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에는 되도록 음악을 곁들인다. 보통은 가사나 육아의 필수적 미션을 마친 저녁 9시 전후가 되면 반사적으로 이어폰과 책을 찾게 되는데, 여느 때처럼 왼쪽 귀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은 채로 한참 소설을 읽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이가 말을 걸었다. 맥주를 먹자고. 겉으로 표시하지 않았지만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이 시간에 당신에게 아이를 맡겨둔 채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있는 것만도 감개무량한데 하물며 맥주라니. 게다가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건 연애소설인데. 한쪽 귀를 이어폰으로 막아두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잠깐 생각했었다. 물론 이도 저도 다 듣기 싫은 채 혼자 웅크리고 싶은 날이면 두 귀를 이어폰으로 꽉 막아두기도 하지만.
당분간 술은 입에도 대지 않겠다는 다짐은 일주일을 채 가지 못했다. 읽고 있던 연애소설 탓을 했다. 자꾸 어떤 장면이나 기억을, 그로 인한 사념들을 스멀스멀 소환하게 만드니 낸들 당해낼 재간을 딱히 찾지 못한 채 그저 맥주나 마시자 싶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조금만' 마셔야지 라는, 다짐을 지키려는 인간의 소심한 의지를 지닌 채로. 냉장고 문을 열자 써머스비 애플이 눈에 띄었다. 맥주를 고르고 컵에 나누며 누가 더 많이 마셔야 하느니 라면서 서로 말장난을 섞다 빵 터지고 마는 일상. 이건 사랑일 수 있을까 연애일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생활의 일부분에 속하며 사라지고 마는 걸까 아니면 그 전부일 수 있을까. 연애 혹은 사랑이라고 절대 말할 수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분명 두 사람만 알 수 있는, 시간이 지나면 묘하게 아련한 기류 같은 게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어보고 싶었다.
- 이거 어때. 사과맛. 좋네.
- 맥주는 하이네켄이지. 혼자 다 마실 자신 있음 그걸로 하시라.
- 졌다. 난 조금만 줘. 1/3만
- 자. 여기.
- 뭐야 이거. 왜 많아.
- 바꿨어. 잔. 많이 드시라. 맥주 좋아하잖아. 내 사랑이심 ㅋㅋㅋ
- 당신 사랑이 무사하단 증거를 보았느니 일단 허하겠노라.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 뭐라심 ㅋㅋㅋ
-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였는지 다 까먹은 인간의 슬픈 헛소리심. 건배~
상대에게 유일해지고 싶은 것. 유일하고 싶은 시간.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문득 어쩌면 이런 형태의 생활적인 것들도 연애, 사랑의 영역에 속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어쩌다 생기고 마는 두 사람만 해석할 수 있을 기억의 탄생. 일상을 조용히 견디게 돕는 것의 일종. 그러나 그 시간이 언제까지고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주의할 것. 시간은 열정을 사라지게 만든다는 것을 취급 주의해야 함. 어떤 말로 혹은 약속으로 붙들어 맨 관계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는 것. 죽는다는 사실을 빼고 세상의 모든 것은 불확실함 뿐이지만 유일하게 그 앞에서 확신을 획득하게도 되는 것. 그것이 사랑, 그리고 어쩌면 연애. 그런데 정말이지 연애는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한참을 소설을 읽으며 생각했었다. 소설 속에서 서정적으로 그려지는 미혼 남녀를 지켜보면서, 나는 어떤 연애를, 어떤 사랑을 하고 싶었던걸지를. 하물며 지금은 그런 환경설정에조차 들어서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 버렸는데, 이런 인간이어도 사랑이라는 것은 자비롭고도 뜨겁게 다시 다가올 수 있는 것이기나 한 지를. 정말 다시 할 수 있는 것에 속하는 것인지를...
그이는 책을 미치도록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오히려 읽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온갖 종류의 이야기를 대부분 듣는 편이었던 그는 일을 참 잘했고 그 모습이 섹시하게 보였다. 평화주의자처럼 온순하고 유순한 성정이 어떤 면에서는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 못마땅함이 오히려 미묘한 신뢰와 안정, 위로와 평온으로 다가왔다면 어떨까.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나에게 차로 데려다주면서 잠깐 집 앞에 정지했을 때. 발칙한 나는 사실 생각했었다. '내 첫 카섹스는 여기서 하게 되는구나'라고. 그러나 생각은 어긋났고 대신 다른 문장이 툭 튀어나왔다. 어쩌면 그랬기에 결혼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를 테다. 남자인 그는 잊었을법한 그 대수롭지 않을 멘트와 장면을. 그러나 여자인 나는 시간이 오래 흘렀어도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그리워하며 가끔 꺼내고 마는 기억과 문장이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한다. '결혼 같은 건 이제 안 해도 상관없다고. 다만 그냥 이렇게 볼 수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거' 라던 그 문장과 듣기 좋은 목소리가 카섹스보다 더 섹시했다고. 나라는 인간은 감정을 일순간에 건드리고 마는 문장과 목소리에 뻑 가고 말았던 것이라고. 조금 억울하지만. 많이 분하기도 하지만.
너무 건드려요, 감정을. 그래서 좀 막막해져서... 가지긴 싫었어요.
-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p. 40, 진솔의 말 -
당신이 제인 오스틴을 읽지 않았어도, 그녀의 문장을 읽고 종알거리던 나를 좋아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처럼 "내 생명인 당신 없이는 못 산단 말이야, 내 영혼인 당신 없이는 난 살 수 없단 말이야"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 바로 결혼 이후의 시간이라는 걸 안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캐서린을 잃고 오로지 그녀를 향한 애증으로 삶을 지탱하는 히스클리프의 염원. 어떤 형태로든 그녀를 향한 그의 뜨겁고 격렬한 감정. 사실 그런 감정을 결혼 이후에도 바라는 것은 서로 불가할뿐더러 억지나 다름없다는 걸 알면서도. 게다가 결혼 생활이 그럴 수 없어서 오히려 평온하고 조용하게 잘 유지되고 있다는 일종의 자기기만에 빠져버리는 것임을 알면서도. 묶인 관계에서의 에로스적 낭만은 금세 소멸되고 긴 생활이 더 강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 바로 결혼생활이라는 것을 알아버렸으면서도.
어쩌자고 나는 연애소설 한 권을 읽으면서 자꾸 내 멋대로 상상하고 말았던 걸까. 늘 바랐던 어떤 상상 속 장면이라 함은 현재의 나로서는 꽤 도전적이고 혁신적이며 불가에 더 가까운 사랑의 형태와 가까울지도 모를 일이다. 가령 루프탑이 보이는 카페에서 마냥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나누는 매력적인 대화의 연속. 비즈니스적인 이야기에서부터 서로 겪었던 사랑과 사람과 살을 섞었던 기억의 공유라든지 즐겨하던 체위와 페티시의 유무와 같은 질펀한 대화들에 이르기까지. 그러다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초승달이 만약 너무 아름답다면. 그러다가 비라도 오게 된다면. 헤어질 때 그저 '잘 가'라는 문장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동사를 주고받는다면. 어쩌자고. 소설이 콕 찌르는 숨겨둔 감정의 지점을 통과하다 못해 도대체 정말이지 어쩌자고 일상에서 가 닿지 못하는, 붙잡기 힘든 장면을 나도 모르게 떠올리고 말았던 건지.
무지 굶주린 탓에 할 수 있는 짓은 뭐든 하는 거야. 그 여자는 매일매일 상상의 날개를 펴. 시간이 남아도니까. 이번에 와타나베를 만나면 이런 걸 해 봐야지, 저런 것도 해 봐야지라며. 침대에 올라가서는 탐욕스럽게도 이런저런 체위로 세 번이나 가는 거야. 그리고 와타나베에게 이렇게 말해. '어때, 내 몸 대단하지? 자기, 이제는 젊은 애 몸 같은 걸로 절대 만족하지 못해. 어떤 여자애가 이런 걸 해 줄 수 있겠어? 어때? 느껴? 그렇지만 안 돼, 또 해 버리면.
- 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 p. 364. 와타나베에게 그것은 사랑이었을까..모를 일이다 -
@ Pino Daeni, Desire
사랑이란 나로 하여금 상대에게 무언가를 계속 훔치고 싶어 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자면 훔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무언가 서로 훔칠 거리가 남아 있다는 것 - 육신이든 정신이든 마음이든 열정이든 - 그래야 가능한 것일 텐데. 그렇다면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우리는 서로에게 시간의 흐름에서도 꿋꿋이 어떤 마음이 소실되지 않은 채로 훔치고 싶은 무엇이 남아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 밋밋하게 서정적인 해피엔딩으로 보이는 연애소설을 다 읽고 남은 맥주를 다 마시며 거실을 바라보았다. 생활이 보였다. 분명 낭만보다는 생활에 가까운 무언가가 보였지만 마냥 좌절하기보다는 그저 환상에 가까운 상상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마법이란 상상을 믿는 사람들에게 펼쳐지는 것일지도 모를 테니까.
버블 클렌저로 신나게 목욕을 한 아이들이 휩쓸고 지나간 화장실을 청소하고, 소분해둔 양념돼지갈비를 잘게 다져서 수제 타마고 부타동과 전복 미역국으로 저녁을 근사하게 만들며 사진을 찍어 그에게 괜한 칭찬 한 마디라도 받고 싶어서 은근슬쩍 메시지를 보내고. 퇴근 후 아이들과 부대껴 깔깔대는 그의 등을 쳐다보면서 저 등이 오늘은 많이 안 아팠을까를 떠올리고 잠시 애달프게 눈썹을 찡그려보기도 하고. 새벽에 책을 읽다 음악을 듣고 그러다 편지를 쓰며 눈을 감고 상상으로 도망치듯 닿아버리는 그리운 어떤 장면들... 미술관에서 말없이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시작되는 매혹적인 대화의 시작. 한남동의 북파크나 노들 서가에서 바라보는 석양. 그러다 듣게 되는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음악. 강릉의 바다나 북한강의 윤슬. 속초의 동아서점 혹은 파주의 지혜의 숲에서 책을 고르는 시간들. 종이의 고향이라던 지지향에서의 책과 맥주, 그리고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음악. 끊김 없이 연속되는 이야기의 향연... 만약 닿을 수 있다면. 지금은 닿지 않은 그러나 눈을 감고 상상해보니 그것만으로도 괜히 그리워서 마음이 아파지는 장면들.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은 감정을 만약 사랑이라 부른다면.나는 현재 누군가들에게는 여전히 절대무적으로 대체 불가한 존재가 되어 버렸으며 더군다나 나로서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유일해지고 싶은 마음을 사라지게 놔두지 않고 간직하고 있으니. 이것은 사랑이라고 밖에는 달리 부를 방법을 찾지 못하고 만다.
우리의 무사한 사랑을 지키고, 또 닿기 쉽지 않은 장면을 그립게 상상하면서...
일상은 생활이지만 때로 낭만이 될 수 있는 방법은, 그리하여 책을 펼치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일 테다.
너와 나, 우리만 해석할 수 있고 또 만들어내고 마는 서사.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이야기들...
@Pino Daeni, After Midnight... 석양이 지면 책은 펼쳐지고 상상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