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낼 수 없기에 들키고 싶은 것들

by 헤븐

민님의 비밀글에 대한 편지, 그리고 지지 않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지한다는 문장에서 오래 멈췄던 저였습니다. 편지 고마워요 민님. 설 연휴는 잘 보내셨을까요. 매년 찾아오는 명절이라지만 해마다 조금씩 그 시간들을 지나가며 새삼스럽지만 저의 어떤 부분들이 변해가는 걸 느끼곤 해요. 예컨대 마주쳐야만 하는 어떤 순간엔, 이제는 미운 기억보다 고마웠던 추억을 생각하려 애쓰는 마음. 그리하여 스스로 회고하고 그러다 회개하고 그렇게 점점 더 조용할 수 있는 스스로의 태도랄까, 뭐 그런 것들이 제게는 나름 좋은 변화인 것만 같아요...



시작보다 지속이 더 어려운 법이죠. 아무렴요. 저도 민님의 편지 속 그 말에 완전히 공감했는걸요. 읽고 쓰는 시간을 이어가는 것, 게다가 '제대로' 그 행위를 홀로 유지한다는 것은 무언의 고독을 동반한 내적 고통을 감내하는 분투력 없이는 쉽지 않을 테죠. 또한 말씀하셨듯 시작이 어렵다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건 그 시작하는 설레는 마음을 유지하는 것... 사랑의 세계가 특히 그러할 것 같아요. 엔딩까지 어떻게 천천히 그 처음의 마음을 지켜내면서 사랑을 지속할 것인가에 대하여 저는 자주 생각하는걸요. 두 사람 사이의 처음, 스파크가 튀었을 그 짜릿함과 두근거림, 기대감과 벅찬 출발이 되도록 느리게 흘러가기를 바라는 것이죠. 스스로 알아채지 못할 만큼 부디 천천히 식어가기를 바라며 헤어지는 '중' 일지도 모르는 어떤 마음들을 잠이 오지 않는 밤엔 침대에서 뒤척이며 생각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에게 이불을 덮어주면서, 혹은 출근하는 등에 대고 말하지 못한 문장을 혼자 중얼대면서. 별 거 아닌 것인데도 왜 그이에게 어떤 마음들은 끝내 말하지 못하고 마는 것인지. 도대체 왜 손길이 그의 살갗에 피부에 입술에 닿을 수 없이 주저하게 되고 마는 것인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한편으로는 그런 마음이 아니었음에도...



h.JPG @너를 닮은 사람 中. 정소현 소설가의 단편과 각색된 드라마에 기댄 채, 오늘의 편지를 시작할까 합니다.



민님의 편지를 읽다가 잠시 놀랐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너무나도 염치없고 예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반성하고 말았어요. 민님은 대학 시절 친구분과의 아픈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넌지시 들려주시기 전에 허락을 구해야 하는지를 고민하셨댔죠. 그래서였어요. 제가 무척이나 부끄럽고 모자란 인간이라는 반성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실 그동안의 제 보잘것없고 거친 글들은 누군가의 허락을 구하려는 생각을 미처(!) 해내지 못한 인간의 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글을 쓰는 시간은 대부분 어떤 인물들을 - 허구든 사실이든 - 떠올리며 글을 쓰곤 해요. 아주 자주. 여전히 매번.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는 그들에게 단 한 번도 허락을 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에요. 심히 부끄럽습니다.



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여태껏 제 글들 속에서 드러나버리고 마는 그, 그녀, 그들에게 너무 미안한 것이에요... 내 글이지만, 내가 썼지만, 내가 주인이 아닌 경우가 있는 글도 분명 있는 법이니까. 그래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 조금은 더 신중하게 쓸 수 있겠다 싶은 야무진 각오도 생겼으니까요. 대신 부작용이라 한다면 일종의 자기 검열이 좀 강해지지 않을까 싶었네요... 솔직한 마음이라면 글의 세계 안에서만큼은 검열하고 싶지 않고 꾸미지 않은 채로 거침없이 그냥 쓰고 싶은 여전한 마음이지만... 언젠가부터는 자주 고민하고 주저하게도 됩니다. 어디까지 드러내고 어디까지 드러내지 않을지에 대해서.



바로 그것. 오늘은 그 '드러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사실 '비밀글에 대하여'라는 편지를 주셨던 날 바로 떠오른 단편소설이 있었거든요. 게다가 그것은 작년 말에는 드라마로도 각색되어 종영한 이야기이기도 했죠. 정소현 소설가의 '너를 닮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 인간으로 살아가며 관계 속에서 주고받게 되는 드러냄의 경계들에 대해서. 침묵은 한편 거짓말의 또 다른 형태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우리들은 살면서 '우리' 이거나 '서로'라는 관계 속에서 어디까지 드러내고 어디까지 드러내지 못하고 마는 것인지.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에서의 여러 페르소나들을 걸치며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과연 비밀이라는 것이 유효한 범위는 어디부터 어디까지인지. 뭐 그런 답을 절대 구할 수 없는 채 그저 각자의 마음속에서 머무르고 마는 그런 형태를 알 수 없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것' 들에 대해서.



jj.JPG 희주와 우재는 '다시' 만나요. 비록 서로의 처음은 이미 없어졌고 각자의 기억은 따로 또 같이 잊혀졌겠지만.



'너를 닮은 소설'의 원작인 '나'는 '너'를 부러워해요. '그 무렵 네가 부러웠다. 네가 가진 모든 것들, 네가 가지지 못한 것들, 어느 하나 부럽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싸구려 코트마저 부러웠다. 네가 10년도 더 지난 그 낡은 옷을 아직까지 입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세월을 거슬러온 그 옷이 이렇게 무섭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면서 (p.46, 너를 닮은 사람 中) 지난 시간을 복기하기 시작하죠. '너'의 등장으로 인해.



나는 너와 인생의 아주 중요했던 한 시절을 함께 보냈다. 너와 헤어진 후 내 삶은 그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과거를 뒤돌아보지 않음으로써, 시간을 함께한 사람들을 내 인생에서 퇴장시킴으로써 한 시절을 정리했다. 너도 그렇게 정리한 과거의 인물이며 내 삶에 다시 끼어들면 안 되는 존재였다.


- p. 53, 너를 닮은 사람 中 -



용서받지 못하는 시간을 지닌 '나'인 희주와 그녀를 향해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을 확실하게 일갈하지 못하지만 확고하게 드러내는 '너'인 해원. 희주는 해원을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아요. 다만 두려워하죠. 물론 그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감추지만 그럴수록 드러날 뿐이에요. 원작에서든 스크린에서든 저는 그녀를 묘사하는 문장과 장면을 바라보며 자꾸만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되고 말았어요. 그녀가 두려워하는 건 다름 아닌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던 자신이었을지도 모를 것이라고. 그 시절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한 구원이었을 남편을 희주는 사랑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기에. 사랑 없는 시작이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반대로 그 이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기혼 세계의 은은한 자괴와 환멸, 세월의 부침으로 인해 우연하게 다가왔지만 뿌리칠 수 없었던 '그'인 우재 또한 사랑하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었을 기이하게 처참한 인생의 모순을... '나'는 느끼지 않았을지.



33.JPG 우리는 살면서 드러낼 수 없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에


f.JPG 들키고 싶은 마음도 생기는 지 모르곘어요. 잊은 척 하며 산다는 게 누군가에겐 힘겨울 수 있을지도 모를테니까.



'나'는 생각하죠. '너와 헤어진 후 내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과거의 것들과 결별할수록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내게 가장 좋은 시절은 늘 바로 지금이었다. 나는 젊은 네가 더 이상 부럽지 않았다. ' 고. (p. 66) 그런 '나' 에게 '너'는 선명히 드러내요. '철드는 건 나쁘거나 대단한 게 아니에요.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무게를 온전히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당신은 그냥 자기 연민에 빠진 철부지였고 당신 뜻대로 쉰이 넘은 지금까지 여전히 철이 안 든 것 같네요. 나는 당신을 경멸합니다.'라고 (p.82)



비밀은 유효성은 어디까지일까요. 어떤 비밀들은 마음이 패일 정도의 어떤 끝없는 슬픔을 휩쓸고 몰아오기도 하는 법이라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채로 겨우 눈물을 참은 채 견딜 때. 드러내지 못하는 그 비밀은 그렇기에 반대로 여러 형식으로 들키고 싶은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해요. 희주에게는 그녀가 뒤늦게 배운 '그림'이라는 형태로. 기억을 잃었던 우재는 결국 다시 기억을 되찾아 그녀에게 집착하고 마는 자신의 결말을 알지 못한 채 다시금 심장이 시키는 데로 직진하는 예전의 거침없는 '자신'으로. 그들을 증오하는 분노의 힘만이 삶의 동력이 된 채 누구보다 안타까운 삶을 살아내고 있는 해원의 비밀은 사실은 용서하고 용서받길 바랐던, 집착에서 홀가분하고 싶었던 마음일지도. 희주의 드러내지 못했던 삶의 단면을 알면서도 모른 척해 주는 그녀의 남편도 어쩌면 그로 인해 사랑의 양가성에 대해 철저히 느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랑하지만 동시에 미워하는. 용서하면서도 절대 용서할 수 없는.



6.JPG 우리는 살면서 서로를 잘 안다고, 어쩌면 영원히 절대 말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 사람으로 살아보지 않는 이상.


yy.JPG 시작의 마음은 한 사람에겐 없어졌고 한 사람에겐 여전히 남겨졌어요. 그랬을 때 드러내고 싶지 않은 건 어느 쪽일까요.



제가 여전히 기억하는, 기억하고 싶은 누군가들에게 손편지를 쓰고 가끔 수취인 불명이 되고 마는 편지일지라도 펜을 꾹 누르며 저도 모르게 쓰고 싶은 마음에 기댄 채 쓰는 이유는 어쩌면 두 자아가 공존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드러낼 수 없는 '나'와 들키고 싶은 다른 한쪽의 '나'가 동시에 살아있기에. 지울 수 없는 기억을 꺼내어 편지를 쓰는 그 순간만큼은 나 자신과 진실한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잃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책을 읽는 이유도 어쩌면 타인의 삶에 빠져볼 때, 내면 어딘가에서 그것에 기대어 드러내고 싶은 자신의 민낯을 깨닫게 만드는 유일한 형태라 그럴지도 모를 것이고... 결국 제게 있어서 읽고 쓰는 행위는 '나'라는 인간에 대한 여러 면들 속에서도 진실성을 지키고 싶은 소극적인 최선인 걸까 싶고.



우리가 살면서 섞이고 마주치는 인연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알아갈수록 서로에 의해 수없이 바뀌기 마련이죠. 그렇다면 이미 '우리'가 된 관계가 어떤 시작과 어떤 엔딩을 맞든, 부디 저는 바랄 뿐이에요. 자신만의 기준으로만 세상과 사람을 대한 채 이미 완성되어버린 사람이 되지는 말자고. 그런 사람들 앞에서는 한없이 입이 무거워져 그 어떤 것도 드러낼 수 없게 만드니까...



그리하여 저는 완성된 마음의 인간이 아니라, 여전히 미완성된 채여도 새롭게 만들어질 수 있는,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다시 새롭게 소생할 수도 있는 마음을 지닌 인간이 되어보고도 싶어집니다. 특히 사람과 사랑의 영역에서는. 때때로 진심으로 그런 인간으로 살아보고도 싶어지는 것이예요. 이미 완성된 채 살아가는 건... 왠지 억울하니까.



하나의 이야기가 진실을 다 말해주지는 않듯, 우리 인생도 단 한 번뿐이니까... 그러하니까요. 그런데 이미 꽤 완성된 채 어떤 부분은 확실히 굳어진 채 살아가는 저는, 다시 눈부셔질 수 있을까요. 다시 스스로에게, 누군가에게 사랑스러운 인간이 될 수나 있는 존재일까요. 사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다는 건 자신이 없다는 반증일까요. 아니면 처음이 흐려지는 어떤 속도를 간신히 천천히 막아내고 있기 때문일까요.



photo-1544551950-db18acf4c5be.jfif 시간은 정직해요. 속절없이 반복되죠. 시간을 닮고 싶지만 그러기엔 각자 달라요. 흐르는 속도와 잊히는 기억의 시간은.



- '어제의 우리들'을 생각하다 저도 모르게 토끼눈이 되고 마는, 여전히 바보 같은 헤븐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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