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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리 Jan 16. 2021

오합지졸들의 역전홈런

[서평] <7년의 밤>, 정유정

    인간에게 부여된 운명, 내지는 숙명에 관한 이야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단골 이야깃거리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치려고 하나 결국은 끝내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달아나지 못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오이디푸스가 그랬고, 우리네 설화의 아기장수 또한 그랬다. 이렇듯 운명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는 신적 존재들에게 조차도 가혹하다. 하물며 평범한 인간인들 어떠할까. 일상 속에서 소시민적인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운명이란 더욱 감당하기 힘든 족쇄가 될지도 모른다.


     달리 생각해보자. 운명이 인간을 이토록 혹독하게 옭아 매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그 운명에 대한 개척 또는 극복을 염원하게 되지는 않았던가? 로또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과 TV드라마를 점령하다시피 한 신데렐라 이야기, 그리고 오합지졸들이 결국은 최고의 스타로 변모한다는 영웅담 등은 이러한 운명에 대한 극복을 대중이 얼마나 강렬하게 염원해왔는가를 짐작케 한다.


     소설 「7년의 밤」은 이러한 운명에 맞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들은 이를테면, 궁지에 처한 측은한 사람들이다. 대를 이어 내려온 운명은 끊임없이 작중 인물들을 괴롭힌다. 이들은 자신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에게 반발하고 더 나은 삶을 갈구한다.


     주인공 최현수는 음주와 폭력을 일삼던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얻은 트라우마로 인해 평생을 고통 받는다. 그에게 있어 아버지란 혐오와 극복의 대상이었다. 그의 부인인 은주는 술집 작부(지니)의 딸이다. 그녀 역시 방탕하고 제멋대로 살아온 자신의 어머니를 반면교사 삼아 합법적인 방식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아 ‘평범한’ 삶을 살기를 꿈꾼다. 현수와 은주는 서로 아주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부모 대에서부터 있어왔던 불행을 타파하고 평범한 행복을 영위하길 바랐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들의 아들인 서원은 단순히 부모로서의 애정을 쏟는 대상이라기보다는 ‘너만큼은 꼭...’과 같은 자기투영이 반영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아들의 행복은 곧 자신의 불행한 유년시절에 대한 보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몰아치는 해일처럼 무자비하게 그들의 소망을 짓밟는다. 계속되는 실패와 그로인한 무력감, 패배감은 현수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그러한 중에 저지른 예기치 못한 살인은 그를 끔찍한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게 한다. 설상가상으로 죽은 아이의 아버지인 오영제까지 현수와 그의 가족을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안고 그를 끊임없이 몰아붙인다. 야구 용어로 치환하자면, 더 이상 뒷걸음질 칠 수 없는 9회말 2아웃의 상황이라고나 할까. 상황이 절망적으로 치닫자 운명의 무력한 피해자에 불과했던 최현수는 놀랍게도 단념하지 않고 운명에 맞서기를 결심한다. 바로 오영제의 손길로부터 아들을 구하는 일이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서원이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비로소 오영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점이다. 이때 그의 조력자는 비단 그의 부모뿐만 아니라, 한때의 룸메이트에 불과했던 승환과 직접 대면한 적도 없는 오영제의 전 아내인 하영,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세령까지 포함된다. 부모인 현수와 은주는 자신의 아들이라는 명목이라도 있지만, 나머지는 대체 왜 서원을 도운 것일까? 단순한 동정심일까? 그러나 작가가 인간의 동정심만을 그리기 위해 이런 방대한 양의 스토리를 구상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그들 모두가 크고 작은 운명의 기류에 휩쓸린 사람들이라 타인을 동정할만한 여건이 된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러나 다만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렇듯 그들 역시 운명에 사로잡힌 사람들이기에 그들 또한 현수와 은주가 그러했듯이 자신을 둘러싼 운명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했으리라는 점이다. 이러한 논리를 통해 볼 때, 서원이 오영제의 복수로부터 살아남는 것은 거대한 운명의 한 부속에 불과한 몇몇의 오합지졸들이 운명과의 치열한 전투를 통해 끝내는 작은 승리를 거머쥐는 것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7여 년간의 싸움을 통해 서원은 비로소 그를 쫒아 다니던 오영제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미성년자에 불과하고, 부모를 모두 잃은 고아다. 또 7년 동안의 세월을 보상받을 수도 없고, 그간 사회로부터 받아온 상처를 다 치유해내기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는 힘겹게 하나의 운명의 압제로부터 벗어났지만 세상에는 어쩌면 더 많은, 더 무시무시한 상황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서원이 살아남은 것은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허무감마저 든다.


     그럼에도 소설 「7년의 밤」이 해피엔딩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서원이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닥친 상황을 이겨내고 살아가리라는 막연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희망은 서원 그 자신과 현수, 그리고 다른 조력자들이 거둬낸 운명으로부터의 작은 승리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이들의 승리는 값어치가 있는 일이며, 서원의 삶에, 나아가 독자들에게 까지 강렬한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의 운명을 향한 작은 저항은 곧 격렬한 운명의 기류 속에서 사람이 살아가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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