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븐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한 달 만에 편지를 씁니다. 새해 들어서 쓰는 첫 편지예요. 2021에서 2022로 숫자가 바뀌었을 뿐, 코로나는 여전히 그대로이고 새로운 전염병이 추가되어 여전히 팬데믹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래도 새로운 숫자를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요. 2022 임인년, 검은 호랑이(흑호)의 해를 맞이하면서 저는 큰 아이의 나이를 새삼 실감했어요. 12년 전 백호랑이띠로 태어났거든요. 상서로운 기운을 전해준다는 검은 호랑이보다 저에겐 12년이라는 세월이 더 크게 다가왔어요. 아이가 자란 만큼 저도 그만큼 자랐...아니 (눙물 좀 닦고)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에서요.
그 사이 저는 블로그를 통해 여러 기회를 만났고 이렇게 브런치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작정하고 책을 읽은지도 올해 8년 차가 되었네요. 여전히 읽고 쓰는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무언가를 시작하는 마음보다 지속하는 일이 더 어렵다는 생각에 ‘계속’ 읽고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랑을 시작하는 것보다 사랑을 지속하는 일이 더 어렵듯이 시작이 주는 '짜릿한 설렘'보다 '힘겨운 지속'에 대해 생각하는 요즘이에요.
‘마음먹은 지 삼일이 못 간다’는 작심삼일이 지속의 어려움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말이 안니가 싶어요. 새해에 어김없이 단골로 등장하는 말. 매해 반복되는 작심삼일의 패턴을 보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관성이자 습성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만 나머지 반을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의 노력과 정성이 필요한데 그건 또 다른 어려움이니까요. 그래서 지속을 위한 시작을 생각해봅니다. 삼일 간격으로 작심한다면 어떨까요? 이미 습관이 형성되어 있더라도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기 위해서 필요한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 삼일(간격으로 하는) 작심.
사자성어를 말하는 김에 조금 더 써볼게요. 얼마 전에 글쓰기에 관한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적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적자생존. 어떤 글이든 우선 쓰기를 강조하는 말이라는 점에서 인상적이었어요. 한 줄 메모든, 단편적인 생각이든 우선 적고 보자, 라는 어떤 결의가 느껴졌거든요. 운이 좋으면 한 줄로 남은 글은 다른 글의 씨앗이 되고 결정적인 생각거리를 던져줄 수 있겠지요? 한번 스쳤던 생각이 언제나 다시 오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니 가능한 붙잡아야 한다는 적자생존에 기대게 됩니다.
문득 살아남는 글은 어떤 글일까, 묻고 싶어요. 어제 11년 만에 대학 시절 친구를 만나고 돌아와 일기를 썼어요. 다 쓰고 나서 어쩐지 블로그에 올리기에는 고민이 되어 임시저장 글로 남겼어요. 블로그에는 임시저장 글 311개가 있고(정리는 집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어요!) 브런치 작가의 서랍에는 3개의 저장 글이 있어요. 블로그를 메모장처럼 쓰기도 해서 이렇게 많은 글이 저장되었나 봐요. 한편으로는 저장 글이 비밀글 같아요. 이런저런 이유로 발행되지 않고 발행되지 못한 글들이라서요. 이런저런 이유를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워서 ‘비밀’이라는 이름을 간편하게 붙입니다. 사실 막상 들여다보면 별것 없을 수 있겠지만요. 헤븐님도 임시 저장하는 비밀글이 있나요? 있다면 어떤 글이 ‘저장 글’에 머물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저장 글과 공개글 사이에는 어떤 문턱과 경계가 있을까요?
아직 정리되지 않아서
지나치게 사적이라서
민감한 주제여서
그냥
친구와 만난 글을 비밀글로 남겨 둔 이유는 허락을 구해야 하는지 고민되어서였어요. 혼자 보는 글이라면 문제가 아니겠지만, 다른 누군가가 보게 된다면 글 속에 등장하는 당사자에게 알려야 하는지 스스로 묻게 되는 것이죠. 사실 일일이 허락을 구해야 한다면 어떤 글도 쓰기가 어려울 거예요. 혼자 무인도에 살지 않는 이상 나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다른 누군가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되어 있으니까요. 그것이 민감한 부분이었다면 더욱 그렇겠죠. 나의 글이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그러니 최소한의 이야기를 해볼게요. 대학 동기 친구와 자연스레 대학시절 이야기를 나누었고 저는 잊고 있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대학 1학년 때 자살한 동기에 대해서요. 친구는 그로 인해 몹시 힘들었고 동기의 죽음을 극복하는데 10년이 넘게 걸렸다고 말했어요. 같은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가깝게 지냈기에 죽음의 충격이 컸다는 말을 11년 만에 들은 것이죠. 왜 우리는 그 당시에 나누지 못했을까. 왜 이제야 듣게 되었을까. 저는 친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스스로 물었어요.
동기의 발인날 모두 아무 말 없이 흩어졌던 순간이 생각났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묵직한 적막 속에서 돌아섰던 순간 말이죠. 누구 하나 같이 술을 마시자거나 어디로 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어요.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것도 자살이라는 무게가 너무나도 커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었어요. 친구가 말하더군요. 우리는 그때 너무 어렸던 거야.
헤븐님의 지난 편지에서 때때로 엄습해 오는 죽고 싶다는 마음에 지지 않으려 한다고 읽었어요. 그래서 편지 제목이 ‘지지 않는 마음’이라고요. 엉뚱하게도 ‘지피지기 백전백승’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나를 놓아버리고 싶다는 그 마음의 정체를 알아야 지지 않을 것 같아서요. 철학자 사이먼 클리츨리의 『자살에 대하여』라는 책에 이런 말이 나와요,
우리에게는 자살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할 언어가 없다. 자살이라는 주제는 매우 불쾌하면서도 끔찍할 정도로 강력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아주 힘들기 때문이다.
자살은 이해되어야 하며, 자살에 대해 더 성숙하고 관대하며 성찰적인 논의가 절실히 필요하다. 자살한 사람의 배우자와 가족, 친구들은 자살에 대해 논의하려는 어떤 시도든 이해할 만한 분노로 반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우리는 이야기해야 한다.
‘자살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할 언어가 없다’라는 말에 공감했어요. 언어가 없어서 말하지 못했고 언어가 없어도 말하려 하기보다 침묵하고 덮어둔 저의 마음을 돌아보았어요. 무겁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자살에 대해 외면하지 않고 터놓고 서로의 마음에 대해 나누었다면 친구가 겪었던 시간의 무게도 조금 덜어지지 않았을까, 이제야 생각하게 된 것이죠.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비밀도 있지만, 어떤 비밀은 공개되어야 누군가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을요.
그대로 비밀을 드러낼 수는 없어서 사람들은 비밀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말하기 위한 다양한 형식을 빌려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마 이 편지도 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지지 않는 마음을 지지하며
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