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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Jul 02. 2024

어린이로 존재할 수 없었던 어린이: 야만적인 앨리스씨

책을 읽는 중입니다.

 벌써 7월이네요.

 장마가 시작되고 한숨 돌릴 수 있게 되면서 브런치를 오랜 시간 안 썼다는 걸 겨우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매일 글을 읽고, 쓰고 있습니다.

 사이 서점에서 커튼집으로 알바를 옮겼습니다.

 작업방에 낡은 가구들을 버리고 조금 읽고 쓰기 편한 작업 환경도 만들었네요.

 아직 브런치에 어떤 글들을 기록해 나가야 할까 방황 중인 느낌입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책을 읽는 중입니다'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자주  빠르게 업데이트 하지는 못할 겁니다.

 대신 꾸준히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처음 접한 건 황정은 작가의 에세이 ‘일기’를 통해서였다.

 매 맞는 형제가 등장하는 이 책에 대해 작가는 일부러 읽지는 못할 이야기를 썼다는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책이라는 건 누군가 읽어주기를 원하는 마음, 누군가 읽어줄 거라는 믿음으로 세상에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부러 읽지는 못할 이야기라는 걸 알고 썼다니 호기심이 생겼다.

 원래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읽지 못할 이야기라고 하면 더 읽고 싶은 법이니까.

 그렇게 이 책을 겁도 없이 펼쳤다.

 “내 이름은 앨리시어, 여장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 있다.”(본문 7쪽)

 첫 문장부터 당황했다. 주인공이 여장 부랑자라니!

 먼저 부랑자를 떠올려 보았다.

 역사에서 골목길에서 그들은 지저분한 벽과 바닥, 쓰레기들과 한 더미처럼 존재했다.

 그들은 나에게 “불쾌하고 지루한”(본문 9쪽) 풍경과도 같았다.

 전체적으로 뭉뚱그려진 희미한 형상은 있지만, 그들 개개인이 어떻게 생겼고,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떠올리려 해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여장까지 했다니 어떻게 주인공을 상상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그대의 재미와 안녕, 평안함에 앨리시어는 관심이 없다.”(본문 9쪽)

 작가는 이 책의 주인공은 독자에게 재미를 주기 위한 존재, 희망을 주기 위한 존재, 공감을 주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이런 비호감 주인공으로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두려운 마음을 안은 채 앨리시어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읽기 시작했다.

 앨리시어가 나고 자란 고모리는 “굶주리던 마을 사람들이 아기 셋을 먹었다.”(본문 9쪽)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부터 야만적이었다.

 작가가 이 야만적인 땅에 무엇이 있는지 적확한 문장으로 생생하게 묘사한 탓에 고모리에 가 본 적이 있는 듯 그곳의 황량함을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려 본 고모리에서 어린이들은 하수처리장 공사장의 키보다 두세 배는 높은 모래 언덕에서 뛰어놀았고, 고물 더미 속 폐지에서 지혜를 배웠다.

 그 고모리 어린이들이 앨리시어와 동생, 친구 고미였다.

 앨리시어는 루돌프 사슴 동요를 따돌림당하던 사슴이 감투를 쓰니 사랑받게 된 내용이라고 어른스럽게 해석하며 “다른 모든 사슴들한테 니들은 다 멍청이”라고 말하기 위해 “감투를 쓸 거다.”(본문 27쪽)라고 어린이다운 생각을 친구 고미에게 말한다.

 앨리시어 동생은 “보지 말고 자지”(본문 34쪽)라는 어른이 쓸 법한 성적 단어를 아무 거리낌 없이 장난으로 앨리시어에게 말하며 어린이같이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어린이들의 나이는 책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앨리시어와 고미는 초등학교 고학년 사춘기가 시작하는 나이 정도, 동생은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어린이의 그것이 아니다.

 어른, 그것도 나쁜 어른의 그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나쁜 어른의 언어를 걸친 채 어린이다운 생각을 표현하고, 어린이같이 행동하는 앨리시어와 동생, 고미의 모습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앨리시어와 동생은 “백 퍼센트로 농축된 씨발. 백만년의 원한을 담은 씨발, 백만년 천만년은 씨발 상태로 썩을 것 같은 씨발”(본문 33쪽)을 어머니에게 수시로 듣는다.

 그리고 “달군 강철처럼 뜨겁고 강해져 주변의 온도마저 바꾸는”(본문49쪽) 어머니의 씨발됨 상태를 수시로 당한다.

 앨리시어는 어머니의 씨발을 들을 때마다 “고추가 간질간질하게 썩는 듯하고 손발이 무기력”(본문 33쪽)해지고, 어머니의 씨발됨에 동생과 노출될 때마다 “워리어”가 되어 어머니에게 돌진하고 싶지만, 어찌할 바 모른 채 “그때가 지나가기를 기다린다.”(본문 53쪽)

 아버지는 어머니의 씨발됨과 그 씨발됨이 누구에게 향하고 있는지 알지만, 모르고 싶어 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행동을 그녀가 어린 시절 학대받은 경험에서 온 괴로움이 원인이라며 앨리시어에게 이해하라고 한다.

 학대받은 자가 학대하는 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학대받은 자가 학대하는 자를 이해해야 한다.

 이보다 궤변이 있을까?

 앨리시어는 알고 있다, 어머니는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거라는 것을.

 그것이 너무 슬펐다.

 ‘부모’라는 존재는 ‘나’라는 존재의 원초적 근원이다.

 보호받고, 의존해야 할 관계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이해를 강요받는 삶의 무거움에 숨이 막혀왔다.

 고모리 이웃들도 앨리시어 어머니의 씨발됨을 알고 있다.

 그들은 그 씨발됨이 그들에게 향하지 않는 것에만 신경 쓰며, 앨리시어 어머니를 무시하고, 앨리시어와 동생이 당하는 일을 모른 척했다.

 그것은 이웃이 상관할 수 없는 가족의 일이었다.

 앨리시어는 고모리 밖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보기로 한다.

 첫 번째 도움을 요청한 곳은 앨리시어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은 이복형제였다.

 “말해주겠다, 말해주겠다, 내가 그것을 말해주겠다. 그것을, 누나가 아는 그것, 그것을, 모르는 그것을, 모르고자 하는 그것, 그것, 그것을 말해준다면 누나는 좀 친절해질까.”(본문 91쪽)

 앨리시어는 시내로 나가 누나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를 왜 했냐고 묻는 누나에게 앨리시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말을 뱉어낼 수 없어서.

 형은 전화조차 받지 않는다.

 형의 집 위치를 알지만, 앨리시어는 찾아가지 않는다.

 찾아가봤자 똑같이 할 말을 뱉어낼 수 없을 테니까.

 앨리시어는 다시 고모리로 돌아온다.

 두 번째 도움을 요청한 곳은 구청이었다.

 “그리로 가서 담당자를 찾아봐요.”(본문 127쪽)

 구청에서는 계속 담당자를 찾아가라며 구청 밖으로, 구청 먼 곳으로 그들을 밀어낸다. 마침내 만난 담당자, 사설 기관 상담사는 앨리시어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한다.

 “이런 경우 부모님 각각이 지니고 있는 상처”(본문 135쪽)가 있을 것이고, 이에 대해 먼저 치료해야 한다고.

 이복형제와 구청 공무원, 사설 기관 상담사는 앨리시어에게 말해 보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정작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앨리시어는 다시 고모리로 돌아온다.

 “뭐 학교? 얘, 너 지금 그게 문제냐.”(본문 149쪽)

 한 사람, 한 생명, 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당하던 앨리시어와 동생은 재개발로 인한 쓰임 아래에서만 아버지와 고모리 주민들에게 필요를 인정받는다.

 앨리시어와 동생은 아버지가 키우는, 어미 개가 낳은, 새끼 개 같은 존재였다.

 새끼 개의 쓰임은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의 배를 불리는 것이고, 앨리시어와 동생의 쓰임 역시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의 배를 불리는 것이었다.

 “형, 팥 먹냐. 팥 먹겠냐, 개 먹지. 어 걔가 팥이야.”(본문 162쪽)

 새끼 개를 쓰임이 아닌 존재로 인정하는 건 새끼 개에게 ‘팥’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 앨리시어 동생뿐이다.

 앨리시어, 동생, 고미, 어른에게 쓰임만 있는 어린이들은 서로를 한 사람, 한 생명, 한 존재로 바라보며 의지한다.

 그 모습에서 먹먹함을 넘어선 막막함을 느꼈다.

 “내가 때려서 다시는 때리지 않게 만들어 줄게.”(본문 187쪽)

 앨리시어의 첫 폭력은 친구 고미를 지키기 위해 고미 아버지에게 맞선 거였다.

 앨리시어는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기뻐한다.

 이젠 고미를 지킬 방법을 찾았으니까, 동생을 지킬 방법을 찾았으니까.

 앨리시어는 자기도 피를 흘리면서 동생과 고미의 피를 닦아주며 상처가 아물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앨리시어의 마지막 몸부림마저 소용없는 일로 만들었다.

 그날 밤 앨리시어의 동생은 어머니의 씨발됨을 피해 놀이터 대신이던 공사장 모래 언덕에 갔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고미는 아버지에 의해 어딘가로 보내졌다.

 결국 앨리시어는 고모리를 떠난다.

 그것이 앨리시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앨리시어 어머니는 앨리시어 동생이 죽은 후 “다른 이들을 압도하며 슬퍼한다.”(본문 196쪽)

 일찍 떠난 자식이 애달팠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 자신의 인생이 애달팠기 때문이다.

 앨리시어는 어머니 안에 슬픔이 커진 만큼 더 큰 씨발됨을 시전하리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고모리에서 도망친 앨리시어는 여장 부랑자가 되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이 세상에 동생의 존재가 있었다는 걸 알고, 그 존재가 사라졌음에 진심으로 슬퍼한 건 “여태 노력했으나 그 이름 여태 말할 수 없는”(본문 203쪽) 여장 부랑자 앨리시어 뿐이었다.

 “그대는 어디에 있나.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앨리시어는 계속 묻는다.

 책의 초반부에 나는 상관할 수 없는 일이라 외면하는 고모리 이웃이었다.

 책의 중반부에 나는 말해 보라고 하면서 들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은 이복형제였고, 구청 담당자였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다.

 나는 그대에게 있다고, 나는 너이고, 너는 나라고.

 어린이가 아니었던 어른은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했다.

 어릴 때 꿈을 물어보는 질문에 우리는 항상 이렇게 답했다.

 “난 어른이 되면~” 어린이의 꿈은 항상 어른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꿈인 줄도 몰랐다.

 어린이인 것이 당연하듯이 어른이 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앨리시어와 동생은 고모리라는 구덩이 안에서 바닥에 닿지 못한 채 언제까지고 떨어지고 있다.

 어린이로 존재할 수 없었기에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언제까지고 떨어지고 있다.

 어린이가 어린이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건 어른의 일이라는 걸 이 책을 통해 다시금 통감했다.

 그러니 계속 실패하고, 계속 실망하더라도 나는 앨리시어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너이고, 너는 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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