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쓸 수밖에 없어요

by 헤븐

그간 무탈하셨을까요. 아침저녁이면 털모자나 장갑을 꺼내 쓰기 시작하는 요즘이라니. 신체가 전반적으로 다소 차가운 체온의, 얼음공주라는 옛 별명이 딱 어울릴 만큼 수족냉증 인간인 저로서는 어느새 겨울이 왔나 싶어서 지나가는 이 시간들이 괜스레 새삼스럽기만 합니다. 특히 민님께 가을의 편지를 적는 밤이 어제 같았는데 어느새 호빵이 출시되기 시작하는 시기라니. 시간은 부지런히 지나가는 중이란 증거겠죠. 지난번에 보내주신 편지 제목이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어요. 시간과 글쓰기, 그리고 기억은 서로 닮았다고.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 시간도 무언가 제대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대로 지나가버리고 그 시간들 속에서 만들어지는 기억이란 누군가가 기억하지 않으면, 혹은 기억되지 않으면 그 또한 소실되기 쉬운 것. 글쓰기는 아니나 다를까요. 기록이라는 활자화되지 않은 이야기는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하는 것. 그대로 잊히고 묻히고 마는 것...



그러니 저로서는 쓸 수밖에 없습니다. 기억하고 기억되고 싶어서 말이죠. 어린아이의 투정 같은 부끄러운 이유일 수 있지만. 혹은 에밀리 디킨슨의 '조용한 열정'과 비슷한 마음결을 닮았을지도 모를 테지만. 한 사람의 삶에 들어왔다 나간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되도록 오래 간직하고 기억할 수 있는 방법 중 단언컨대 그 시간과 기억을 기록하는 것만큼 탁월한 방법이 어디 있을까 싶어요. 물론 그것이 반갑고 다정한 기억이든 아니면 쓰리게 침범당한 시간이든. 어쩌면 시간과 기억이란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조금 더 활발히 움직이는 것도 같아요. 기억하려는 자의 마음속에서 재편되고 편집되고 삭제되고 또다시 복기되기도 하니까요. 그렇게 결국 '나'라는 사람을 조금씩 완성시켜 나가는 것은 다름 아닌 차곡차곡 쌓아 올린 시간과 그 시간 속 기억들이 아닌가 싶은. 이런 생각은 어쩌면 도스토옙스키의 '백야'에 나오는 '나'와 같은 몽상가적 생각인 걸까요. 그렇다면 지금의 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지극히 무쓸모 하다고 생각되기 쉬운 인간일지도요. 비효율적인 무언가 들을 그럼에도 계속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쓰고 또 쓰다가 기어코 쓰고 (write) 그러다가 제 풀에 지치고, 그러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마는, 그런 인간.



민님. 요 며칠 내내 저는 사실 핑계쟁이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은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취재 기자가, 어느 날은 귀여운 아이들의 코딩 강사가, 또 어느 날은 어느 곳의 모니터링단이나 소비자 연구원으로. 그러나 대부분의 날들은 누군가를 보호하고 지키는 책무에 최선일 수밖에 없는 부모로. 그리고 대부분의 밤은 깜빡이는 마우스 커서를 내내 노려보며 키보드 위에 열 손가락을 올려놓았으나 도무지 한 문장도 쓰지 못한 채 그렇게 노트북을 닫고 옆에 펼쳐진 책을 몇 장 읽다가 피곤한 나머지 그대로 식탁 위에서 잠들어 버리기 일쑤였던. 그런 핑계들을 방패삼아 글을 교묘히 피하게 되고 말아서 정말이지 한 문장도 제대로, 아예 쓰지 못했던 지난 몇 주의 저였어요. 민님께로의 편지조차도. 말하고 싶은 것들은 그때그때 한 가득 핸드폰을 열어 단어들로만 연약하게 적혀 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이런 식인 거였어요. 하루는 제임스 설터, 또 하루는 도스토옙스키, 그러다 여러 단어들이 중구난방 계속 연이어지는 거예요. 오늘은 보쌈 성공, 김장, 김치, 육아, 아이들, 집안일, 생필품, 돈, 일, 노후, 그리고 글쓰기... 서로 관계가 있다고 절대 말할 수 없지만 은근히 각 단어들 모두가 제각각의 이야기를 품고 있어서 편지로 충분히 쓰고도 남을 만큼의 그런 누군가의 '이야기'.



캡처.JPG @영화 '조용한 열정' 中. 에밀리 디킨슨으로부터의 편지 같은 영화예요. 민님과 언젠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던-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결국 쓰지 않으니, 기억을 제대로 봉인하지 않고 그대로 흘려버리고 마니 정말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에요. 쓰고 싶었던, 발화하고 싶었던, 꺼내 놓고 싶었던 그 '이야기' 들이. 서평 몇 편을 제외하고는 도무지 한 문장도 제대로 쓰지 못했던 지난 몇 주 동안 저는 은근한 회의감에 자주 풍덩 빠져 버리기도 했어요. 그래도 여름부터 내내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러닝머신 위에서 생각과 감정에 너무 빠지지 않는 훈련을 나름 하려 노력했던 습관 덕분에 아주 우울감에 휩싸이진 않는 저를 발견하니 조금은 다행이고 감사했고요. 솔직히 말해서 그냥 하루하루 주어진 일과들을 미션 수행하듯 아니면 무엇에 쫓기듯 클리어해 나가다 보니 하루들이 계속 지나가 있었던 거였을지도 몰라요. 일주일이면 꽤 다양한 역할들을 소화해내는 것에 집중하며 성실했던 저였음에도. 정작 스스로 가장 해내고 싶은 '글을 쓰는 사람' 으로서의 시간은 왜 그리도 불성실하게 흘려버리고 말았던 건지... 그 생각을 하면 이상하게 스스로 너무 부끄러워집니다. 정말 사랑하는 '일' 은 다름 아닌 시간과 기억, 그것들을 활자로 남기고 그렇게 나의 '언어'를 나의 '시간'과 '기억'을 제대로 지키며 살아가는 것인데...



여기, 자신이 그간 쌓아 올린 시간과 기억을 통째로 빼앗긴 여성이 있어요. '스틸 앨리스'에 나오는 주인공 앨리스인데요. 그녀는 소설 속에서 약 25년간 심리언어학 분야의 뛰어난 경력자로서 누구보다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고 보여져요. 그런데 한순간에 그녀의 삶을 바뀌게 만든 파괴적인 병이 생겨버리고 말아요. 바로 알츠하이머였죠. 앨리스에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언어를 생각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어요. 왜 아니겠어요. 게다가 그녀는 명망 높은 언어학자였는걸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읽지 못한다. 글을 쓰지 못한다. 언어 사용이 중단된다."는 사실은 (p. 107) 그녀를 절망에 빠뜨리고 말죠. 가족 조차 의심하는 자신이 미워질 만큼. 그야말로 살고 싶지 않게 될 만큼.



존은 나의 정신을 사랑한다. 그가 알츠하이머 병에 거린 나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p. 115


테이블 서랍을 열면 안쪽에 약병이 있을 것이다. 약병은 흰 이름표에 검은 글씨로 '앨리스의 것'이라고 적혀 있다. 그 안에는 알약이 많이 들어 있다. 물을 많이 떠서 그 약들을 다 먹어야 한다. 반드시 다 먹어야 한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잠들면 된다. 잊기 전에 지금 가라. 당신이 하는 일을 아무에게도 말해선 안 된다. 제발 나를 믿어라. 사랑하는 앨리스 하울랜드. p. 382




yyy.JPG 그렇지만 앨리스의 곁엔 리디아가 있었어요. 기억이 사라질 즈음에서야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걸 보게 돼요..



그녀는 스스로 삶을 정리하려 나름의 계획을 세우지만 그 마저도 실패하고 말아요. 그렇지만 소설 속에서든 소설이 원작이 된 영화 속에서든 그녀를 통해 우리는 어떤 희미한 삶의 본질을 발견하게 되고 말죠. 정신이 멀쩡했을 때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던 가족이 지닌 상처, 그러나 소중한 기억을 잃어가고 있을 때야 비로소 이해하게 되고 마는 어떤 감정과 마음들. 상처 받은 사람만이 누군가의 상처를 확연히 직시하게 되는 삶의 역설적 모순. 인생에서 성공이라는 것은 어떻게 정의되는지,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화해와 용서는 어떤 과정을 겪게 되는지. 무엇보다 바닥까지 굴러 떨어진 자신을 기어코 믿게 만드는 원력은 다름 아닌 끝까지 곁에 남는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



'스틸 앨리스'는 가볍게 읽히는 장편소설이지만, 어쩌면 그 소설이 은은하게 계속 제 마음에 남았던 이유는 다름 아닌 '시간'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지나가는 시간을 언젠가 갑자기 잊어버리게 되는 날이 왔을 때. 혹은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 다다랐을 때. 도대체 무엇으로 그 시간들을 지킬 수 있을지. 그 생각을 문득 하다 보니 저로서는 '글' 밖에는 달리 떠오르지 않았는데요. 나라는 인간은 제대로 쓰는 인간으로 살고 있던가 싶은 생각까지 어설프게 도달하다가 결국 스스로 무언가 낮이 뜨거워져서 그 이후부터 조금씩 찌그러져있었던 것도 같아요... 난 여태껏 부끄러운 글들을 쓰고 있었던 건 아닐까 라고. 진실된 글을 쓰고 싶다고 늘 생각하면서도 정말 진실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라고. 너무 내 멋대로 써 버리고 마는 것은 아닐까 라고. 이대로 제멋대로 써 버리다간 그것이야말로 비효율의 극치 아니던가 라고. 비효율적으로 사는 삶에 누군가는 열렬한 응원을 주시고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큰 축복 아닌가 라는,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백야'에 나오는, 나스쩬까와의 이별 앞에서도 담담히 인생의 축복을 운운하는 '나'처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게 되는 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 라고...



오늘은 너무나도 두서없이 장황스러운 편지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너무 죄송스럽지만. 민님... 그래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열심히... 되도록 열심히 살려고 다시금 아등바등 대고 있었던 요즘의 제가. 가끔 그 쳇바퀴 같은 시간들에 지쳐서 삶의 회의감이 들고 말 때. 결국 저를 일으키고 구원해주는 탁월한 친구는 다름 아닌 '글' 이고 그것이 결국 나로 살아가게 만드는, 자신의 진정한 언어를 찾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믿으면서 말이죠.


uu.JPG 고통스럽지 않다고. 그냥 살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그녀의 발언이 꽤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스틸 앨리스의 앨리스가 자신에게 쓸 수밖에 없었던 절박하고도 최선의 마음을 편지로 두서없이 적어내렸던 것처럼. 버지니아 울프를 비롯해서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수전 손택이나 프랑수아즈 사강, 토니 모리슨, 뒤라스, 보부아르, 한나 아렌트...... 징글징글한 그녀들의 삶을 그럼에도 살아지게 만든 건 다름 아닌 '글' 일지도 몰라서.



곧 결정해야 할 어떤 선택 앞에서 여직 내적 갈등을 하지만 결국 그 고민은 기쁘고 감사한 것이라는 걸 기억하며. 내내 쓰지 못했다가 한꺼번에 펑하고 터뜨리듯 익혀버린 문장들을 단숨에 터뜨려내버리고 싶었던 오늘... 저 또한 비효율적인 것을 사랑하려 애쓰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 일쑤인 인생이지만.



그러니 쓸 수밖에 없어요..

지극히 비효율적이고 진이 빠지기도 쉽지만 그런 시간의 터널을 유순히 흘러가게 만들어주는 유일한 것...

지나가면 사라지는 시간이고 사라지면 찾기 힘든 것이 기억이라, 그 기억조차 사랑으로 지켜내고 싶어서.

시가 되어 소멸했다던 에밀리 디킨슨의 '조용한 열정' 에는 못 따라가겠지만, 그만큼의 마음으로...



- 비효율적이어서 몹시 밉다가도 그것들을 결국 사랑하게 되고 마는, 헤븐 드림 -



tt.JPG '조용한 열정'을 지켜내고 싶습니다.... 가능할까요. 이런 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