호주 와서는 오히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원래 내 계획은 3월 안에 잡을 구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아직도 백수다. 친구들을 한 명도 사귀지 못할 것 같았지만 예상치 못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한국이 그리워 매일 울 줄 알았지만 아직까지 한국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호주에 오기 전, 한국에서와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을 가지고 호주로 떠나겠노라고 하루에 수십 번 다짐했다. 마음속으로만 다짐하면 금세 잊어버리고 무너져 내릴까 봐 일기에도 매일같이 썼다. 성급한 성격을 죽이고 여유롭게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기, 언제나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명심하기, 실패한 워홀 같은 건 없으니 현재의 자리에서 최대한 즐기고 다양한 것을 경험하기. 워홀 생활을 하며 나중에 힘든 시기가 오면 이 글과 과거의 일기를 다시 읽고 초심을 되찾아야겠다. 사소한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현재를 즐기며 미래를 기대하곤 했던 나를 다시 꺼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