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점점 더워진다. 지구 온난화 때문이다. 아니, 이 말도 안 되는 폭염과 추위의 널뛰기는 기후 위기 때문이다. 남극은 녹고, 해수면은 높아지고, 뭐, 그런 이야기들을 들어보지 못했다고는 차마 말 못할 것이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빠르게 뜨거워지고 있다. 어디 지구 뿐인가? 누가 이런 사태를 야기한 주범 아니랄까봐, 우리 인간들 역시 여러 의미로 과열되어 있다. 우리의 매일은 빼곡한 스케줄로 가득 차 있고, 출근길은 언제나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하며, 길 위는 바삐 가는 자동차, 오토바이, 그리고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은가? 세계의 인구는 80억 명이 넘었다는데, 정부에서는 아이를 안 낳는다고 아우성이고, 물가는 기후 위기만큼이나 빠르게 데워지고 있다. 그렇다. 우리는 불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태초의 인간이 불을 발견한 이래로, 가장 뜨겁게 불타오르는, 그런 시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쿨다운'일지도 모른다. 불의 세상의 대척점에 있을, 어떤 서늘하하거나 온화한 '얼음의 세계' 말이다. SF 보다의 첫번째 시리즈, <얼음>은 6인의 작가들을 통해 이러한 세계를 가지각색의 방식으로 표현한다.
곽재식의 <얼어붙은 이야기>와 박문영의 <귓속의 세입자> 모두 '시간을 얼리는' 미지의 존재와 조우한다. 곽재식의 이야기는 얼핏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가 떠오른다. 사람들이 어떠한 조직화된 세계에서 영문도 모른 채 부품처럼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작품은 제4의 벽을 뛰어 넘어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주인공과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묘한 제안을 하는 '무언가'의 대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점이 참 탁월하고 재밌다. 박문영의 소설, <귓속의 세입자>의 '나'는 귓속에 미지의 세입자를 들인다. 서로 간섭하고, 오지랖을 부리며 끓어오르는 타인들에 신물을 느끼던 '나'는 다른 존재와의 거리를 벌리고 스스로 고립됨으로써 이성과 합리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세입자'를 마주함으로써 자신이 살던 세상을 반추한다. 구질구질하고 때론 질척거리지만 한편으로는 다정하고 외롭지 않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구병모의 <채빙>, 연여름의 <차가운 파수꾼>, 남유하의 <얼음을 씹다>, 천선란의 <운조를 위한>은 보다 먼 미래를 다룬다. <채빙>은 거대한 인류의 서사시나 신화 같다. 여기서 '나'는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시간을 초월한 뭔가'인데, 그의 시선을 통해 바라 본 인류, 그러니까, 뜨겁게 달아올라 얼음이 귀해진 세상을 살아가는 먼 후손들의 미래 인류사(미래와 역사를 합쳐서 불러도 되나 싶지만)를 흥미진진하게 읽어 내리노라면 마침내 밝혀지는 반전에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이걸 말해 버리면 김새니까 여기서 말하진 않겠다. 참, 이 이야기를 읽으며 넷플릭스의 애니메이션 시리즈 중 하나인 러브, 데스 + 로봇 시즌1의 '아이스 에이지'가 떠올랐는데, 이런 인류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적극 추천한다.)
연여름의 <차가운 파수꾼> 역시 달아오른 지구에서 살아남은, 혹은 멸종해 가는 인간들의 삶을 그린다. 다만 이 이야기는 좀 더 판타지적인 구석이 있다. 작품 속에서 '냉기' 그 자체를 상징하는 듯한 존재인 '선샤인'은 마치 '동장군'을 연상케 한다. 흔히 동장군하면 심술맞고 냉혹한 북풍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어쩐지 그는 다정하고 살뜰하다. 땅 밑에 숨어 꺼져가는 '겨울'과 그를 보살피는 '파수꾼'의 이야기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절실하다.
위의 두 이야기가 달아오른 세계 속의 얼음에 대해 논한다면, <얼음을 씹다>는 차갑게 얼어붙은 세상을 그린다. 이 이야기는 여섯 편의 소설 중에서 가장 그로테스크하다. 죽은 이를 북어처럼 말려서 먹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관습이 된 어느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나'는 사랑하는 이를 먹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그의 신념을 지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카니발리즘은 정말이지 끔찍하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먹는 것이 마냥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가진 이가 그렇지 못한 이를 제물 삼는 거나, 팍팍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삼키거나 짓밟는 일이 우리의 주변에도 비일비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천선란의 <운조를 위한>는 재미있게도 많은 웹소설과 웹툰에서 유행하는 차원이동물의 형식을 빌렸다. '나'는 수의사이다. 의사라면 본디 살리는 것을 업으로 삼아야 할 것 같지만, 어째선지 그의 나날은 살리기보다는 죽이는 하루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 시대는 자본주의의 논리와 기형적인 합리주의가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는 어느날 별안간 낯선 세계에 떨어진다.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처럼 말이다. 그는 빨간 눈의 '로타'와 그의 종족인 '루타족'을 말미암아 자신의 세계에서는 보지 못한 다정함과 치열함을 본다.
벌써 5월이 다 되었다. 날씨는 아주 변덕스럽고, 봄은 지나치게 빨리 왔으며, 올 여름은 예년보다 더 더울 것만 같다. 뉴스에서는 우리 이웃들의 살벌하거나 안타까운 소식들을 전하고, 가스비와 전기세는 치솟았다. 그 안에서 우리는 햄스터처럼 열렬하게 쳇바퀴를 돌리고 있다. 자, 그래도, 잠시만, 숨가쁜 달리기를 멈추는건 어떨까? 더운 여름날 찬 아이스바를 먹는 셈치고 <얼음>을 펼쳐보는 것이다. 어쩌면 마냥 즐겁고 신나는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낯선 공상과학을 통해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되돌아 보는 일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