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할 때 그 누군가는 앞으로 알아갈, 모르는 사람이어야 한다.
- 사랑의 생애, 이승우, p.31 -
극성수기에 휴양지로 여행을 떠나려는 것만큼 무모한 짓이 또 있을까. 게다가 대면이 위험으로 바뀌어버린 이 시대에. 예전 회사는 휴가 일정이 자율적이었다. 그래서 굳이 여름은 쉬는 계절이 아니었다. 다른 더 좋은 계절에 마음 편히 즐기기 위한 휴가 계획을 잡으면 잡았지. 무릇 여름의 휴가지란 에어컨이 잘 가동되는 집이나 회사가 아니었던가. 나아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 자백하자면 가족들과 잠시 떨어져 있는 어떤 공간이 가끔은 더 여행지가 되어 버리기도 하지 않더냔 말이다. 이런 빈곤한 생각에 대략 동조하면서도 그이는 아쉬움이 묻어나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아쉬움에 사실상 동의했다. '그래도 가자' 했으니까, '그렇지 가자' 라면서. 착하지 않은 개인이어도 착해지고 마는 '우리'라는 집단 지성의 묘한 힘...
여름 극성수기를 휴가로 맞이한 우리는 어딘가 가야 한다. 아니 일단 집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일치했다. 아이들의 열띤 호응과 요청에화답하며 그들을 최선으로 사랑하는 것. 그것이 현재 그와 나의책무이고 단 하나의 진심이며 그들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 버렸다는, 실상 모른 척하고 싶어도 그러지도 못하고 마는 학습된 현실.'물'에대한 강렬하고 확실한 아이들의 열정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며 게다가 매번 옥상에서 젖은 야생 원숭이처럼 펄쩍펄쩍 뛰고 노는 것도 한두 번이어야 말이지. 핸드폰을 쳐다보며 손가락은 일사천리로 움직였고 워터파크 예매권을 신속하게 '득템' 했다. 그러고 나니 묘하게 가진 자의 여유가 생겨버렸다. 가족 휴가에 참전하는 무기와 전략을 갖춘 병사의 우월감이랄까.
5일 중 양가 부모님 댁을 방문하고 워터 파크마저 다녀오면 이미 휴가는 소화해내야 하는 일정으로 만석이었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사적인 계획을 하나 더 추가하려 했다. 다름 아닌 데이트. 아이들을 기관에 하루 아니 반나절만이라도 보내 놓고 두 사람이 점심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지극히 평범할 수 있는 시간. 남들이 보면 뭘 그런 것 까지 계획을 세우느냐는 둥 우습다 할 테지만 한 편 우리들에게는 그 시간조차 이제는 계획하지 않으면 선뜻 겪을 수 없는 경험이나 다름없이 되어 버렸다. 쌍둥이를 낳고 기르며 그렇게 살아졌으니까. 잔인하다 싶을 만큼 치열했고 가족이라는 집단 내 '공적'인 우리로서 여전히 정신 없는 시간은 충실하게 흐르고 있기에. 한편 이해관계없이 그저 남자와 여자로 만나 사적으로 서로를 열심히 탐사하고 파악하려던, 그렇게 알기를 원했고 서로의 세계에 기어코 들어가려던 그 시절의 감정이 그 마음이 그때의 우리가 잠시 궁금했기에. 사실은 속절없이 그리웠기에...
공원. 야구. 석양. 그리고 몇 번 가보지 못한 바다... 지나간 것들. 오지 않는 시간.
니체의 말을 빌려 의지하자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적인 계획은 그렇게 탄생되었다는 걸 그는 모른다. 단지 내가 차돌 짬뽕을먹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겠지. 매운 건 잘 먹지도 선호하지도 않는 내가 차돌 짬뽕을 선택했다는 건 당신이 최근에 동태찌개와 같은 매콤한 탕류를 원한다는 그 취향과 마음에 호응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담겨 있다는 것을. 게다가 그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나 조차도 아직 상상에 그치는 미래형에 불과할 테지만. 차돌 짬뽕을 먹고 난 이후 남겨진 우리들의 시간에 대해서. 언젠가부터 서로를 탐하려 들지도 욕망하지도 않는 두 사람을 잠시동안 파괴시켜버리려는 어떤 신선한 작심에 대해서. 사랑을 하지 못하게 될까 봐 불안하면서도,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 두렵기도 한 불완전하고 예측하지도 못하는 변수 같은 나 때문에...
사랑이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은 사랑이 불가능한 것을 욕망하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시작한 사람이 욕망하는 것은 연인의 마음이다. 그것을 욕망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내부에 살기 시작한 사랑이다. 그런데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걸 가질 방법은 없다. 누구에게도 그런 능력은 없다.
- 이승우, 사랑의 생애, p.206 -
우리는 서로의 몸과 마음을 관통했고 섞었고 교류했고 연결되었지만. 그렇다고 서로 잘 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맺어진 관계들이 저지르기 쉬운 오만한 실수 중 하나는 바로 상대에 대해서 더 이상 알려고 시도 조차 하지 않는 안일한 태도. 소위 겪을 대로 겪은 사람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더 이상 새로울 것이라고는 없을 것이라는 착각. 그리하여 어쩌면 나 조차도 현재의 그에 대해 오만했던 건 아니었을지.
@ 영화, 뷰티 인사이드 中 . 공간이 모습이 어디든 어떻게 변하든, 서로에게 휴가일 수 있다면..얼마나 좋을까.
내 아내가, 내 남편이, 내 연인이 내 배우자가 '이럴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오래 만났고 오래 살았고 오래 경험했다 해서 한 인간의 세계에 대해서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자신도 시시때때로 변하고 마는, 그리하여 '나' 라는 인간에게 생경스러움을 목도하고도 마는 것이 하물며 인간일 수 있는데. 그리하여 사랑한다는 동사가 당위성을 가지려면 상대에 대해서 최소한 지속적으로 궁금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잡힌 물고기도, 꺾여버린 꽃도 아닌 존재이니까. 여전히 알고 또 알아도 모자람 없이 새로운 사랑스러움과 매력을 일상 속에서 조용하게 가꾸고 발전시키며 나아가는 대단한 몸과 마음을 지닌 인간이니까. 그런 인간으로서 사랑하며 살아야 덜 후회될 오늘들일테니까.
시도 때도 없이 당신의 세계에 내가 불쑥 나타나 일상을 방해하는 그런 발랄한 사랑스러움은 이제 지니기 쉽지 않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는 나를 이미 충분히 겪었을 테니까. 식상해졌을 테니까. 지루하고 고루하며 재미가 없어졌을지도 모를 테니까. 그렇지만 괜찮다. 괜찮을 수 있는 건 내가 아직 당신을 사랑하려 노력하기 때문이며 내가 아직 이런 나를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려 하기 때문일테다. 역할을 수행하다 역겨운 환멸과 마주하여 울고마는 인간이어도. 한편 엉뚱하고 발칙하며 상상력이 여전한 이런 나라도.
그리하여 아주 맛있고 먹음직스러운 차돌이 듬뿍 올라간 짬뽕을 맵지만 맛있게 먹어줄 의지가 있으며 그 이후에 비비빅이나 투게더를 안주 삼아 기네스 몇 캔을 까먹으며 노후라든지 가계부의 상황이라든지 아이들의 미래라든지 그런 생활적 소재가 메인이 된 대화를 종알종알 주고받을 테지만. 한편 당신을 만지고 살피며 '우리'의 대화를 시작할 것이다. 지루한 배려와 착함이 묻어난 천편일률적인 섹스는 이제 집어치워버리는 대신 그 자리엔 파괴적 혁신이 다가갈지 모를 일이라며. 미처 알지 못했던 '나'를 다시 만나는 그 몇 시간이, 당신의 휴가가, 우리의 짧은 여행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우리는 아이들에게 우선순위를 빼앗기고 지고 말게 될까. 물론 영원히 져도 충분할, 사적으론 슬프지만 공적으론 의미 충만한 게임을 우리는 이미 시작했지만.
나의 휴가는 너이며 너의 휴가는 나일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그런 존재일 수 있을까. 당신의 뮤즈가 여전히 나 한 사람일까. 그렇든 그러지 않든 중요한 건 내가 당신을 향한다는 것. 화답하든 그렇지 않든, 그것은 당신의 자유. 당신의 선택. 나의 것이 아닌 것... 사랑은 시간은 마음은 절대 족쇄처럼 가둬두고 지닐 수 없는 것. 소유하지 못하는 것. 그렇기에 다만 알아갈 뿐. 알아가려고 할 뿐. 열심히. 볼 수 있을 때. 닿을 수 있을 때. 정성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