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없는 일기 #02
여름이 되었다. 날은 습하거나 덥거나, 습하고 덥다. 한국 역시 날로 뜨거워지는 지구의 일부이므로 한층 무더운 여름은 피할 길이 없다. 이런 무더위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곤혹스럽지만 내 경우에는 특히나 신경 쓸 것이 많다. 속절없이 흘리는 땀 때문에 땀냄새가 나거나 머리가 떡질까봐 걱정을 한다든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몸을 찬 물로 애써 식혀야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내게는 나보다 적게 살았지만 나보다 늙은 반려쥐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반려쥐는 쥐목 비단털쥐과의 드워프 햄스터, 그 중에서도 정글리안 햄스터로, 그의 선조는 오늘날 신장 위구르 혹은 시베리아 남부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대한 초원과 사막에서 떠돌며 생활하던 그들은 대체로 선선한 기후에 익숙해져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사계절이 변화 무쌍한 한국과 같은 곳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그의 반려인의 살뜰한 관리가 요구된다. 내가 여름에 특히나 분주해지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정글리안 햄스터가 쾌적하게 생활할 수 있는 온도는 보통 24~27도인데(내 경우는 가능하면 25도를 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아무리 시원한 집도 한 여름에는 27도는 쉽게 넘을 수 있다. 그러므로 실외 온도가 32도를 상회하는 요즘 같은 때에는 햄스터 집사들이 그들의 반려쥐들을 위한 냉방시설을 마련하느라 바빠지게 되는 것이다. 아이스팩을 깔아준다든가, 햄스터 전용 에어컨 같이 신박하고 획기적인 시설이 참 많지만 내 경우에는 그런 수고로움이 부담스러워서 그냥 마음 편히, 그를 위해 시원한 질감의 베딩(흙 대신 굴처럼 파고 지낼 수 있는, 잘게 썬 부드러운 톱밥, 종이 따위의 깔개)을 깔아주고 대리석 침대를 넣어주는 한편, 때맞추어 에어컨이 가동되도록 설정해놓고 있다. 혹자는 사람도 없는 집에 그렇게 에어컨을 틀어놓고 나가는 것이 낭비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내 돈 몇 천원을 투자해 내 반려쥐가 시원한 여름을 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값진 일인가?
그의 이름은 리피치프 경이다. 그러니까, 내 반려 햄스터의 이름말이다. 내 포스트를 간혹 보는 사람이라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작년 가을에 이미 한 차례 그에 대한 글을 쓴 바가 있었다. 그때는 한창 때이던 치프 경은 8개월만에 빠르게 늙었고, 그가 할아버지 쥐가 되는 동안 그와 나에게는 꽤나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난 10월보다 다음 10월이 훨씬 가까워진 상황이니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기는 하다.
지난 4월, 리피치프 경에게는 큰 일이 있었다. 어느날 손에 올라온 그의 배에 이상한 것이 만져져서 보니 녀석의 배에 머리통만한 혹이 생겨 있었다. 대개의 드워프 햄스터들은 배에 흰 털이 보송하게 나 있는데다가, 그 종의 보편적인 특징을 모른다고 하더라도 한 달 전에는 만져지지 않던 것이 갑자기 한쪽에만 만져진다는 것은 분명히 이상한 일이었으므로 나는 곧장 SNS를 통해서 다른 햄스터 반려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분들을 통해 그것이 아마 종양일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건 그렇게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종양은 나이든 햄스터가 쉽게 걸리는 질환이었다. 게다가 치프 경과 그 형제의 분양을 도맡아 하신 분의 말에 의하면(치프 경은 유기 햄스터의 자손이었다.) 그의 어미 햄스터 역시 종양으로 고생을 한 전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기도 했지만-... 아무리 준비되었다고 해도 반려동물의 종양이 덜 끔찍하게 느껴지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나는 치프 경을 병원에 데리고 갔다. 그러기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때 치프 경은 이미 1년 10개월을 산 늙은 햄스터였다. 햄스터의 평균 수명이 2~3년인걸 고려하면 그는 꽤 고령이었고, 나이든 햄스터에게 그런 수술은 큰 부담이 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참 간사하게도(경멸스럽게도) 어차피 그의 수명은 길지 않고, 종양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을텐데 굳이 큰 돈을 쓰는 것이 '가성비'가 맞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돈이 아까웠다기보다는, 그것이 그다지 합리적인 결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나는 애당초에 3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이 동물을 룸메이트로 들일 때부터, 그에게 너무 정을 들이지 않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다. 그가 가능한 한 쾌적하고 행복하게 생활하게끔 최선을 다하겠지만, 너무 사랑하지는 않을 거라고. 그래서 그가 떠나는 날이 오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그를 보내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치프 경의 종양이 발견되기 전까지만하더라도 나는 우리가 그렇게 '쿨한', '비즈니스적인' 관계를 유지할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의 패착이 있다면, 그 작은 햄스터가 내게 보여준 신뢰가, 그리고 내가 그에게 가지는 애착이 이토록 견고해질 것이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렇다. 사랑해 버리고 만 것이다.
수술비는 40만원 남짓이었다. 수술 시간은 30분이었다. 나는 근처 가게에서 국밥이나 먹으면서 덤덤하지만 공허하고, 또 얼마쯤은 초조한 마음으로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내가 잘한 걸까?
그런 생각이 수없이 들었지만, 합리성과 애착 사이를 넘나들던 저울의 눈금은 이미 후자쪽으로 기운지 오래였다. 어찌 보면 그것은 꽤나 이기적인 선택이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처럼 치프 경은 수술 후에 좀 더 오래 살 수도 있었고, 좀 더 일찍 떠날 수도 있었다. 치프 경의 목숨이 달린, 어느 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다만 내 마음이 편한 쪽을 골랐다. 어쨌든 내가 해 볼 수 있는 일은 다 해보자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치프 경은 그후 2개월 동안 내 극진한 간호(?) 속에 착실하게 회복해 나갔다. 종양이 몸을 괴롭히던 때보다 체중도 늘었고 활동량도 늘었다. 밥도 잘 먹었다. 요 두 달 사이 내게는 몇 가지 일과가 생겼는데, 그것은 치프 경의 몸 상태를 좀 더 살뜰하게 챙기게 되었다는 거였다. 많은 동물들이 그렇듯 햄스터 역시 배를 보이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 까닭에, 그 전까지는 그를 억지로 잡아서 배를 살피지 않았지만, 치프 경은 이미 종양이 생긴 전적이 있었으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를 까뒤집어 배를 살피고, 눈은 결막염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다리를 절지는 않는지 따위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는 동안 치프 경은 점점 내 손길에 익숙해져 갔고(본래도 사람 손을 타는 햄스터였지만), 나는 햄스터 약 먹이기, 안약 넣기, 배 까뒤집기 도사가 되었다. 그가 원체 순한 쥐여서 더 수월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를 살피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내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치프 경은 앞으로 얼마나 오래 나와 함께 살까?
그것은 확신할 수 없다. 목숨이 피고 지는 것은 사람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그가 종양을 떼어내고 힘겨운 회복기를 거치면서 다시금 얼마쯤 건강해졌고, 그로 말미암아 노쇠하지만 그래도 행복함 햄스터가 되었기를 바란다. 지난 밤에도 그는 열렬하게 쳇바퀴를 타다가 꼭두새벽에 내 단잠을 깨웠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성가신 쳇바퀴 돌리는 소리를 조금 더 듣고 싶다. 어쨌든 나는 그를 위해 성을 짓고, 적금을 넣고, 채소를 썰고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언제나 그에게 속삭인다.
"치프 경, 네 사료와 베딩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 나는 그걸 먹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니 네가 다 쓰고 가야 해."하고.
그러면 치프 경은 다만 그의 아늑한 성 아래, 시원한 베딩과 대리석 침대 위에서, 저 거대한 반려생물이 뭘 말하는 걸까, 하는 듯한 호기심 어린 코끝을 내밀어 씰룩거린다. 나는 내맘대로 그것이 그의 대답이라고 생각하고, 시원하고 맛깔나는 여름을 위해 냉장고에서 갓 꺼낸 시원한 방울 토마토를 잘라서 내민다. 아삭아삭 토마토를 씹는 그를 보며 시원한 맥주를 들이키면, 그건 그와 나만 아는 비밀스러운 방식의 건배가 이루어진 셈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일지도 모를 어느 여름을 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