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토리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리 Feb 04. 2023

그 여름, 폴 메스컬 캘럼은 즐겁고도 우울했다.

영화 <애프터 썬> 시사회 리뷰


 이 글은 씨네랩으로부터 초청받아 참석하여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른 해가 넘게 살았으나 유년 시절은 삶의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내 경우, 그러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부모님과 보냈는데, 부모님과 함께한 나날들은 분명 아주 소중하고, 대체로 즐겁고 행복했지만, 때때로 우울하거나 서러웠다. 내 부모님이 나를 부적절하게 해코지를 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보다 좀 더 사소한 일이다. 예를 들어 가족 여행을 갔을 때 짜증을 내던 엄마라든가, 내가 떼를 쓰는 것을 모른 척 하는 아버지라든가, 나는 잘 모르는 어떤 일로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아 있어서 다가가기조차 무서웠던 당신들... 이런 것들 말이다. 이것은 부모님의 잘못이었을까? 음, 여기서는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그들이 왜 그래야 했을까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 싶다. 그들을 부모가 아니라 각각의 한 사람으로서 바라보면서. 그들이 가슴에 품었을 생각이 무엇이었을지 가늠해보면서. 쉽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니 얼마쯤은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영화 <애프터 썬>을 이런 시각으로 한번 살펴보려고 한다.



1. 어느 부녀의 튀르키예 여행


어른이 된 소피는 낡은 캠코더 너머로 어느 추억의 단편을 살핀다. 그 곳에는 어린 소피와 그의 아버지, 폴 메스칼 캘럼이 있다. 이혼 이후 멀리 떨어져 살던 두 사람은 모종의 계기로 인해 함께 튀르키예 여행을 떠난다. 좋은 추억을 남기자고 약속하면서.


그러나 그러한 기약은 쉬이 힘을 잃고, 아버지와 딸은 시종 불안하다. 각자의 사연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2. 방황하는 자


영화 전반에 걸쳐 그들은 방황한다. 뿌리를 둘 곳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디에 소속되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피는 밝고 명랑한 아이로 자라났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는 스스로가 누구를 사랑해야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는 남들과 좀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깨닫는 것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으므로, 아이의 끝자락은 으레 그렇듯 혼란스럽고 두렵다. 그리고 외롭다.

이러한 사정은 폴도 다르지 않다.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지만, 그에겐 깊은 시름이 있다. 그를 충분히 아끼지 않은 부모라든가, 사업의 실패, 이혼 그 중 일부이거나, 그 모든 것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떻든, 그는 우울하다. 명상과 농담 따위로 그에 저항하고자 애썼으나, 그럼에도 우울은 온다. 그의 눈에는 생의 의지는 보이지 않고, 해가 자취를 감추면 깊은 무기력함과 슬픔이 그를 잠식한다. 그는 서서히 질식해들어간다. 그 깊은 어둠에.


3. 누군가의 태양

그러나 우울증 환자라고 해서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태양이 솟아 오르듯 폴에게는 소피가 있다. 우울한 아버지도 천진한 딸아이 곁에서는 그나마 미소지을 수 있는 것이다. 천진하고 사랑스러운 소피는 폴에게 딸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숱한 사랑-어떤 종류의 것이든-의 실패를 겪은 그에게 가장 살뜰한 애정과 이해를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소피였으므로. 그러므로 소피는 폴의 친우이자, 이해자이고, 태양이며, 그를 살게 하는 힘의 원천이다. Queen의 'You're my best friend'의 가사에서처럼 말이다.


https://youtu.be/HaZpZQG2z10


이렇듯 소피는 폴의 유일한 태양이자 사랑이자 벗이었으니, 그는 더 깊은 우울에 빠져 더는 헤어나오지 못하기 전에 딸을 위한 무언가를 준비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없는 형편에 튀르키예 여행을 준비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4. 그러나, 해는 지기 마련이다.

폴과 소피의 여행은 얼마쯤 즐겁고, 얼마쯤 우울했다. 소피는 제게 충분히 호응하지 않는 아버지가 답답하고, 폴은 그런 딸에게 부채감 같은 것을 느낀다. 그는 서서히 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귀여운 딸이 준비한 생일 축하 이벤트에도 기꺼이 웃지 못한 것은 그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어서였으리라.


여행지에서 할 만한 건 다 했는데, 어쩐지 그는 무기력하다. 놀러오기는 했는데 자꾸만 잠을 자고, 늘어지고, 웃으면서도 웃음기가 없다.


https://youtu.be/y7MaaEjsRB4


5 second of summer의 'Try hard'의 가사들처럼, 소피는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에게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폴에게는 그런 딸조차 치유하지 못할 어둠이 있었다. 우울이란 그렇다. 깊은 물 속을 허우적거리고 군중 속을 끝없이 헤매는 기분. 그것은 아주 개인적인 것이어서 타인의 눈에는 쉽게 관찰되지 않는다. 상대가 필사적으로 그것을 감추려고 했다면 더더욱 그렇다. 생각해 보라. 어느 아버지가 딸에게 자신의 어둠을 보여주고 싶어하겠는가? 폴은 소피만큼이나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가장 소중한 이가 가장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그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5. 해가 진 다음의 이야기

여행의 마지막날, 소피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가고, 폴은 다시금 우울의 품에 안긴다. 해가 부재한 그곳으로.


평생토록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던, 인생이 실패투성이라 여기던 아버지는 영영 딸과 이별하게 되었을까? 영화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해주지는 않는다. 다만 막연하게, 어른이 된 소피는 캠코더 너머의 아버지를 본다. 그리고 어느 우울 너머에 서 있을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서. 그의 눈에는 얼마쯤의 애정과 연민이 있다.



 *


나는 이 폴의 결말이 어땠을지에 대해 논하고 싶지 않다. 영화가 그것을 열어두었다면 나 또한 그러고 싶다. 그보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폴과 소피가 서로를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에 대해서이다. 비록 서로 상처를 줄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함께함으로써 행복했고 그것은 분명 어떤 의미로든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폴은 어떤 아버지인가? 우울을 빌미로 생으로부터 도망친 비겁자인가? 실패자인가? 아니,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폴은 그 모든 우울에도 불구하고 딸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딸이 그 나름의 삶과 사연을 만들어 나가기를 바랐다. 설령 제 자신이 부재할지라도 그 아이가 언제까지고 빛나기를 바랐으므로.



어른이 된 나는 때때로 내 또래였을 부모님에 대해 생각한다. 폴이 그러했든 내 부모님도 당신들 나름의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부모면서 각각의 개인이고, 그 개인들은 각자의 삶이 있을 것인데, 그 각각은 한 사람의 것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세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삶을 각각 살아가면서도 그 삶의 한편을 나를 위해 내어 주었다. 그러므로 나는 내 유년 시절에 때때로 나를 서럽게 했던 그들을 이해하기로 했다. 어쨌건 그들이 보였던 헌신과 사랑만큼 진실된 것은 없으니까.


나는 아직 부모가 되어 보지 못했으므로 부모의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헤아릴 길이 없다. 다만 내게는 내 삶을 함께 한 몇몇 반려동물들이 있었고, 그들로 말미암아 부모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해 볼 뿐이다.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무조건적이지는 않지만 진실된 사랑을 포함한다. 때때로 미숙할지언정 그 사실은 변하지 않으리라. 그러므로, 나는 영화 <애프터 썬>의 폴이 소피에게 증명해 보인 사랑을 얼마쯤 원망할지언정 미워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얼어붙은 세계로의 초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