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없는 일기 #01
내게는 반려 햄스터가 있다. 종은 정글리안이고, 털색은 커스터드 푸딩을 닮아 푸딩 햄스터라고 불린다. 그의 이름은 '리피치프 경'이다. 발음이 어렵다고? 자, 다시 따라해보길 바란다. 리-피-치-프 경!
리피치프 경은 내가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소설인 '나니아 연대기'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데, 작지만 용감하고 명예로운 이 생쥐 기사를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따다가 나의 작은 비단 털쥐(햄스터의 다른 이름이란다)에게 붙여주었다. 어찌보면 보잘 것 없어 뵐지도 모를 이 작은 생명에게 굳이 '경'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준 까닭은, 내 비록 미약한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너라도 멋진 삶을 살다가라는, 그런 작은 바람 때문이었다.(그래서 이 햄스터는 서랍장만한 케이지에 거창한 나무 성을 두 채씩이나 가지고 있다. 물론 모두 수제다.) 애석하게도 진짜 리피치프 경과 우리집의 치프 경은 쥐과라는 것을 제외하면 사실 닮은 점이 별로 없지만, 어쨌든 그는 순하고 잘 먹고 튼튼한, 그러니까, 반려동물로서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햄스터라고 할 수 있다.
치프 경은 2020년 6월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누군가에게 버려진 유기 햄스터였고, 치프 경은 그가 낳은 자손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때 마침 이 좁은 원룸에서 어떻게든 함께 동거할 생물(그러니까, 나와 비슷한 포유동물이면서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으면서 냄새나 성미가 고약하지 않은)을 찾던 내 마음에 그가 들어왔다. 나는 기꺼이 그의 종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햄스터의 생이 2년 남짓하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거인 종이자 벗이 되어 그의 생을 영웅적으로 완성하게끔 도와야겠다고.
(그리고 치프 경은 아주 훌륭하게... 아이스크림 볼이 되었다!)
사실 햄스터라는 동물과 함께한다는 것은 '반려'한다기보다는 그저 '동거'한다는 것에 가깝다. 개나 고양이처럼 사람과 적극적으로 애정을 주고받는 동물도 아니고, 애당초에 독립생활을 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을 훨씬 좋아한다. 스킨십도 인간에 적응을 했기 때문이지, 스스로 원해서 스킨십을 하는 햄스터는 아주 드물다. 게다가 그는 아주 작은 소동물이다. 소동물들은 본디 야생에 있을 때부터 온갖 포식자들의 위협 속에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타고나기를 아주 소심할 수 밖에 없다. 친해지기 어렵다는 소리다. 나도 그가 나를 무서워하지 않고 마음 편히 손에 올라오기까지 꼬박 한달이 걸렸다. (많은 밀웜과 아몬드가 소모되었고 치프 경은 한때 꽤 훌륭한 풍채를 자랑했다. 그 옛날의 부유한 중세 귀족처럼!)
하루에 한두 번, 밥과 물, 혹은 간식을 챙겨주는 날이 아니면 나는 그를 위해서 일부러 그를 찾지 않았고, 그 또한 그런 듯했다. 우리의 관계는 꽤나 담백했고, 나는 그와 함께 살아서 좋기는 했지만 이것이 '반려한다'는 의미가 있기는 하는가?에 대해 얼마쯤의 회의감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그 전에 키우던 동물들과는 너무나 달랐으므로.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와의 동거를 꽤나 즐기고 있다. 어느날 그의 케이지 근처를 지나가고 있노라니 갑자기 부스럭,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다름 아닌 리피치프 경이다. 눈이 마주치자 반가운 마음에 간식을 주었더니, 그 다음부터는 내가 지나다닐 때마다 나타나서는(그러니까, 우리가 깨어있는 시간이 겹치는 어느 즈음에) 두발로 일어서서 코를 치켜들고 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가. 이 손바닥만한 햄스터가, 고작 밥을 좀 챙겨줬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기다리는 것이다. 내 새끼 손톱보다도 작은 뇌를 가졌을 이 작고 소중한 생명이 얼마나 거창한 감동을 안겨주는지!
치프 경이 깨어있을 시간에 그를 부르면 그는 열에 여덟 쯤은 제 굴 속에서 기어나와 내 손에 오른다. 얼마쯤 손을 핥아주는 것은 나름대로의 애정 표현이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면 나는 그를 위한 간식을 꺼내어 그에게 내밀거나 한다. 요리를 하는 날이면 채소를 깔끔하게 손질해 그의 몫을 손톱만큼 잘라 '채소 코너'에 놓아두곤 한다. 자다가 깨면 신선한 채소로 입가심이라도 하라는 내 나름대로의 배려다. 시간이 지나고 케이지 안을 들여다보면 채소는 말씀히 사라져있거나, 얼마쯤 먹은 자국이 남은 채소조각만이 나뒹군다. 나는 그럴 때 큰 보람을 느낀다.
햄스터와 밥을 나눠먹는 사람은 어떤가? 이상한가? 나는 그래도 상관 없다. 남들은 모르는 소소한 감동과 즐거움을 치프 경과 나는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늦은 시간까지 잔업을 마치고 기지개를 켠다. 추운 밤을 대비해 귤 한 상자를 사두었는데, 이 때는 그걸 꺼내 먹을 타이밍이다. 귤 서너 개를 꺼낸다. 나의 반려 햄스터를 부른다.
"치프 경~!"
그를 부르면, 쳇바퀴 아래(그가 가장 좋아하는 별장이다.)에서 노숙하고 있던 치프 경은 고개를 빼꼼 내민다. 늘 그렇듯 그는 내 손 위를 오르고, 나는 그와 귤을 나눠먹는다. 치프 경은 귤 반의 반 조각, 나는 좀 더 욕심을 내서 세 개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귤을 씹으며 보일러 바닥의 온기를 만끽한다.
이 어느 가을의 한복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