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미르마리 01: 서문
2019년 4월, 나는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다. 사랑하는 나의 개, 미르가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다른 세상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미르는 훌륭한 개였고, 그 애는 우리 가족 품을 떠나 어디로 가든 행복하게 지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있었으므로, 그 애가 새로이 떠난 긴 여행 자체를 슬퍼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세와 내세 비슷한 그 무언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희망을 품고 있었고, 내 희망이 조금이라도 맞다면, 그 애는 육체의 속박을 받지 않는 또 다른 어딘가에서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지낼 것이다. 그 애처럼 사랑스럽고 정 많은 개는 충분히 그만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으니까.
문제는 남은 사람들이었다. 2004년 8월부터 2019년 4월 3일까지, 만으로는 14년 5개월, 햇수로는 15년. 그 긴 시간동안을 그 애와 함께했던 가족인 우리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그 애의 빈자리가 어찌나 속속들이 눈에 들어오던지.
지금 사는 집이 햇수로 17년이 되었는데 미르는 우리 가족이 잠시 미국으로 떠난 1년을 제외하고 딱 14년을 이 집에서 살았다. 따지고보면 서울살이하랴, 군대 다녀오랴 각각 3년씩 집을 비웠던 나와 내 동생보다도 더 오래 살았고, 직장 다니느라 바쁘시던 부모님보다도 더 오래도록 이 집을 지켰다.
그러니 말하자면, 이 집은 우리 가족의 집이기도 했지만 더 엄밀히 말하면 미르의 집이었고, 그랬기에 그 애의 흔적이 남지 않은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그 집에 살던 우리에게 미르라는 그 작은 황금빛 개가 남긴 자취는 너무나도 짙고 선명했다. 아직도 귓가에는 마룻바닥을 울리던 그 애의 발톱 소리가 선연하고, 거실에 나가면 그 애가 으레 그랬던 것처럼 소파 맨 오른쪽 끝에 몸을 말고 잠들어 있을 것만 같고, '산책갈까?' 한마디만 하면 행복에 겨운 목소리로 짖으며 나를 보챌 것만 같은데, 정작 그 애가 우리 곁에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했다. 녀석이 나이가 많았고, 많이 아팠고, 그래서 그 애와 언제든 이별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어도 그랬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어떤 식으로든 준비될 수 없으므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학의 유명한 고전인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1969)에서 인간이 자신 혹은 주변인의 죽음을 접했을 때 겪게 되는 '죽음의 5단계' 모델을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으로 구분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견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 가족이 미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가 소개한 모델과 꽤 일치하는 면이 있었다.
처음 그 애의 사망 선고를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늘 기적처럼 병마를 이겨내고 온 아이였으니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막연한 희망 같은 걸 품었던 것 같다. 죽은 그 애의 몸은 아직도 따뜻했고, 금방이라도 자리에 일어설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나 바라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다음에 느낀 감정은 내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왜 좀 더 미리 알지 못했을까? 왜 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약을 조금만 더 제때 주지, 공놀이 조금만 더 해 줄 걸. 산책이라도 더 시켜 줄 걸. 하는 온갖 원망들.
그 분노와 후회의 폭풍이 지나고 나서는, 내 나름대로 타협했다. 그래, 그 애는 많이 아팠으니 차라리 이렇게 떠나는 것이 나을지도 몰라, 더 몸져 누워 있는 것보다는 이것이 나았을 것이다, 이게 최선이었다, 하는.
그렇게 스스로 달래고 나면 지독한 공허와 우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상 속의 당연한 일원으로서 있던 미르가 부재한 집에 있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 이것은 아직도 좀 그렇다. 아직 내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가 되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우울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게는 아직 남은 삶이 있고, 정많고 다정한 미르는 내가 스스로를 우울의 늪에 던져 자멸하는 걸 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미르에 대한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 애를 마음껏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슬퍼하기 위해. 세상의 다른 누군가에게 이처럼 사랑스러운 개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노라 알리기 위해. 내 기억 속의 미르가 희미해지기 전에 그 애에 대한 추억을 낱낱이 기록하기 위해. 말하자면, 이 글은 내 작은 황금 개를 위한 회고록인 셈이다.
얼마나 끈질기게 이 글을 쓰게 될 지는 모르겠다. 미르에 대한 추억은 너무나 많아서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추려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다만 내가 이 글을 씀으로써 미르와의 추억을 다시 되새기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순간들이었는지를 하나하나 깨달아 갈 수 있으리라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다. 벌써부터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까.
이 글을 어떻게 끝마무리 지어야할지 고민하다가, 가장 해야 할 말 한마디를 골랐다. 미르가 좋아해주면 좋을텐데, 그 애는 글을 몰라서 어찌 느낄지는 나중에 만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먹지도 못하는 걸 무엇하러 주느냐고 한 소리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써 본다. 이 글은 그 애를 위한 글이므로.
이 글은 내 사랑하는 애견, 사자의 심장을 가진 내 작은 개, 미르에게 바칩니다.
이 글은 2019년 4월, 나의 사랑하는 개, 미르와 이별하며 쓴 글이다. 그 애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애의 딸이자, 나의 동생이기도 한 마리도 세상을 떠났다. 혼자 몰래 쓰던 글들이지만, 이번 기회에 다시 읽고 정리하면서 녀석들을 기리는 글을 다시 써내려가 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