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책을 읽어주는 것은 그녀에게 이야기하는 그리고 그녀와 이야기하는 내 나름의 방식이었다."
- 책 읽어주는 남자 中 -
한동안 '책 읽어주는 남자'를 읽으셨을 것 같아서 문득 저 문장으로 편지를 시작해 봅니다. 민님. 그동안 잘 지내셨을까요. 1월의 마지막 목요일 (어느새!)인 이 시간, 저는 평일 한낮의 호사를 최대한 누리려 애쓰는 중입니다. 누군가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애써 숨기며 한편으로는 사적으로 최대한 이 짧은 시간의 기쁨을 즐기고자, 노트북 앞 키보드에 열 손가락을 올려놓고 있어요. 그리곤 떠오르는 생각과 마음은 그대로 손가락으로 전달되어 마치 저도 모르게 움직이는 대로 문장을 써 보고 ('두드리다'는 표현이 좀 더 어울릴 법하지만) 있는 중이고요.
민님의 서평을 읽어본 날 저는 영화를 한번 더 보았어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역시나 다시 보아도 정말 좋은 작품이었어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마이클의 저 대사, 기억하실까요. 최근에 읽고 영화도 보셨다면 아마 누구보다도 문장과 장면에 담긴 인물들의 감정선을 잘 이해하실 것 같기도 해요. 문맹인 한나와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며 서로 교감하기 시작하는 마이클, 두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을 넘어서 그 시대상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을 '악의 평범성'에 대해서. (그리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한나 아렌트'와 동시에 이제 제 기억 속엔 언제나 민님이 떠오르곤 한답니다. 열심히 사유하며 읽고 쓰고 공부하는 멋진 민님을)
"고통이 커질수록 사랑은 깊어간다."
마이클의 이 대사. 고통이 커질수록 사랑은 깊어질까요.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사실 한편으로는 고통이, 슬픔이, 절망과 좌절이 커지고 깊어지는 만큼 반대로 사랑은 멀리 도망칠 수 있는 연약한 것이 아니던가 라는 생각을 반대로 해보는 저이기도 했어요. 인간은 그리 강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 말이죠. 나약한 우리가 그럼에도 강해질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 역설적이지만 '사랑' 일 수 있으나, 그 사랑이 한편 우리를 얼마나 나약하고 무력하게 만드는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이클의 저 대사가 유독 근사하고도 위대하게 들렸습니다. 고통이 커질수록 사랑은 깊어간다는,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사랑을 했기에 가능했을테니까요. (그런데 문득,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되고... 사랑이라는 화두는 글을 자꾸 길게 늘어지게 만드네요)
문맹이었던 한나에게 삶은 어찌 보면 감옥과 다름없었을 테죠. 글자를 몰라 단절된 삶을 살아야만 했을 그녀의 제한적 인생과, 문맹이었기에 의도치 않게 어쨌든 감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처지를 떠올리면 괜히 마음이 욱신거립니다. 소설임에도 괜히 이것이 비단 문학에 불과할 뿐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니까요. 연약한 개인에 불과한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우리가 속한 국가와 체제, 사회 속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우리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의 행위가 타자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사실 무지하고 무력한 개인으로서는 잘 알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리하여 어쩌면 악의 평범성은 거기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인가 라는 그런 생각들.
책을 다시금 떠올리며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하게 되었네요. 한나의 삶에서 마이클은 어떤 존재였을까요. 메마르고 단절된 삶의 작은 빛 같은 존재였을까요. 이야기를 통해, 책을 통해, 그의 목소리를 통해 그녀가 알지 못하는 세상 '바깥'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존재. 책 읽어주는 남자... 그 둘은 어쨌든 사랑이었을까요. 그들의 모습은 이 시대에 정말 희소한 '사랑' 이 아닌가 싶었던, 비록 어떤 형태로 헤어졌고 맺어질 수 없었다 한들 그들의 시간은 분명 사랑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최근에 김혜진 소설가의 책들을 다시 읽고 있는데요. '9번의 일' 뿐 아니라 단편소설집인 '어비' 그리고 무엇보다 사실 오늘은 '중앙역'이라는 장편소설이 내내 기억에 남아서 관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결국 이렇게 편지를 띄우게 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왠지 중앙역 속에 그려지는 '나'와 '여자'의 처지가, '책 읽어주는 남자'의 한나와 마이클과는 정말 다르면서도 한편 묘하게 두 사람 사이의 교감 혹은 사랑 혹은 그 두 사람이 느꼈을 사회적 환경적 시대적 절망과 아주 비슷한 연장선에서 흐르는 것 같아서 말이죠.
"자존심이나 자존감. 그런 것들이 정말 있다면 그건 스스로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떨어뜨리고 마는 거다. 다시는 찾지 못하게 되는 거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멀리서 오는 최악을 기다리는 일뿐이다. - 김혜진, 중앙역, P, 29 광장 -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고 하지만 전혀 그 좋아짐을 만끽할 수 없는 채로 나락으로 떨어지며 간간히 살아가는 누군가들의 '현실' 이 문학 속에서 서늘하고도 정직한 문체와 묘사로 가득 메워진 '중앙역' 은 노숙인이 된 젊은 '나'가 중앙역 광장에서 등장하며 시작돼요. 그리고 그런 '나'의 유일한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캐리어를 같은 길거리의 부랑자인 나이 많고 병든 한 '여자' 에게 도둑맞게 되는 데, 그 캐리어를 다시 되찾기 위해 다시 만난 '여자'와 이상하게도 사랑에 빠지는 (그것이 사랑인지 연민인지 아니면 무엇인지 사실은 아직도 잘 정의 내릴 수 없지만) '나'가 보여요. 이것이 사랑이야기인지 아니면 이 시대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지독한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인지. 사실 읽는 이에 따라 각각의 해석과 감정이 흘러나오겠지만. 분명한 건 소설가는 이 책을 통해서 '그럼에도 사랑'을 발견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어요. 한나와 마이클의 서사에서도 묘하게 느껴지고 마는, 어딘지 완전하지 않은, 굉장히 불안한 형태의 인간이지만 그렇기에 그 불안을 메꿔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여자는 아무것도 의지할 데 없는 사람처럼 내게 매달린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짓궂게 되묻는다. 한밤중에만 그렇게 물을 수 있다.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날 좋아하는 거 맞아요? 여자는 내 입술에 가만히 입을 맞추기도 하고 말없이 나를 꼭 껴안기도 한다. 여자의 심장은 느리게 뛰지만 여자의 몸속을 도는 피가 점점 더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순간에 나는 여자가 나를 좋아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런 확신은 나를 들뜨게 하고 지치지 않게 만든다. - 중앙역, p, 109 연인들 中 -
별로 살고 싶지 않아 보이는 '나'였지만 그런 자신이 한 사람을 만나며 결국 '기분이 좋아진' 채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일상과 과거를 묻게 되죠. 왜 부랑자가 되었는지, 정말 길에서 만나는 남자들이랑 '아무렇게 살고 있는지'에 등에 대한 여러 진실들을 묻게 되는 이유는 (나는 알고 싶다. 그러나 내가 알고 싶은 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때로 진실이 베고 지나간 자리는 영원히 아물지 않는다. p. 120 ) 결국 사랑하니까. 지키고 싶으니까. 무언가 '도움' 이 되어 주고 싶다는, 연약하고 아스라지기 쉽지만 그럼에도 그러고 싶은 자신의 진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은 거예요.
법과 세상의 질서와 원칙이라는 기준은 중앙역의 '나'와 '여자' 두 사람의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가 되고 말아요. 여자가 거리의 부랑자이지만 한편 법과 질서의 세계에서 그 둘의 관계는 결국 불륜이라 보일 수밖에 없죠. 서류적으로 엄밀히 아이와 남편이 있고 가족관계 증명서에 고스란히 그녀는 기록된 시민이니까. 하지만 광장이라는 공간은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요. 누구의 아내나 엄마가 아닌 초라하고 병든, 그 누구도 돌봐주지 않았던 그녀를 돌보려 하는, 결국 그녀와 동시에 절망적인 삶을 그럼에도 사랑하려 애쓰고 고통스러워하는 '나'가 있을 뿐이죠.
세상이 지옥 같아도, 사는 게 끝이 없는 터널 같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어도. 결국 그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건 어쩌면 인간이 인간에게 느낄 수 있는 '사랑' 만이 유일한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은. 조금은 과하게 유치하다가 진지해졌다가 괜히 슬퍼졌다가 했던 요즘의 저는... 사실 한나와 마이클, 중앙역의 나와 여자, 그들의 사랑이 이상하게도 몹시 부러워졌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이 커져도 사랑 또한 동시에 같이 깊어지는 것 같았기에.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에게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랑'... 비록 문학 속 인물들이지만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형태에 가장 가까운 인간들이 아닐까 싶었기 때문에. 반대로 제 사랑을 의심해 볼 뿐이었어요. 그런 사랑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자문 끝에 저는 어떤 문장도, 어떤 말도 쉽게 떠올리지 못했기에.
민님. 사실 설날이 지나고 저는 다시 워킹맘이 됩니다. 정규직으로 작은 디자인 회사에 재입사를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기쁘지만 동시에 불안하고 두려운 역설적인 감정과 매일 조용히 대면하고 있어요. 이 사연도 나름 길지만... 오늘 편지에는 그보다 더 문학 작품들 속의 네 인물들을 이야기해보고 싶었던 건, 우리가 살면서 소박하고도 깊숙하게 다가오는 삶의 슬픔이나 두려움, 불안이나 절망을 그럼에도 이겨내게 만드는 건 다름 아닌 '사랑' 일 텐데, 과연 우리의 사랑들은 과연 얼마나 깊게 단단할 수 있는지, 생활적 사랑은 과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안녕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 어쨰서 내가 선택한 사랑이 한편 야속하고 속상하게 다가오기도 한 건지, 이런 마음을 사랑이라고 과연 정의할 수 있을지. 반면 많은 것들을 누리며 평온히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감사해하면서도 한편 정리되지 못한 마음을 그저 이렇게 책 이야기를 통해 나약한 고백조로 중구난방 나열해보는 것에 그치고 마네요.
책 읽어주는 남자에 기대어, 마무리를 어설프게 내자면.... 그러나, 이런 정리되지 못하는 마음일지라도, 편지를 쓰며 저의 깊숙한 삶의 단면을 당신께 이야기하는 것이 제 나름의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를. 그리고 민님의 새해, 그 두 번째 달인 2월의 시작은 1월보다 좀 더 좋은 기억이 많아지기를. 멀리서 응원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의 설날이 평온히 잘, 지나가고 좋은 2월을 맞이하기를 바라며. 헤븐 드림 -