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토리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리 May 09. 2023

그림자 너머에 사는 아이들

영화 <토리와 로키타> 리뷰

이 글은 씨네랩에서 초청 받은 시사회를 관람한 후 작성한 리뷰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어린이날 하루 전이었다. 나는 영화 한 편을 보러 갔다. 예고편도 챙겨보지 않아 어떤 내용일지에 대해 전혀 모르고 보러 간 영화였다. 그리고 극장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음, 글쎄. 흔히들 '어린이날 전야에 보는 영화'를 생각하며 떠올릴만한 그런 종류의 영화는 아니었다. 내가 본 것은 어느 그림자의 가장 밑바닥, 채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삶이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때떄로 우리 살기 바쁜 나머지 이웃이나 그 너머의 삶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곤 한다. 나만 해도 그렇다. 세계는 눈부시게 발전했고 사람들은 어디에서든지 얼마쯤은 먹고 살만 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기아와 난민, 전쟁과 마약 따위는 언제나 뉴스와 신문을 빼곡히 채우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어쩐지 나와는 너무나 먼 이야기처럼 여겨져서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보지 않으려고 했다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설령 내가 그곳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그런 그림자 속을 사는 이들이 있다. 이를테면 영화 <토리와 로키타> 속의 두 사람이 그렇다.


토리와 로키타는 벨기에에 사는 난민 남매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둘은 서로를 유일한 가족으로 삼고 서로를 애틋해하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고 두 사람은 매 순간 벼랑 끝에 몰린다. 


학대 정황이 포착된 토리와는 달리 로키타는 체류증을 받지 못했다. 체류증이 없으면 그 땅에서 일하지 못하고, 일하지 못하면 돈을 벌지 못하고, 돈을 벌지 못하면 로키타는 난처해진다. 돈 나갈 구석이 너무 많았으니까. 고향 카메룬에서는 엄마와 동생들이, 도시 내에선 그를 밀입국 시켜 준 브로커가 호시탐탐 그의 주머니를 노리고 있었다. 이 낯선 땅에서 만난 유일한 가족인 토리와 함께 하기 위해서라도 돈은 필요했다. 그래서 어린 로키타는 그 체류증이 너무나 절실했다. 로키타가 너무나 소중했던 토리에게도 그랬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서 그렇듯, 어떤 절실함은 돌이키지 못할 후회를 낳곤 한다.



로키타가 체류증 발급 심사에서 떨어졌다고 하자, 베팀이라는 남자는 체류증을 위조해주겠노라 한다. 자신이 제안한 '수상쩍은 일'을 승낙한다는 조건을 내걸면서. 베팀은 이를테면 토리와 로키타의 상사였다. 두 사람은 밤마다 몰래 복지 센터를 빠져나와 그가 건네는 마약을 배달하는 일을 했다. 베팀은 어린 소녀를 거리낌없이 성적으로 유린하는 사람이었고, 로키타는 그런 그가 건네는 푼돈이 끔찍했을테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로키타는 스스로 비극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아니, 떠밀려 들어간다.


 


토리와 로키타의 삶은 지난하다. 어른들은 상냥하지 않았다. 탐욕스럽고 잔혹하거나 매정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아이들은 더 손쉽게 착취되거나 무시되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법의 이면에 있는 일에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상황이 더 나았을테지만, 그들에게 정말로 그러한 기회가 주어졌을까? 로키타는 정당하게 일하고 싶어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고, 그림자 너머의 일은 너무나 쉽게 손에 닿았을 것이다.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이것은 지독하게도 선명한 현실의 단면이다. 스크린 밖에는 여전히 수많은 토리와 로키타가 있다. 그들은 어쩌면 영화 속에서보다 더 날카로운 흉터를 안고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서로를 살게 하는 토리와 로키타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어쨌든 간에, 그들은 존재한다. 거기에 있다. 우리가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간에 외면했던 그 그림자 너머에. 



이러한 착취적인 삶은 우리와 완전히 유리된 것일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자본주의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를 착취하거나 누군가에게 착취 당한다. 쥐가 고양이에게 잡아 먹히고, 고양이가 개에게 물리고, 개가 나무 몽둥이에게 맞아 죽고 말았다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노랫말(극 중 토리와 로키타가 불렀다.)처럼 말이다. 한국만 하더라도 난민 문제가 대두된 바가 있고, 불법 체류자 문제는 오래 전부터 신문의 한 면을 장식하다 못해 식상할 지경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온갖 정치적인 문제 이전에 그들이 정말로 사람다운 대우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비극이 손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너무나 슬프고 끔찍한 일이 아닌가.

매거진의 이전글 그 여름, 폴 메스컬 캘럼은 즐겁고도 우울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