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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l 31. 2021

모르는 내일

그러니 벌칙을 수행하듯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장 큰 벌은 내가 쓰는 글이 완전히 쓸모없고, 결함이 많고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 페르난도 페소아, 불안의 책 -  




대형마트는 우리 같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캘리포니아산 체리와 잘 익은 복숭아 한 박스, 아이들의 아이템인 하리보와 젤리 스트로우, 소불고기와 돈까스용 등심, 달걀 30구와 우유 2리터. 기타 두부와 야채, 그리고 보냉팩으로 유혹하던 330ml 맥주 24캔이 들어간 패키지까지. 카트에 하나하나 담으면서도 공간이 넓다 한들 몰려드는 인파를 감당해내기엔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는 걸 뒤늦게 인식하고 말았다. 휴가철이었고 주말이었으며 식당마저 잘 구비된 공간이었기에 허기를 채우기 위한 사람들이 피크인 시간대. 예전 같았으면 그나마 한적한 시간대를 고려해서 외출을 했을 테지만, 요즘 들어 점점 더 정신은 빠져 있는 상태가 잦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알 것 같았다. 자주 물건을 잃어버리며 자주 부딪히고 자주 멍 한 상태가 되며 자주 나도 모르게 울고 있는 나라는 것을. 몇 년 전부터 익숙한 패턴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과 나도 모르게 치닫고 마는 분함. 입술을 꽉 깨무는 습관과 동시에 입을 꾹 다물고 마는 습관. 후자로 인해 화평한 집, 전자로 인해 자주 속상해지고마는 한 사람.



치우면 또 치우고, 만들고 또 만들고, 차리고 또 차리고, 씻기고 또 씻기는 연속. 나는 뭐에 성이 났던 걸까. 저녁을 위해 미리 쌀을 씻어 불리고 그제야 식탁에 앉아서 책을 폈을 때. 한 줄을 채 읽기도 전에 간식을 내어야 했다. 피자와 우유와 복숭아를 깎아 건네주자 아이는 복숭아가 아니라 복숭아 주스를 원하는데 그것도 모르냐 했다. 다시 냉장고 문을 열어서 복숭아 주스를 컵에 따라 건네고 난 이후. 미안하다고 했다. 몰라줘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잘 먹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 앞에 덩달아 앉아 투게더를 꺼내 스푼을 입에 떠 넣었을 때. 그런데 그때. 그런 순간. 나도 왜 그런지 모를 때. 그럴 때 찾아오고 만다. 눈물이라는 것이. 미련스럽게도.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으면서도 왜 신체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이완되지 못하고 무엇에 쫓기는 사람 마냥 긴장을 하고 있게 되는 걸까. 무엇 때문에 시종일관 미안해야 하는 걸까. 나는 왜 미안하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언제 끝날까. 끝이 있긴 있을까. 죽어야 비로소 끝나는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들...



폭염에 가까운 계절과 나갈 없이 고립되어 버린 공간. 간식이 필요하던 아이들. 대낮의 맥주 한 캔에 잠시 노곤하게 잠이 든 그이. 그리고 새벽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주말이지만 긴장을 풀고 제대로 쉴 틈은 왜 더 없고 마는 것인지. 가족들끼리 있으면 더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워야 하는데 왜 그런 순간이 잦지 않은지. 즐거움과 고역의 비율이 49:51이라면 감사할 노릇이며 30:70 정도만이라도 체감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이상한 생각들이 어디 내뱉지 못한 채 혼자의 마음속에서 똬리를 틀다가 결국 혼탁해지고 마는 정신상태. 그 누구도 잘못되었다 말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나는 자꾸만 되뇌고 만다. 어딘지 잘못되었다고, 정말이지 어디서부터 잘못 진입해버린 것 같다고. 어디서부터 인지조차 영영 모른 채로.



비는 언제 내릴까..



결혼은 국가와 사회를 위한 것이라고. 인구가 필요하니 철저히 계획된 누군가의 음모에서 시작된 제도라고. 잘 키워진 노동인력이 필요하니까. 개인을 위하자면 결혼이나 출산은 해 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채로 결혼을 해 버린 내 탓이라고. 내가 좋았던 게 아니라 아이를 원했기에 달려든 당신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 내 잘못이라고. 그러니 매해 매계절 매 순간 급하게 찾아오고 조용히 사라지는 내 고통과 슬픔과 우울과 좌절과 환멸은 모두 나로 인한 것이라고. 친절하고 다정하고 살갑게 비위를 잘 맞춰주며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으니 내가 괜찮아 보이냐고.



당신은 왜 그리 조용하냐고. 왜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느냐고. 먼저 안부를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느냐고.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냐고. 정말 잃어봐야 알겠느냐고. 사라져 봐야 알 것이냐고...그래도 당신은 집에서 내가 고통스러워할 때 밖에서 '딴 사람' 을 만나는 처참하게 무례한 인간은 아니라 솔직히 고맙다고... 사실 그게 정말 훌륭한 것이라고...참을 줄 아는 인간이 기특한 것이라고.  물론 그렇지 않다 한들 그래도 특별히 할 말은 없지만 - 당신 인생은 내 것이 아니니 - 한편 당신은 내게 헌신하고 있는 게 투명하게 보이는 사람이라. 그래서 정말 진심으로 고마운데 그래서 애초에 결혼이라는 게 얼마나 우스운 것이냐고. 개인을 가둬두는 탁월하게 빌어먹을 제도가 아니냐고. 이런 헛소리의 연속. 헛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한 사람.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크게 울었다. 안방도 아닌 거실에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하루를 아니 며칠을 그로 인해 망칠 것이라는 걸 나중엔 알 것이면서도. 그러나 그러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아서. 그래서 그랬다. 나로서는 그래야 했다. 내뱉어야 했다. 발화해야 했다. 제대로 듣든 듣지 않든. 생각이 닿든 닿지 않든. 책 귀퉁이를 꽉 쥐고 식탁 위에서 소리치는 나를 아이들이 빤히 쳐다봤다는 건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가 나와서 등을 두드려주자 그제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현실로 돌아가는 순간... 제정신이 조금 들어오기 시작하는 때.



세상에 정상으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원래 조금 미쳐 있어야 살아지는 게 아이 키우며 사는 인생 아닐까. 조금 미쳐 있어야, 누군가는 반쯤 넋이 나가 있어야 남겨진 가족들이 살아지는 인생 아닐까. 여전히 이런 모지리 같은 생각을 달고 산다. 그리곤 입술을 꽉 깨물면서 나도 모르게 분함에 이러저러 생각이 발버둥을 치고 엉뚱한 곳으로까지 맞닿는다. 착하고 만만해 보이니까. 그래서 함부로 잘해주다 멋대로 상처 받는 것이라고. 사랑하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도.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젠 그럴 수도 없다면... 진퇴양난. 생각의 덫에 빠진 인간.



생각도 보이는 것들도 모두 뿌옇게 흐려진다. 흐리멍텅하게. 눈에 물이 많이 고이다 쏟아지면. 늘 그렇다.




페르난도 페소아는 그의 유일한 뮤즈였던 오펠리아에게 무려 2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받았다 한다. 그러나 그가 그녀에게 남긴 편지는 고작 49통이라고. 이런 망할. 몹쓸 인간. (어쨌든 그는 요절했다.) 양적으로 한쪽으로 기울어진 양상이 확연히 드러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생이 그렇게 언페어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그녀에게 숱한 편지를 받았을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받는 자의 우월감을 즐겼던 것인가. 그러하니 애당초 평등할 수 없는 게임. 사랑도. 인생도. 특히 사랑이란 스테이지 안에서는 반드시 우위에 서는 자가 생기고 만다. 더 많이 상대의 마음과 에너지를 빼앗는 자...누군가들은 이겼고 나는 진 게임. 우리가 우리로 살아나가는 이 시절. 내가 우는 양에 비례하는 만큼 자라는 그들... 나아가는 그들과 자꾸만 뒤로 물러나고 싶은 한 인간. 페소아가 말했듯 '벌칙을 수행하듯' 쓰는 사람... 내가 선택한 사랑으로 인해 벌을 받고 그 벌로 인해 쓰게 되고 마는 인간.... 울면서. 눈물을 닦으면서.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조소를 터트리는 미친년이 되고 마는 시간.



페소아는 죽기 하루 전인 1935년 11월 29일에 영어로 이 문구를 마지막으로 썼다고 한다.

I know not what tomorrow will bring.

그렇다. 우리는 모른다. 내일이 무엇을 가져다줄지.

그것이 되풀이되는 눈물이든 슬픔이든, 분함이든 속상함이든. 억지로 웃는 시간이든.

제정신인 인간으로서 활짝 웃으며 괜찮은 상태라는 연기를 되풀이하는 인생이든.

알고 싶지만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서. 알 수 없기에 작은 희망이 보일 수도 있는 것일까

살다 보면 보일까. 내일은 아직 살아보지 않았으니 일단 살다 보면....




가라앉지 말아야지. 너무 그러면...정말 차가워진다. 차가워지면 또 한순간이다.




#저녁은...소불고기로. 일단 살고 보는 학습된 인간의, 널뛰는 감정과, 그로 인해  PMS 기간을 의심하고 마는 이토록 우습고 지겨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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