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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리 Dec 27. 2022

어떻게든 되겠지.

서른 살의 나는 이렇게 산다


    살다 보니 벌써 만 서른이 되었다. 생일이 지나버려서 빼도 박도 못하게 서른이다. 내년 여름부터는 한국도 만 나이로 나이를 계산한다고 하니 서른으로 사는 기간이 일 년 정도 더 늘어났지만, 어쨌든 나이의 앞 자리에 3을 달고야 말았다.

    서른이 된 것이 섭섭하냐하면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스물을 맞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좀 어리둥절하기는 하다. 내가 그리던 스무 살이 그랬듯이 내가 그리던 서른 살은 좀 더 능숙하고 노련한 사회인이었으니까. 내 집이나 차 정도는 마련했을 줄 알았고, 어쩌면 결혼을 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고, 부모님께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고도 알아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글쎄. 나는 여전히 나이고, 내가 상상했던 어른은 이 자리에 없다. 과거의 내가 나를 본다면 좀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에이, 서른이나 먹고도 그러고 살아요? 하고 핀잔을 줄지도 모르고. 


    그러나 과거의 나여, 당신이 이걸 볼 수는 없겠지만 공연히 상상해서 이야기해 보자면, 나는 그런대로 잘 살고 있으니 안심해도 좋다. 내 세상이 한 순간에 뒤바뀌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도 그럴 일은 좀처럼 없을 테지만, 그래도 어쨌든 몇 발자국씩 앞으로 나아갔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나는, 서른 살의 당신은, 어쨌든 괜찮다.





    서른은 이립이라고 한다. 공자께서는 나이 서른이 되었을 때 마음이 도덕 위에 확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않게 되셨다고 했던가? 나는 성인 군자가 아니라 그런지 그런 확고함은 여전히 갖추지 못했다만, 그럼에도 내 안에 무언가 자리 잡은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생각이다. 살다 보면 살아지는 것이 삶이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그런 마음.


    돌이켜 보면 20대의 나는 대단한 야망가였다. 이상은 언제나 저 높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아찔한 탑의 꼭대기에 있었고, 그에 기어오르려고 어떻게든 안간힘을 쓰다가 결국 미처 다 도달하지 못하고 나동그라지곤 했다. '꼭 이렇게 해야만 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돼'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들어차 있었던 거 같다. 융통성이 없었고, 그래서 방어적이었고, 그래서 불안과 얼마쯤의 우울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어떨까? 


음, 그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과장하지는 않겠다. 어쨌든 그때보다는 좀 낫다. '어떻게든 되겠지'의 마법이 나를 지탱해 주어서인지도 모른다. 대충 산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꽤 열심히 산다! 여전히 실수를 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좀 덜하고, 강의 실력은 여전히 질박하지만 어쨌든 작년보다는 괜찮다. 내가 말하는 '어떻게든 되겠지'는 지나치게 높은 이상을 꿈꾸지 않고, 이상이 원하는 만큼 성취되지 않더라도 지나치게 좌절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다짐이다.

    요즘은 하루하루를 엮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먼 미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즐겁고 성실하게 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루가 좀 꼬이면 어떤가? 풀었다가 다시 하면 되지 뭐. 설령 다시 못해도 괜찮다. 어차피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면 그냥 다음에 그보다는 좀 더 낫게 하기로 한다. 그렇게 매일을 살아가다보면 어제보다는 몇 발자국 나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괜찮다. 오늘 무언가를, 아주 조금이라도 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서른의 나는 이런 마음으로 산다.


    나이를 먹으면서 너무 약아진 걸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사용하는 전자 기기들이 그러하듯 사람의 마음에도 에너지 정량이 있어서 그걸 한번에 지나치게 많이 써 버리면 쉽게 방전되어 버린다.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열정을 들이 붓는 것이야말로 롱런의 비결인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니까. 


    누군가는 '고작 서른 해 살았다고 무슨 유세냐' 싶을지도 모르겠다. 뭐,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아무개의 삶은 이렇다는 소리이니 너무 노여워 마시길. 마흔의 내가 이 글을 본다면 코웃음칠지도 모르겠다. 미래의 나는 과거의 나의 자취를 살필 수 있으니 특별히 메시지를 남겨두겠다. 


    마흔의 나여, 서른의 당신은 그런대로 잘 살고 있었다! 그러니 과거의 당신을 좀 더 기특하게 여기고 관대한 시선으로 바라보길 바란다. 어쨌든 당신도 나이고, 나도 당신이니까. 10년 후의 나는 어쨌든 지금의 나보다는 좀 더 성장해 있을 테니까(예의상 늙었을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 '어떻게든 되겠지'와 더불어 내가 마음에 새기고 있는 또 다른 말들은 '그럴 수도 있지', '사정이 있었겠지'인데, 이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짬이 난다면, 혹은 어떤 영감이 샘솟게 된다면 써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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