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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리 Nov 15. 2020

사자의 심장을 가진 작은 개

안녕, 미르마리 03. 미르라는 이름을 가졌던 개들(2)

    첫 번째 미르를 잃고 우리는 크게 상심했다. 그 애와 함께 지냈던 시간은 길어봐야 6개월이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우리도 모르게 그 작디 작은 강아지가 우리 마음 속의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해버렸는지도 모른다. 


    다른 강아지 한 마리를 데려오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 건 아빠였다. 갑작스러운 펫로스로 가슴 아파하는 가족들을 위한 아빠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우리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강아지를 데려오기로 했다. 가정에서 나고 자라 튼튼한 강아지라고 했다. 태어난 지 고작 50일 정도 되었던 아주 작고 까만 강아지. 첫날, 낯선 환경이 무서울 법도 한데 낯가림조차 하지 않던 그 애는 빠르게 우리의 마음을 차지해 나가기 시작했다.



1. 내 이름은 미르 2세. 작지만 용맹한 까만 강아지죠!

5~6개월 무렵의 미르


    미르는 그 전 미르의 이름을 이어받아 미르가 되었다. 그 애를 처음 데려올 때 엄마는 전대 미르가 죽어서 우리 품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하자, 라고 했지만, 사실 선대 미르와 이 미르는 전혀 다른 개였다. 미르 1세가 명랑하지만 새침한 공주님과였다면, 미르 2세는 씩씩하고 게걸스러운(?) 향단이과였다. 목청도 꼭 2배 정도 컸는데, 나는 아직도 그 애가 그 작은 체구의 개에게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고 쩌렁쩌렁한 소리로 왕왕! 짖었을 때를 잊지 못한다. 나는 그때 생각했다. 이 녀석, 보통이 아닌데? 하고.


그리고 미르는 정말 '보통이 넘는' 강아지였다!



2.  나는야 먹보 요크셔테리어

엎드려서 휴식을 취하는 미르


    보통 요크셔테리어하면 새침하고 입 짧은 개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미르는 낯가림도 없고(커서는 영역 본능이 생겨서 손님들에게 좀 까탈스러웠지만 강아지 때는 그런 순둥이가 없었다.) 식탐도 대단했다. 미르 1세가 사료를 한 알, 한 알 깨작거리던 것만 보아오던 우리는 그 조그마한 개가 그렇게나 식탐이 강하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2004년 당시 미르는 아주 작고 어린 강아지였기 때문에 하루에 최소한 세 끼 이상 밥을 주었는데, 그때마다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밥을 먹었다. 더 정확히는, 밥을 흡입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미르가 우리 집에 온지 몇 주 되지 않았을 무렵, 사료봉투를 제대로 닫지 않고 집을 비웠는데, 아니 글쎄, 이 꼬마 도둑이 밥통을 털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알았냐고? 그야 범견(犯犬)의 배가 올챙이처럼 통통했고 뜯은지 얼마 되지 않았던 밥통이 6/1이나 비어버렸으니까. 그 전 미르와 지낼 때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었다.



사료 앞에서 기다리는 미르


    식탐 많은 개는 대체로 머리가 좋다는 말이 있다. 더 정확히 말해서는, 인간과 더 손쉽게 합을 맞출 수 있다는 말이다. 미르가 그랬다. 위의 사진처럼 사료 한 알만으로도 손도 주고 앉기도 하고 눕거나 구르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다.



3. 타고난 스포츠독

미르의 최애 인형과 미르

    선대 미르가 너무 연약해서 일찍 떠난 거라고 생각했던 어린 나는 미르 2세에게 강인한 체력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키가 140센티도 되지 않던 키작은 꼬마와 800그람도 되지 않던 키작은 강아지는 매일 같이 동네 뒷산을 오르는 특훈을 시작했다.


    길이 잘 닦여 있는 길이라곤 해도 제 키를 훌쩍 넘는 높다란 바위 계단을 오르는 일이 2개월 남짓된 작은 강아지에게는 쉽지 않을 일이었을텐데도 미르는 주저 없이 그 위를 뛰어 올랐고, 장대 높이 뛰기 선수처럼 하수구 구멍도 뛰어 넘었다. 그 작고 까만 눈에는 두려움이라곤 없었고, 그 애는 언제나 그 애 앞을 막아선 장애물을 기꺼이 뛰어넘었다. 내 생애 그렇게 용감무쌍한 강아지는, 아마 미르 하나 뿐일 것이다.


    미르는 공놀이도 참 좋아했다. 공을 입에 물었을 때면 눈 흰자위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즐거워했는데, 아주 나이가 들고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어서도 공놀이를 즐겼을 정도로, 공놀이는 미르에게 있어 최고의 오락거리였으리라.  한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언젠가 공원에 가니 초등학생들이 풀밭에서 고무공으로 한창 축구를 하고 있었다. 미르는 무척이나 공을 잡고 싶어했고, 우리는 애들에게 이 애도(!) 같이 공놀이를 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기 무섭게 미르는 공을 향해 돌진했다! 그날 우리는 새롭게 깨달았다. 강아지도 그렇게나 멋지게 드리블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축구에는 성별 뿐만 아니라 종의 제약도 없다는 사실을.




4. 못난이라고? 이렇게 예쁜 개가 있으면 어디 나와 보라 그래!


    미르는 국내 요크셔테리어 매니아들이 선호하는 얼굴의 소유견은 아니었다. 그때는 소위 '티컵 강아지'가 유행하던 시대였다. 주둥이가 짧고 몸이 작고 뼈대가 가는 개를 좋은 개로 치던 시기였지만 미르는 주둥이도 긴 편이고 몸집도 2.5키로가 넘는, 근육질 개였다.  게다가 그 당시 국내 요크셔테리어들은 대부분 밝은 은빛 털을 가지고 있었는데 반해, 미르는 나이가 꽤 들어서도 털이 까맸다(나중에는 노란 털이 섞여서 강철과 구리를 뒤 섞은 듯한 멋진 빛바랜 색이 되었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자.). 그러니 다른 소형견 견주들 눈에는 좀 못생긴 개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미르를 데리고 동네 산책을 나섰을 때의 일이다. 저 멀리서 아주머니 한 분이 자기 아들과 함께, "어머 요키네~!"하고 호들갑을 떨며 다가오기에 "네, 요키 맞아요." 했더니, 별안간 미르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고는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주둥이도 길고, 털도 누렇고. 우리 별이(가명)가 훨씬 예쁘네. 얘, 너희 집 개는 좋은 개가 아니구나!"

    다행히 미르는 사람 말을 몰라서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사람 아이였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이렇게 똑똑하고 착한 개인데 좋은 개가 아니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이냔 말이다. 너무 화가나서 집에 가서 한동안 씩씩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 일말고도 어릴 적의 미르는 소위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숱하게 당했다. 선머슴 같이 튼튼했던 미르2세는 흔히 요크셔테리어하면 연상하는 섬세한 아름다움을 찾아보기는 힘들었으니까. 


    고백건대, 나도 미르의 어린 시절이 퍽 못났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르 1세는 정말 인형처럼 생긴 강아지였기 때문이다. 곧고 부드러운 털은 언제나 윤이 났고, 까만 눈, 코, 입은 장인이 잘 다듬어 만든 인형처럼 섬세했다. 그에 비하면 미르 2세의 털은 곱슬거렸고, 귀도 늦게 섰고, 눈과 코도, 입도 큼직큼직해서 좀더 시원스러운 맛이 있었다. 한창 자랄 때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으레 그렇듯 길쭉하고 엉성해 보였는데, 그래서 더 미르 1세와 비교되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그 옛날 내가 만난 아줌마도, 그 때의 나의 감상도 모두 틀렸다. 미르 2세는 못생긴 것이 아니라, 그냥 다른 매력을 타고났을 뿐이다. 누군가의 외모가 섬세하다면, 또 누군가의 얼굴은 시원스러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만의 개성이므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나는 미르와 함께 살아가며 그 사실을 차츰 깨달았다. 


    만약 당신이 누군가에게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것은 순전히 당신이 그의 매력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다. 미르의 예쁨을 못 알아 본 그 아줌마와 어린 내가 그랬듯이. 


    미르는 다른 요키들보다 주둥이가 길었다. 다른 요키들보다 운동을 좋아해서 몇 시간을 걸어도 끄떡 없었다. 식탐이 많아 밥투정하는 법도 잘 없었다. 살짝 곱슬거리는 털을 고슬고슬해서 쓰다듬는 맛이 있었고, 반짝거리는 진회색 등은 강철처럼 당당했다. 목소리는 맑고 쩌렁쩌렁해서 경쾌한 맛이 있었다. 성격은 또 얼마나 다정했던가? 산책할 때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입질 한번 하지 않고 점잖게 참아주었고, 가족이 함께 산책을 나갈 때면 저 멀리서 다른 일행을 기다려 주기도 했다.


    그 애와 십수 년을 살면서 나는 그 애의 예쁨을 아주 많이 찾았다.


    미르는 정말 멋진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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