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멜버른에서의 첫 번째 카페 트라이얼, 그 생생한 후기
오늘 첫 트라이얼을 다녀왔다. 집에서 걸어서 10분에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카페다.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카페로, 브런치, 베이글, 크루아상, 패스츄리, 아사이볼 및 각종 커피와 음료를 파는 곳이다. 트라이얼이 아침 8시에 잡혀있었으므로 나는 6시 40분에 일어나 준비를 해야만 했다. 자신감을 채우기 위해 데이식스의 ‘정말 멋지잖아’를 들으며 화장을 했다.
7시 40분에 집에서 나왔는데 이제 가을이 막 시작된 게 실감 났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작열하는 태양에 살이 탈 걱정을 했는데, 이제는 아침저녁으로 으슬으슬 춥다. 토요일 아침 외진 골목에는 사람이 없다. 세븐일레븐 앞을 지나가는데 웬 남자 두 명이 나에게 일부러 아는 척을 하며 “Hi.”라고 하는 것을 무시하고 갈 길을 갔다. 그러더니 뒤에서 “Hey, I said hi!”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지금 나에게는 저런 것들에 에너지를 쏟을 여유가 없다. 그들을 금세 잊어버리고 길을 가며 다시 트라이얼 생각을 했다. 미친 듯이 떨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렇지도 않아서 신기했다. 7시 55분쯤 카페 바로 앞 횡단보도에 도착했고, 신호를 기다리며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할 수 있다”를 삼창한 후 카페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남자 직원(나중에 알고 보니 이 사람이 매니저였다.)에게 트라이얼을 하러 왔다고 말했다. 나에게 이름과 국적을 물어봐서 성실하게 대답해 줬다. 매니저는 중국인으로, 7년 동안 호주에 살았다고 한다. 영어를 거의 현지인처럼 구사해서 납득이 갔다. 그리고 내 또래처럼 보이는 여자 직원이 있었는데, 일본인이었다. 이름은 유미라고 했다. 유미는 밝은 사람이다. 상냥하고 따뜻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고, 나에게 토스티 굽는 법을 알려줬다. 유미와 나는 한국과 일본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어색함을 녹여 나갔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여자 직원이 한 명 더 왔는데, 오너의 19살 태국인 딸 ‘이지’였다. 플레이리스트 선택과 말투에서 나오는 쿨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두 시간 동안 세 명의 크루들과 일을 하게 되었다.
매니저가 라테, 플랫화이트, 카푸치노를 글라스잔에 만들어 보라고 했다. 아마 바리스타 포지션으로 트라이얼을 가면 가장 먼저 받게 되는 과제일 것이다. 나는 호주에서 한 번도 커피를 만들어 본 적은 없지만 한국에서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며 라테, 플랫화이트, 카푸치노 만드는 연습을 해 본 적은 있다. 솔직히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알겠다고 했다. 커피머신이 완전히 처음 보는 형태의 것이었기 때문에 매니저에게 조작법을 물어봤다. 매니저는 그라인더 조작법, 저울 측정법 등을 알려줬고 나는 방금 배운 것을 겨우겨우 기억해 내가면서 포터필터를 그룹헤드에 장착해 샷을 추출했다. 피처에 풀크림 밀크를 담고 스팀을 치는데 노즐도, 압력도, 한국 카페에서 사용했던 것과는 느낌이 너무나 달랐다. 결국 나는 공기 주입을 과하게 많이 해버렸고, 거품도 거칠고 두껍게 나왔다.
속상했다. 나 이거보다 잘할 수 있는데. 이 머신이 처음이라서, 커피를 안 만든 지 두 달이나 돼서 이런 건데… 일단은 거품이 두껍게 나왔으니 플랫화이트는 만들 수 없고, 라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안정화를 하고 라테 아트를 시도하는데 첫 타부터 망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했다. 뭐 어떡해, 이미 스팀 친 걸로 그냥 비벼야지. 그러고 나서 다음으로 플랫화이트를 만들 때는 공기 주입을 훨씬 적게 해서 거품을 얇게 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예쁜 라테 아트를 하기엔 충분치 않은 퀄리티의 거품이었고, 엉터리 핸들링으로 엉터리 하트를 만들었다. 내가 만들고 나서도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이 실력으로 감히 바리스타 포지션을 지원한 것이 너무나 염치없게 느껴졌고, 나 자신이 우스워졌다. 매니저가 속으로 얼마나 황당해할까 생각하면서.
그래도 나는 애써 웃으며, 매니저에게 내가 이 머신을 처음 쓰는 거기도 하고, 아직 환경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나 더 잘할 수 있다고 열심히 변명했다. 다행히 매니저는 관대하게 이해해 줬다. 숙련된 바리스타도 새로운 카페에서 새로운 머신으로 작업을 하면 처음엔 힘들어하기 마련이라고. 바로 바리스타 포지션으로 들어오기보다는 FOH(Front Of House. 올라운더의 느낌이다.) 일을 하면서 주니어 바리스타로 일을 배워가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그럼 나를 뽑겠다는 거야?) 그 뒤로 커피 주문이 몇 개 들어왔는데, take-away 라테 하나를 온전히 내가 만들어서 손님께 건네 드렸다. 그 뒤로는 커피를 만들 기회가 없었다. 커피는 매니저만 만들었고, 나는 다른 직원들과 함께 주문을 받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를 하거나, 다른 메뉴를 만들었다.
손님들의 주문을 받는 건 생각보다 엄청 어렵진 않았다. 포스기가 잘 되어있고, 조작법을 유미와 이지가 잘 알려줘서 괜찮았다. 가장 걱정했던 건 손님들의 오지 악센트를 잘 캐치할 수 있을까였는데 다행히 대부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가끔 놓친 부분을 다시 말해달라고 하면 모두 친절하게 다시 말해줬다. 주문받을 때 필수 표현 같은 것들은 한국에서부터 미리 공부하면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수십 번 돌리고 호주에 왔기 때문에 그나마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주문받기 전 아침 인사와 주문받고 난 후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포스 기와 손님들 눈을 동시에 맞추며 여유롭게 오더 받는 일이 익숙지 않아서 내 눈은 거의 포스기 화면에만 고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여유로운 시간에는 직원들과 얘기를 했다. 매니저는 한국의 카페 경험에 대해서 물어봤고, 한국 카페 문화(프랜차이즈, 회전율)와 사람들의 커피 소비 방식, 카페의 고객 서비스(키오스크, 비대면 주문)와 관련해 얘기해 주었다. 나는 손님과 대면으로 소통하고 정성 들여 커피를 만드는 호주의 커피 문화가 좋다고 했다. 커피와 서비스를 더 배우기에 좋을 것 같아 커피가 유명한 멜버른이라는 도시를 선택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매니저는 내 얘기를 흥미로워하며 들었다.
이지는 내 한국이름을 물어보고는 종이에 한글로 내 이름을 적어줬다. 한글을 독학했다면서, 한글은 쉬운 글자라고 했다. 처음 보는 외국인의 이름 석자를 직접 종이에 써가며 자신의 한글 능력을 보여주려는 이지가 귀여웠고, 그 마음이 예뻐서 고맙다고 말한 후 종이를 가져가겠다고 했다. 내가 태국 음식, 특히 똠양꿍과 고수를 좋아한다고 했더니 무척이나 기뻐하면서 자기는 어느 음식에나 고수를 넣어 먹는다고 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타이 밀크티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며 창고에서 찻잎과 연유를 가져와서는 뚝딱 만들어줬다. 적당히 달콤하고 진해서 맛있었다.
유미는 짧은 시간 동안 가장 정이 많이 갔던 사람이다. 포근하고 발랄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햇살 같은 사람이다. 고작 2시간 같이 있었지만, 누구나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투명하고 순수해 보이는 사람이다. 내가 포스기 앞에서 주문을 받을 때도 옆에서 “모르는 게 있으면 내가 도와줄게. 내가 옆에 있어!”라고 작게 응원해 주고, 중간중간 “지금까지 어때? 기분 괜찮아?”라고 내 상태를 확인해 주고, 내 몫의 햄치즈 크루아상을 남겨뒀으니 꼭 먹으라고 말해준 사람이다.(정신이 없어서 끝까지 먹지는 못했다.) 2시간의 트라이얼이 끝난 후 내가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시간이 너무 빨리 갔다며 넌 좋은 사람이라 꼭 함께 일하고 싶다고 말해준 사람도 유미다. 빈말일지는 몰라도 기분은 매우 좋았다.
아무튼 세 명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도와주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 자리는 나를 부려먹고 시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그저 내 능력을 알아가고 합을 맞추기 위한 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 덕분에 그래도 긴장하지 않고 편안하게 일을 할 수 있었다. 선뜻 호의와 친절을 베풀어 준 이들에게 고맙다. 처음 보는 낯선 얼굴에 따뜻한 인사와 미소를 건네준, 오늘 나와 대화를 한 모든 손님들도 잊지 못할 것이다.
2시간 동안 트라이얼 한 것을 녹음해서 집에 와서 다시 들어봤다. 분명 그땐 괜찮게 말한 것 같았던 문장들도 다시 들어보니 구리다.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정말 행운이라는 생각을 하며 영어 공부의 필요성을 다시금 느꼈다. 매니저가 나의 번호를 받아가고는 오너와 얘기를 한 후 연락을 주겠다고 했는데 아직 연락이 없다. 일요일까지 기다려보고 소식이 없으면 물어봐야겠다.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고 싶은데, 너무 앞서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혹여나 실망스러운 소식을 듣게 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고 나아갈 수 있는 지구력을 잃지 않고 싶다.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