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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Oct 18. 2023

1. 10만 분의 1의 확률에 당첨되다

선천성 희소질환, Klippel-Trenaunay Syndrome

우리 부부의 지난 삶은 비교적 순적했다. 자상하고 따듯한 부모님과 우애 좋은 형제가 있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대학을 졸업했고, 정년이 보장된 직장에 한 번에 합격했다. 사내 커플로 시작해 연애 1년 만에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장에 들어갔다. 우리 부부는 모든 것이 다 잘 맞았다. 한 번도 얼굴 붉히며 싸운 적이 없었다. 집순이, 집돌이가 만나 취미랄 것도 없었지만, 퇴근 후 넷플릭스 한 편과 과자 한 봉지에 평온한 행복을 누렸었다. 단 한 가지, 우리는 아이를 빨리 갖고 싶었지만, 본격적인 임신 준비에도 아이가 선뜻 찾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리는 한 번의 초기 유산을 겪어내고, 결혼 3년 만에 난임병원의 문턱에서 새 생명맞이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우리 부부는 아이 이름 짓기에 전력을 다했다. 요즘 유행하는 이름 TOP100부터, 좋아하는 글자들의 조합, 의미 있는 한자어들을 죄다 엑셀에 집어넣고 돌리고 또 돌려보았다. 우리는 무엇보다 아이의 '신체와 마음의 건강'이 우선이라 생각하고, 고심끝에 이름에 '건강하다'는 의미를 넣기로 했다. 우리의 아들은 뱃속에서 무탈하게 무럭무럭 자라 갔다. 모든 산전검사에서 이상이 없었다. 아이의 입체초음파 사진은 내가 사랑하는 남편을 꼭 닮아있었다. 앙 다문 입술과 오뚝한 코가 특히. 우리는 아이에 대한 기대감으로 하루하루를 쌓아나갔다.


첫 입체초음파 사진. 알아보실 수 있으려나요?


20년 , 아주 긴 장마의 시작에서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울음은 생각보다 가늘었다. 이 아이를 이제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도 느껴졌다. 하지만, 새 생명에 대한 기쁨과 환희가 그 모든 복잡한 감정들을 압도했다. 태어나자마자 피부가 하얗고 눈이 기다랬던 우리 아기는 세상 그 어떤 생명체보다 아름다웠다.

 

보랏빛 발바닥


퇴원 전, 간호사가 아기수첩을 건네주면서 조심스레 말했다.


"아이 발도장을 찍고 지웠는데, 왼쪽 발 뒤꿈치의 도장 자국이 지워지지 않아서 보니, 태어날 때부터 있던 것 같아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


그제야 아이의 발바닥을 제대로 보았다. 늘 속싸개에 싸여있어 미처 발바닥까지는 보지 못했다. 초보 엄마는 기저귀 가는 것과 수유하는 것에도 넘치게 벅차, 아이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지 못했다. 아이의 왼쪽 발 뒤꿈치가 보랏빛이었다. 피부의 질감도 남달랐다. 밀려오는 당혹감과 두려움을 꾹꾹 누른 채 '별것 아니려니' 하며 다음 진료를 기약했다.


집에 와서 아이의 발과 다리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이는 왼쪽 발바닥뿐 아니라 종아리, 허벅지에도 푸르고 보랏빛인 혈관들, 커다란 점인지 멍인지 모를 흔적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정확히 고환의 왼쪽 절반만 보랏빛이 돌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급히 아이를 안고 동네 소아과로 향했다. 소아과 선생님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선생님은 이런 모습은 처음 보신다며 대학병원으로 빨리 가보라고 하셨다. 일단 급한 대로 지역 내 대학병원을 예약했다. 예약 날짜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시간 날 때마다 핸드폰을 붙잡고 구글링에 매달렸다. 선천성 모반 카페부터 시작해서 온갖 비슷한 온라인 카페들을 찾아다니면서 아이의 환부 사진을 올리고 조언을 구했다.


기다렸던 지역 내 대학병원 진료에서는 큰 성과는 없었다. (의사가 아이의 환부를 살펴본 뒤, 구글링을 하기 시작했다..) 혈관종이나 혈관 기형의 일종일 것이라는 모호한 답변만 있을 뿐이었다. 렇게 한동안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면서, 때로는 낙관하고 때로는 절망하며 몇 달을 보냈다. 


아빠 엄마의 근심과 걱정 어린 시선에도, 아이는 자라는 본분을 잊지 않은 채 무럭무럭 커갔다. 하지만 왼쪽 다리에는 늘 힘이 없었고, 왼쪽 발도, 왼쪽 다리 길이도 오른쪽보다 짧았다. '아이가 과연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까'라는 걱정이 항상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그러다, 한 네이버 카페를 찾아갔다. 병변이 몸의 한쪽 부분에만 있는 것, 혈관 비침과 모반을 동반하는 것, 그리고 편측비대를 유발하는 것 등 아이의 증상과 너무나 닮아있는 병명이 눈에 띄었다.



'Klippel-trenaunay syndrome' 


Klippel-trenaunay syndrome 의 전형적인 모습


어떻게 읽는지도 몰랐던 그 병명이 우리 부부의 심장에 덜컥 내려앉았다. 너무나 무거웠고, 무서웠다. 다리 길이도, 굵기도 앞으로 계속 차이 날 거라는 말, 무엇보다 통증이 삶 전반에 나타날 거라는 말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렇다 할  치료법이 없다는 말에 또 한 번 무너졌다.


10만 분의 1의 확률에 당첨(?)되다


 로또는커녕 사내 경품투표에서도 한 번도 된 적이 없던 우리가, 인구 10만 명 중에 한 명 꼴로 나타난다는 병에 왜 당첨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마음 한편으로는 '별 것 아닐 거야'라는 근거 없는 위안을 늘 삼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낙관도 할 수 없어진 현실도 원망스러웠다. 아이에게 이런 인생을 준 것이 죽을 만큼 미안했다.


아이가 그저 건강하기만을 바래서 이름에도 '건강하다'는 의미를 넣었던 우리는, 평생 아이가 건강하지 않은 삶을 살 것만 같아서 슬프고 괴로웠다.


2020년 겨울, 우리는 그렇게 10만 분의 1의 확률의 선천성 희소질환, KTS와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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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Klipple-trenaunay syndrome : Case series from a university of hospital of Nepal', Annals of Medicine and Surgery, Volume 78, June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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