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철학책을 읽는 듯한 평범한 인생

책을 읽는 중입니다 - 24 겨울

by 서하

책의 시작은 포펠이라는 이름의 늙은 남자와 의사의 대화이다.

포펠 씨는 어릴 적 같은 학교에 다녔던 옛친구를 방문하는데 친구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고, 그의 주치의가 포펠 씨에게 그가 남긴 자서전을 읽어보라고 건넨다.

그렇게 총 34장으로 구성된(열린책들 기준) 책은 그의 자서전 형태로 되어있다.

1~19장까지 내용은 친구인 포펠 씨와 주치의인 의사가 잠깐 언급했던 그의 모습과 크게 괴리감이 없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강인하고 성실한 아버지와 예민하고 감성적이지만 그에 대한 사랑이 넘치던 어머니 밑에서 자란 다소 내성적인 소년은 대학에 들어가 시인을 꿈꾸며 잠시 방황한다.

하지만 경제적 독립을 위해 지원한 철도청 하급 공무원에 합격하면서 오랜 시간 철도를 사랑하는 공무원으로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간다.

친구인 포펠 씨의 기억에 정직하고 양심적인 점잖은 사람이자 훌륭한 공무원인 그, 주치의의 기억에 아름다운 정원을 가꿀 줄 아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원예가인 그의 삶이 무난하게 그려진다.

그 삶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종국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조가 멸망하고, 새로운 체코 공화국이 수립되는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책의 분위기가 바뀌는 건 20장부터이다. 그가 더이상 거짓말을 적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새로운 그의 모습이 드러난다.

철도를 사랑했지만, 전쟁이 철도를 유린하면서 철도에 대한 사랑이 끝나버리고 이후에는 일의 기쁨보다는 일로 얻을 수 있는 명예와 지위 유지를 위해 살아 온 그,

자신보다 힘이 세고 능력이 있던 아이를 시기하고, 자신보다 약한 집시 소녀를 통해 육체적 즐거움을 맛보았던 그,

아내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에는 철도청에 힘을 발휘할 수 있던 장인어른의 존재도 포함되어 있었던 그,

부부생활이 안정되면서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식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아내의 문제로 치부하던 그,

휴머니즘적인 대의가 아닌 자신이 가꾸어 온 역을 전쟁이 망친 것에 대한 분노와 영웅 심리로 공화국 수립에 힘을 보탰던 그.

그가 삶의 평범함으로 기록한 모든 순간에 그의 마음 속에서는 여러 자아들이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평범한 인생은 호르두발, 별똥별과 함께 카렐 차페크의 철학 3부작으로 불리우는 만큼 한 권의 철학책을 읽는 느낌이 든다.

좋은 책을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딱히 포장하거나 덧붙일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저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이 나에게 다가왔는지 빈약한 단어들로 설명하려 노력할 뿐이다.

지금까지 살아 오는 동안 끊임없이 선택의 순간들이 지나쳤고, 앞으로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선택의 순간들이 닥칠 것이다.

그때마다 내적으로는 책 속 그와 비슷한 여러 자아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외적으로는 사회적으로 가장 안전한 자아를 내비치며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다.

그런 스스로가 위선적이라 생각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싸지른 자기 혐오가 마음 속에 치워지지 못한 채 쌓이고 쌓여 삶을 송두리채 뒤흔든 순간도 있었다.

이 책은 그것이 평범한 인생이라 말한다.

사람은 사람들의 집합이라고, 그 집합 속에는 평범한 인간, 우울증 환자, 영웅, 억척이 같은 자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그 중에 왕의 깃발을 들고 있는 지도자 역할을 하는 자아가 있을 뿐이라고 말이다.

그것이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준 불인 동시에 신이 내린 벌은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을 남기며 짧은 감상을 마무리한다.


(평범한 인생, 카렐 차페크 지음, 송순섭 옮김, 열린책들, p239-240)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집합이다. 네가 누구든 나는 너를 알아본다. 우리 각자가 어떤 다른 가능성을 살기 때문에 우리는 똑같은 사람들이다. 네가 누구든 너는 나의 무수히 많은 자아이다. 네가 악인이든 선인이든, 그건 내 속에도 있는 거야. 내가 너를 미워하더라도 난 네가 나의 아주 가까운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나는 내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리라. 그의 멍에를 느끼고, 그의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그에게 닥친 부당함에 대해 함께 괴로워하리라. 내가 그와 가까워지면 질수록 나는 더 많은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기주의자들을 배척할 것인데, 내가 이기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을 돌볼 것인데, 내가 병자이기 때문이다. 성당 문가에 서 있는 거지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인데, 내가 그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나이다.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할수록 나 자신의 삶은 더욱 완성되리라.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며, 가능성이기만 했던 것은 현실이 된다. 나를 제한하는 이 자아가 내가 아니면 아닐수록 나는 더 많은 존재가 된다. 이 자아는 도둑이 가지고 다니는 손전등처럼 그 불빛의 반경 안에 있던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너, 너, 그리고 너! 너희는 그렇게 많고, 우리는 그렇게 많아 교회 축일에 모인 사람들 같다. 다른 사람들이 있음으로써 이 세상은 얼마나 늘어나는가! 세상이 이렇게 커다란 공간이고, 이렇게 찬란한 곳인지 누가 알았으랴!


25년 새해에는 모두에게 평온한 시간이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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