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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Jul 03. 2024

진심에는 진심으로 답할 수밖에 없다: 사나운 애착

글을 읽는 중입니다

 금방 안 올 것처럼 이야기하고 업데이트가 빠르네요. :)

 사실 야만적인 앨리스씨보다 사나운애착이 먼저 쓴 글입니다.

 저에게 서평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 준 것도 '사나운 애착'이라서 의미가 있고요.

 하지만 업데이트를 망설인 건 이 글에 거짓 문장이 하나 있고, 그것은 제 진심을 흐리는 것일 수 있기에 정정할 용기가 필요했거든요.

 저는 어머니와 얼굴을 안 본 지 반년 정도 되었습니다.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피하고 있습니다.

 정신병이 재발한 어머니가 두려워서요.

 감당해보려 발버둥쳐 보았지만, 이번에도 감당할 수 없었고, 불효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끝나지 않는 모녀 관계도 두렵고, 끝날 모녀 관계도 두려운 줄다리기가 계속되는 것이 이제는 지긋지긋하네요.

 그래서 잠시 제 일상에서 어머니를 내보냈습니다.

 그래봤자 잠시뿐이겠지만 말이죠.

 나의 페르소나는 어머니이니까요.


 비비언고닉의 사나운 애착은 가장 피하고 싶은 이야기면서, 가장 관심 있는 이야기인 모녀 관계에 대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서평작으로 선택했다.

 딸은 엄마와의 원초적 애착으로 결합한 종속 관계, 같은 젠더로서의 공감대와 다른 시대상으로 인한 문화 갈등 관계가 뒤죽박죽된 채 한 명의 인간이자 여성으로 성장해 나아간다.

 사나운 애착 속 ‘나’도 여덟 살부터 마흔 반까지 모녀 관계의 변화를 겪으며 성장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의 여덟 살부터 마흔두 살이 된 현재까지 모녀 관계의 변화를 겪으며 성장해 온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서평이 아닌 개인 회고록을 쓰고 말았다.

 누군가 이것이 서평이라는 글의 형식에 맞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나는 책을 통해 비비언고닉이 전하고자 하는 진심을 느꼈고, 나 또한 진심으로 답하기 위해 애썼을 뿐이다.   

 「나는 여덟 살이다.」

 사나운 애착의 첫 문장이다. 왜 여덟 살부터 시작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딸이 어머니라는 존재가 특별하다고 느끼는 시기, 그때가 여덟 살이기 때문은 아닐까?

 비비언고닉은 그 시기 동네 다른 아줌마는 상스럽지만, 우리 엄마는 상스러운 게 아닌 외고집일 뿐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엄마는 같은 건물에 사는 다른 여자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라고.

 나의 여덟 살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아기처럼 엄마의 젖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젖을 더듬고 있다.

 말랑하고, 보드랍고, 따뜻하고, 기분 좋은 향기가 나는 엄마의 젖가슴은 쭈글쭈글하고 거친 나무껍질 같은 외할머니 젖가슴이나 너무 탱탱하게 탄력감이 있어 파고들기 힘든 작은이모의 젖가슴하고 달랐다.

 그것은 특별했다.

 그것은 나만을 위해 존재했다.

 엄마가 말로는 젖을 더듬는 나를 귀찮다고 하면서도 힘껏 안아줄 때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에 있다고 느꼈다.     

 비비언고닉이 엄마에게서 벗어나기 갈구하기 시작한 건 열세 살, 아빠의 죽음부터였다.

 그녀의 엄마는 아빠의 죽음에서 영원히 회복되지 않기로 결심한 듯 비탄으로 가득 차 절망하고, 오랜 시간 우울해했다.

 아빠를 애도하는 일은 엄마의 직분, 엄마의 정체성, 엄마의 페르소나였다.

 그리고 그것을 그녀에게도 강요했다.

 하지만 비비언고닉에게 아빠란 존재는 생생한 존재가 아니었다.

 언제나 모호하고 알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다.

 내가 엄마에게서 벗어나기 갈구하기 시작한 건 열 살, 외할머니의 죽음부터였다.

 십 년의 삶 끝에 맞이한 죽음이었기에 친척들은 입을 모아 호상이라고 했다.

 초상집보다는 잔칫집에 가까운 분위기로 사람들은 상주로 나선 작은 이모네를 격려했다.

 그곳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존재가 엄마였다.

 엄마는 자기 삶 전체가 외할머니를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절망하며 통곡했고, 작은이모에게 막말을 퍼부었다.

 외할머니는 이십 대에 과부가 되었고, 딸만 셋이었다.

 딸들이 모두 결혼한 이후에는 사위들의 집을 떠돌며 생활했다.

 외할머니는 말이 없는 수줍음 많은 분이었지만, 술이 들어가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동네를 돌아다니는 종잡을 수 없는 분이었다.

 외할머니는 오랫동안 정신질환을 앓아왔다.

 아마도 조울증이었을 것이다.

 작은이모와 사소한 말다툼을 벌인 외할머니는 감정이 격해져 그 길로 집을 나가 산길에서 농약을 드셨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할머니의 평온하지 못한 죽음이 슬펐고, 엄마를 잃은 엄마가 안쓰러웠다.

 하지만 나에게 외할머니는 나무껍질처럼 메마르고 축 처진 젖가슴의 감촉만 희미하게 남아있는 존재였다.

 엄마의 감정 표출을 보며 나는 엄마가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 알아차림이 두려워 장례식장에서 어떻게든 엄마와 마주치지 않게 숨어다녔고, 숨어다니는 내 모습에 죄책감이 들었다.

 나는 처음 만난 먼 친척 아이에게 작은이모의 흉을 보는 것으로 죄책감을 덜어내려 했다.

 이 장례식은 잘못됐어.

 외할머니는 작은이모 때문에 죽은 거야.

 슬퍼하는 우리 엄마가 옳아.

 엄마는 말리는 친척들을 무시하고 염을 하는 장소에 나를 데려갔다.

 엄마는 똑똑히 보라고 했다, 외할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말했다, 그 장소에 있는 친척들에게 내가 성공해서 복수해야 한다고.

 나는 지킬 수 없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한 채 빨리 장례식이 끝나기만을 원했다.

 장례식만 끝나면 엄마가 예전의 엄마로 돌아올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그 후에도 계속 외할머니 장례식장에 홀로 있었다.

 그리고 외할머니 장례식장에서처럼 너 때문에 내 엄마가 죽었다고 화를 내다가, 네가 억울하게 죽은 외할머니를 위해 성공해서 친척들에게 복수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엄마의 삶이 같은 여자로서 가여우면서도, 엄마의 절망에 잡아 먹힐까 봐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엄마와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끊임없이 확인하고, 그 사실을 엄마에게 때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알리려 애썼다.

 엄마는 외할머니를 위해 결혼이라는 수단을 선택했지만, 나는 엄마를 위해 결혼이라는 수단을 선택하지 않을 거야.

 엄마는 외할머니를 위해 일 했지만, 나는 엄마를 위해 일하지 않을 거야.

 나는 날 위해 살 거야.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거야.

 나는 엄마와 같은 여자이지만, 엄마와 다른 여자이기도 해.

 엄마는 외할머니를 사랑했어?

 나는 한 번도 엄마가 외할머니하고 한 식탁에서 밥 먹는 걸 본 기억이 없어.

 눈 한 번 마주치는 법 없었잖아.

 엄마는 외할머니를 위해 희생한 자기 자신을 사랑한 거잖아.

 비비언고닉은 조와의 사랑을 끝내며 자신과 엄마의 운명이 유사하다는 걸 깨닫는다.

 아버지를 사랑한 게 아니라 결혼이라는 안정적인 울타리를 사랑했던 엄마, 연애했던 남자들을 사랑한 게 아니라 결혼이라는 울타리 없이도 남자와 사랑할 수 있다는 걸 엄마에게 증명하고 싶었던 그녀.

 이십 대와 삼십 대에 걸쳐 나는 엄마와 다른 여자가 되는 것에 성공했다.

 사랑하는 남자도 만나보고, 어릴 때부터 꿈꿔 온 좋아하는 일을 했다.

 그것이 내 자존감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외할머니 죽음 이후 엄마는 아버지와 이혼하고, 운영하던 가게도 폐업한 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임대아파트에서 생활했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순수한 효심만은 아니었다.

 엄마에게 과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나는 엄마와 다른 여자입니다.

 나는 날 포기하지 않고도 엄마를 구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여자입니다.

 그런 내 마음의 그림자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한 건 엄마였다.

 엄마는 찾아갈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잔칫날처럼 만들어 들려주곤 했다.

 그리고 나도 알았다.

 엄마 역시 순수한 모성만은 아니었다.

 아직 내가 엄마의 젖가슴이 보여준 안락한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녀의 분신임을 내게 보여주려 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엄마와 나를 보고 사이좋은 모녀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 모녀는 똑같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나는 회사를 퇴직했다.

 그때 회사 퇴직보다 더 두려웠던 건 내가 조울증이라는 거였다.

 외할머니와 엄마에 이어 나까지, 삼대에 걸쳐 우리 집안 여자들에게 내린 저주 같았다.

 그리고 그때 서야 알았다.

 나는 때때로 엄마가 일부러 조울증으로 빠져든다고 생각했다.

 의지로 버틸 수 있음에도 나약함 때문에 조울증 뒤로 숨어버린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의지와 생각과 상관없이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조울증이었다.

 생각과 다른 말이 나오고, 감정이 통제되지 않았다.

 유체 이탈이라도 한 것처럼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어 통제되지 않는 내 몸을 지켜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

 나의 상태를 알아보고 병원에 가야 한다고 말해 준 동료가 있었고, 갈 수 있는 병원이 있었다.

 그리고 시대가 정신병원 치료에 대해 많이 관대해져 있었다.

 나는 조울증 초기, 공황장애 초기를 진단받았다.

 이 정도가 초기라니.

 외할머니는 평생을, 엄마는 반평생을 병이 있는 환자로 보호받지 못했다.

 엄마는 그동안 어떤 고통 속에 살아왔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엄마와 여행을 떠났다.

 강원도로 충청도로 제주도로.

 여행하며 엄마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들었던 이야기지만, 내 마음속에 이야기가 닿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엄마는 열 살 때 공장에 취직했다.

 나이가 어려서 취직이 안 되는 걸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얻은 자리였다고 했다.

 작은이모와 함께 일했는데 작은이모는 손이 둔해서 혼나기 일쑤였고, 엄마는 손재간이 좋아 칭찬만 받았다고 했다.

 공장장이 일본 유학도 주선해 주려고 했다며 자랑스러워하는 엄마를 보며 그날 밤 엄마 몰래 숨죽여 울었다.

 엄마는 나에게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엄마도 너같이 기회만 있었다면 너처럼, 아니 너보다 더 성공할 수 있었다고.

 그리고 엄마보다 똑 부러지지 못한 작은이모가 남자를 잘 만나 엄마보다 행복한 삶을 사는 게 너무 부럽다 못해 불공평하다고 생각된다고.

 나는 마흔두 살이 되어서야 인정했다.

 나는 엄마를 열렬히 사랑한다.

 엄마도 나를 열렬히 사랑한다.

 우리는 너무 뜨겁게 사랑해 서로를 태워 죽여버릴 수도 있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서울의 대각선 끝과 끝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수시로 연을 끊어버리자고 모진 소리가 오가다가도, 정신 차려보면 같이 식사하고, 산책하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나는 끝나지 않는 이 모녀의 인연이 버겁고 두렵다.

 하지만 언젠가 이 모녀의 인연이 끝나는 날을 상상해 보면 그것 역시 버겁고 두렵다.

 비비언고닉과 엄마의 마지막은 어땠을지 궁금하다.

 그녀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답을 찾았을까?

 그녀는 자기 자신을 찾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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