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없는 일기 #02
최근 운동을 시작했다. 제목에서 예상하셨겠지만 태권도다. 오랫동안 피곤하다는 둥, 코로나라 위험하다는 둥 여러 핑계를 대가며 미뤄오던 운동을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많은 코로나 시대의 청년들이 그렇듯 나 또한 '확찐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고 많은 운동 중에 왜 하필 태권도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겠다. 거기에는 내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는 한국 전통 무예이기 때문에 '한국어 교사'로서 이것에 대한 지식을 갖춘다는 것은 꽤나 괜찮은 메리트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어 교사는 한국어 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도 가르치니까. 게다가 십 몇 년 간 묵힌 단증이 아까웠다. 초등학교 때 따놓은 것이라곤 해도 어쨌든 2단, 검은띠인데 이렇다할 자격증도 별로 없는 내게 이거라도 좀 내세우게 된다면... 흠, 심신수련도 하고 구직 가산점(확실하지 않다)도 얻고, 일석이조요, 꿩먹고 알먹기렸다.
두번째는 '폼 나기' 때문이다. 나는 헬스복보다 도복이 더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이건 내가 한복에 심취해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뤄 보도록 하겠다.) 정권 지르기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주먹을 내 지를 때 펄럭이는 소맷자락 소리가 얼마나 근사한지 알고 있으리라.
세번째 이유는 가격적인 메리트 때문이다. 태권도는 도복만 있으면 별 다른 도구 없이 쉽게 배울 수 있는 운동이다. 게다가 매일매일 다른 커리큘럼이 짜여 있으니 헬스장처럼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듯한 기분에 휩싸이지 않을 수 있고, 훨씬 활동적인 운동이기 때문에 요가에서처럼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견임을 밝힌다.) 그런데 회당 만 원이라니, 헬스장보다야 비쌀지도 모르지만, 개별 지도도 받을 수 있고 운동 친구^^도 사귈 수 있는 운동, 태권도! 아! 너무 너무 재밌겠다!
그리하여, 17년만에 태권도를 다시 시작했다.
흰 띠 같은 검은 띠의 귀환이었다.
(신입 같은 경력직 같은 소리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태권도를 갔고, 내가 그날 메모해둔 내용을 간단하게 공개해볼까 한다.
1. 나는 아주 내성적인 사람이라 사람 여럿이 함께 하는 운동에 알레르기가 있다. 사실 뻥이다. 알레르기는 없지만 그런 자리를 좀 불편해 한다. 무얼 해야 어색하지 않은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내가 도장에서 마주한 것은 한 무리의 골든 리트리버같은 천사들이었다. 다들... 정말 정말 친절하잖아!
2. 몸풀기 스트레칭과 간단한 근력 운동(?)을 하는데 갓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이상 한 일이다. 나는 분명히 태어난 지 30년이나 지났는데 어째서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드는 걸까? 푸시업은 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 이 가는 손목이 부러지지 않고 나의 육중한 몸을 지탱할 수는 있는 걸까? 나는 어렸을 때 유연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었는데 이제 다리 찢기 하나도 제대로 하기 힘들다. 기묘하게도 나는 이날 나의 늙음과 재탄생의 고통(?)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3. 생각보다 몸이 많은 것을 기억했지만 그건 남을 따라할 때 뿐이었다. 검은 띠를 맸지만 태극 1장조차 헷갈린다는 것이 어쩐지 좀 무안했고, 나는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제가 띠는 검은 띠지만 사실상 흰 띠예요"라고 변명해야 했다. 다행히 그 도장에는 나 같은 처지, 그러니까 초딩 때 태권도를 했다가 십 몇 년 만에 귀환한 '신입 같은 경력직'들이 많아서,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혼자가 아니라는 안락함을 느끼게 되었다.
4. 태극3장까지 배웠다. 연습을 아주 많이 했지만 혼자 하라고 하면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범님, 저를 혼자 내버려두지 말아주세요!
태권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약간의 설명을 더하자면, 태권도에는 올림픽 선수들처럼 발차기와 주먹 실력을 뽐내는(?) '겨루기'와 각각의 동작들을 하나의 세트로 이어서 묶어놓은 것을 연습하는 '품새'가 있다. 내가 오늘 배운 것도 '품새'다. 1~8장까지 있고, 그 위로도 고려, 금강, 태백... 등의 몇 가지가 더 있다. (초딩 시절에는 여기까지 배워서 그 이상은 잘 모른다.)
5. 바지를 거꾸로 입어서 다른 수련생 분이 알려주셨다. (사실 관장님이 알아 차리신 거 같은데 관장님은 남자분이셔서 여자분께 대신 전해달라고 하신 거 같았다.) 나는 워낙 덜렁거리는 사람이라 그런 일이 자주 있어서 크게 부끄럽진 않았지만 좀 당황스럽긴 했다. 수업 첫 날에 바지를 거꾸로 입다니! 웃긴 건 그날 도복으로 갈아 입을 때 'ㅎㅎ 나 바지 거꾸로 입는건 아니겠지'하고 생각했었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나여, 당신의 예지가 들어 맞았다.
6. 도복이 아주 멋있다. 초딩 때는 위에서 뒤집어 쓰는 티셔츠 형이었는데 이번 도복은 저고리형이다. 바지가 짙푸른색인 것도 마음에 든다. 엉덩이에 뭐가 묻어도 티가 덜 날 것이다.
7. 다음날의 메모: 누가 날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데 기분은 개운해.
1. 2주만에 귀환했다. 변명 같이 들리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것이 마음처럼 되지 않는 법이다. 일이 바빴고, 몸이 좀 안 좋았다. 아니, 코로나 시대인데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감기라도 옮긴다면 그건 민폐일테고 그러느니 차라리 집에서 쉬는 편이 낫지 않느냔 말이야. ... ... 하지만 11월 중에는 못해도 주2회는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2. 오늘은 태극 3장을 복습했다. 사실 태극 1, 2장도 좀 헷갈리는데 이거는 내가 따로 순서를 외워야 할 거 같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일인가? 싶다가도 5장~7장을 하는 선배들을 보면 투지가 불타오르는 것이다. 적어도 1~3장은 마스터해보자! 유튜브에 한번 찾아봐야겠다.
주먹을 내지를 때는 반대쪽 손(보조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가 그것을 당기면서 한 손을 주먹 쥐어 내질러야 하는데, 내가 습관을 잘못 들여놓았던 모양인지 보조 손을 자꾸만 내밀지 않거나 굽힌 채로 내밀어서 좀 애를 먹었다. 오늘 연습을 많이 했으니 다음에는 좀 더 잘할 수 있겠지?
3. 그래도 첫날보다는 피로함이 덜하다. 몸풀기 운동을 할 때도 덜 괴로웠다. 이렇게 몸이 적응되어 가는 걸까? (물론 그렇다기엔 너무 오랜만에 도장으로 돌아오긴 했다.) 건강해질테다.
오늘의 실없는 일기는 이렇게 마친다. 태권도 일기인 '내 꿈은 태권마스터'는 비정기적으로, 내킬 때 올려볼 예정이다. 혹시 이 글을 봐주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운동을 하는지, 그 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공유해 주길 바란다. 왜냐하면 나만 이렇게 고생하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